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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Mar 12. 2024

여전히 뭉클한 심장소리

23.09.05(화)

요즘에는 아침에도 바쁘다. 아내가 아이들 아침을 차려주지 못하니까 여력이 되는 날에는 내가 아침을 차려주고 나올 때도 있다. 오늘도 아이들 아침을 차려주고 나왔는데 너무 더웠다. 막연히 ‘에어컨을 틀 시기는 지났다’라고 생각해서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땀이 줄줄 흘렀다. 옷도 입고 머리도 하고 출근 준비를 다 했는데 땀이 나니 괜스레 짜증이 났다. 특정 대상을 향하는 건 아니었지만 집에 있는 모두가 불쾌감이나 불편함을 느낄 만한 짜증이었다.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출근하고 나서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여보. 아침부터 힘들었을 텐데 수고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야. 더워서 너무 짜증 내고 나왔네. 미안”

“더우면 원래 짜증남”


부끄럽다. 이 덜 된 인간의 본 모습이.


잠깐 교회에 가서 일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갔다. 산부인과에 가는 날이었다. 아내의 입덧약을 받기 위해서 조금 서둘러 예약을 했다. 간 김에 윤이도 만나고. 병원에 우리 같은 가족은 없었다. 대부분 아내 혼자였다. 가끔 남편과 함께 온 사람이 보였고, 우리처럼 온 가족이 총출동한 경우는 없어 보였다. 네 번째였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꽤 조마조마했다. 너무 초반이라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우렁찬 심장 소리를 잘 들었다. 신기했다. 네 번째면 덤덤할 법도 했는데 여전히 두근거리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울컥하는 게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생명의 신비라고 설명하고 싶다. 아이를 셋 낳고 기르다 보니 생명의 소중함을 더 뼈저리게 느끼고, 생명의 생성과 탄생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그저 겸손해지는 마음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서윤이는 아직 너무 어리고) 이 생명의 고귀함을 깨닫고 그 근원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길 바라지만, 어떨지 모르겠다. 병원에서 출산하는 것이 가장 아쉬운 부분은 아이들이 철저히 배제된다는 거다. 이번에도 수술을 할 테니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가정출산을 할 용기는 없고.


“아빠. 저는 엄마가 서윤이 임신했을 때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게 기억나여. 뭐냐면, 아빠가 서윤이가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펄쩍 뛰면서 좋아했던 거”


맞다. 그때는 정말 그랬었다. 그전까지는 ‘상관없지 뭐. 건강하면 됐지’라고 얘기하긴 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진심이었지만, 감춘 진심도 따로 있었다.


‘그래도 딸이면서 건강하면 더 기쁘지 않을까?’


감사하게도, 생각만 해도 뭉클하게 만들고 한없이 기쁘게도 하는 서윤이가 태어났다. 이번에는 정말 상관이 없다. 물론 나에게 선택권을 준다면 난 ‘지체 없이’ 딸을 고르겠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큰 상관은 없다. 정말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나와 아내의 나이를 고려하면 ‘건강’ 분야에서 큰 이슈가 발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래도 저래도 장점 뿐이다.


딸이면 다시 한 번 막내딸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고, 딸 부자가 돼서 좋고, 시윤이가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아들이 되어서 좋고. 아들이면 시윤이의 남동생이 생겨서 좋고, 경험해 보지 않은 막내 아들을 경험해 볼 수 있으니 좋고. 쓰다 보니 약간 딸을 강력하게 원하는 것 같…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고 일을 하러 나왔다. 아내는 오늘 상태가 조금 좋았다. 퇴근하고 집에 갔더니 반찬까지 만들어 놓고 기다릴 정도였다.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손이 꽤 많이 가는 반찬들이었다. 힘이 생겨도 누워서 쉬면 좋겠는데, 아내도 주부 본능이 장착된 건지 어렵게 확보한 체력을 반찬 만드는 데 소비했다.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표정과 목소리에도 생기가 돌았다. 어제에 이어서 ‘이번에는 진짜 짧게 끝나나?’ 하는 기대감을 품기에 충분했다.


물론 생각처럼 진행되면 인생이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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