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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Feb 10. 2024

치킨으로 지워보는 과오

23.08.21(월)

아내도 시윤이는 수족구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아침에 출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시윤이가 자기는 수족구가 아니라고 하면서 계속 떼를 쓰고 운다고 했다. 딱히 이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아무거나 핑곗거리를 삼아 그러는 듯했다. 통화를 마치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아내에게 메시지가 왔다.


“시윤이 정말. 집에 돌아온 걸 확 느끼게 해 주네”


역시. 떨어지면 그리움이지만 붙으면 불타는 감정의 연속이다. 아내는 뜨겁게 불타며 1박 2일의 행복했던 탈육아의 추억과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퇴근하고 나서 차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의 질문에 굉장히 성의 없이 대답하고, 이것저것 들어오는 요청을 귀찮다는 듯 쳐내기도 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니 굉장히 미안해졌다. 얼마 전에 K와 J 선생님이 집에 왔을 때, 자녀가 너무 예민하거나 이상하리만치 짜증을 낼 때는 대체로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이유란 게, 엄마와 아빠로부터 유발될 때가 많은 건 당연한 거고. 어떤 영역에서든 자녀를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하지 않았을 때, 귀신같이 그걸 느끼는 게 자녀들이다.


“소윤아. 우리 치킨 먹을까?”

“지금이여?”

“어. 소윤이 아까 치킨 먹고 싶다고 했잖아”

“진짜여? 좋아여”


저녁을 먹기 전에 소윤이가 치킨을 먹고 싶다고 했었다. 아내에게 치킨을 먹자고 해 볼까 생각했는데 아내가 이미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냥 다음에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니 다시 생각이 난 거다. 이미 저녁을 먹은 뒤였지만 배가 엄청 부를 정도로 먹지는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듯했다. 기프티콘으로 딱 한 마리만, 기분을 내는 차원으로 먹을 생각이었으니까.


집 근처에 있는 치킨 가게에 가지러 갔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도 모두 데리고 갔다. 그 시간에 치킨을 먹는다는 것도 좋은데 밖에 나가기까지 하니 모두 신이 났다. 잠옷 차림으로 막 뛰어다녔다. 소윤이만 내 옆에서 점잖게 걸었고 시윤이와 서윤이는 줄 풀린 강아지처럼 저 멀리 뛰어갔다가 되돌아오고, 다시 뛰어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마치 저녁을 안 먹은 아이들처럼 치킨을 먹었다. 살짝 매운 맛이 나는 치킨이었다. 소윤이는 무리가 없었지만 시윤이와 서윤이가 먹기에는 약간 버거운 듯했다. 튀김옷에서 매운 맛이 가장 많이 났다. 시윤이와 서윤이에게는 튀김옷을 벗기고 살만 발라서 줬다. 양 손에 라텍스 장갑을 끼고 쉴 틈 없이 살을 줬는데,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나나 아내는 먹을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아이들에게 살을 발라주고 남은 뼈다귀들을 한 쪽에 모았다. 입으로 발골한 게 아니기 때문에 살이 적잖이 붙어 있었다. 애들 다 발라주고 나면 먹을 나의 양식이었다.


“아빠. 아빠는 왜 튀김옷만 먹어여?”

“아빠? 튀김옷 좋아해”


완전한 거짓도, 완전한 사실도 아니었다. 진짜 튀김옷이 맛있기도 했지만, 튀김옷이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튀김옷만 먹으려고 치킨을 시키는 사람은 없으니까. 나중에 애들이


“아빠는 새우머리랑 튀김옷 좋아하잖아여”


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아빠는 새우머리랑 튀김옷’도’ 좋아하잖아여”


라고 얘기해 줘. 자녀들아.


불량한 아빠의 모습으로 가득 찼던 퇴근 이후의 시간을, 치킨 한 마리로 지우는 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 모두 행복한 감정을 안고 눕기는 했다. 다행이었다.


마라토너에게는 마지막 결승선을 코 앞에 둔 그 어딘가,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곧 반등을 앞둔 그 어딘가. 아름답고 행복한 마침표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점(death point)’이 육아에도 존재한다. 오늘은 ‘치킨’이라는 환각제를 사용했지만, 내일부터는 애초에 잘하고 싶다.


이게 별 거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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