19.02.19(화)
큰 눈이 올 거라며 재난 문자도 오고, 여기저기서 미리 알려줬다. 그래서인지 평소의 출근시간과 큰 차이 없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번에 눈이 내리고 나면 과연 이번 겨울에 또 눈이 올까 싶었다. 나는 일해야 하니 할 수 없고, 아내에게 나 대신 애들과 함께 밖에 나갔다 오라고 권했다. 아내도 상황을 봐서 나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침을 많이 하고 노란 콧물을 줄줄 흘리는 시윤이 때문에 고민 중이라고 했다.
아내는 점심때쯤 애들을 데리고 밖에 나갔다. 물론 시윤이 낮잠 시간에 맞춰서. 시윤이의 외출은 언제나 가엾다. 신나서 옷 입고 유모차에 타는 순간, 덫에 걸려든 거다. 시윤이가 유모차에서 곤히 자는 동안 소윤이는 신나게 놀고, 시윤이가 깨면 "이제 가자"며 자리를 정리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도 오늘은 시윤이가 깨고 나서도 바로 복귀하지 않고, 아주 조금이라도 야외에서의 시간을 가졌다.
집으로 돌아올 때, 소윤이는 하람이를 만나 하람이네 집에 놀러 갔다. 내가 퇴근했을 때까지도 소윤이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시윤이는 간만에 엄마랑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을 거다. 소윤이는 [아빠가 퇴근하면]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파기하려고 했다. 내가 퇴근했다고 하니 거기서 밥까지 먹고 가면 안되냐고 물었다는 얘기를 505호 사모님(하람이 엄마)이 아내에게 해줬다. 그래도 남의 집에서 갑자기 저녁 먹이는 게 죄송하니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잠시 후 다시 505호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다. 사모님의 친정어머니도 애들이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데 그냥 먹여서 보내라고 하셨다며 저녁을 먹이겠다고 했다. 소윤이의 저 넉살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나마 하람이랑 싸우지 않고 잘 놀고, 하람이 할머니도 소윤이를 귀여워해 주셔서 다행이었다. 오히려 하람이 혼자 있으면 손도 많이 가고, 짜증도 많이 내는데 소윤이가 같이 있으니 둘이 노느라 정신없어서 오히려 수월하시다면서. 결국 소윤이는 퇴근하는 하람이 아빠와도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가 오래 집을 비운 덕분에, 시윤이도 자기 천하를 오래 누려서 좋았을 거다.
집에 늦게 돌아온 만큼, 평소보다 취침에 돌입한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아내는 나에게 소윤이 홈스쿨 교재를 제본해야 한다며 좀 맡겨 달라고 했다. 아내 말로는 제본하는데 30분 정도 걸리니 맡겨 놓고 운동하러 갔다가 문 닫기 전에 찾으면 된다고 했다. 시간이 애매했다. 문 닫기 전에 찾으러 가려면 운동 시간이 너무 짧을 것 같았다. 곱씹어 보니 아내가 낮에 미리 얘기했을 때, 이미 불가능한 시간 계획이었다. 전형적으로 아내다운, 아주 빡빡하면서도 일체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 긍정적인 시간 계획이었다는 걸 왜 낮에는 못 알아차리고 동의했는지 후회했다. 고민 끝에 운동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노트북을 챙겼다.
문구점에 들러 제본을 맡기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죠?"
"한 10분이면 돼요"
"네? 10분이요?"
"네. 금방 돼요"
하아. 아내가 원망스럽구나. 이럴 거면 그냥 기다렸다가 받아서 운동 갔다 와도 됐을 텐데. 30분은 무슨 30분. 순식간에 제본이 끝난 교재를 받아 들고 카페로 갔다. 열심히 일기를 쓰고 있는데 카페 창 밖으로, 맞은편 꽃집이 보였다. 졸업식이 많을 때라 그런가 평소보다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었다. 혹시 내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문이 열려 있으면 꽃이나 한송이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는 김에 오랜만에 편지도 한 장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편지도 썼다. 편지를 다 쓰고 집에 갈 때쯤 되니 혹시나 꽃집 문이 닫힐까 봐 걱정이 됐다. 다행히 꽃집은 문을 닫지 않았고, 리시안셔스인지 뭔지 하는 하얀 꽃을 한송이 샀다.
아내는 시윤이 재우다가 같이 잠들었다고 했다. 아내는 꽃 한 송이와 편지 한 장에도 크게 기뻐했다. 소박한 여인. 소윤이랑 시윤이가 아내의 이런 성품을 좀 많이 닮아야 할 텐데. (여보. 난 소박하지 않아. 꽃 같은 건 필요 없고, 플스나 현찰로 줘. 나처럼 서프라이즈로)
이제 시윤이가 문을 열고 등장하는 건 일종의 루틴이 되어버렸나 보다. 점점 아내도 나도 놀라지 않을뿐더러, 받아들이고 있다. 슬프군. 안방 문 앞에 밟으면 따끔한 무언가를 깔아 놔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