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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Mar 14. 2024

청소는 쉬어

23.09.09(토)

어제 아내가 주방을 치울 여력이 없어서 하루 동안의 산물을 그대로 뒀는데, 나도 밤에 그걸 못 치웠다. 새벽에 축구를 하러 가면서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주방 내가 치울게. 그대로 둬”


아내가 아침부터 주방을 치우느라 힘을 밸까 봐 메시지를 보냈는데, 다행히(진심으로) 아내는 내 말을 듣고 그대로 뒀다. 아내는 아침으로 만둣국을 끓였다. 아이들은 먼저 먹고 난 뒤였고, 아내는 나와 함께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배가 많이 고프다고 했다. 속이 엄청 울렁거리고 불편해서 잘 못 먹지만, 그만큼 공복도 심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먹자니 속이 불편하고 안 먹자니 배가 너무 고프고. 서둘러 식탁에 앉으려고 했는데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다. 다툼이라기 보다는 소소한 갈등인데 이 ‘소소한’ 갈등이 참 견디기 어렵다. 소윤이는 시윤이에게 은근하게 약을 올리고, 시윤이는 똑같이 서윤이에게, 그럼 서윤이는 엄청 짜증스러운 말투로 버릇없이 얘기하고. 식탁에 앉으려다 말고 아이들에게 일장 훈육을 시작했다. 약간의 감정이 섞이기도 했던 것 같다.


아내는 만둣국을 먹고 나서는 곧바로 누웠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 조금 앉아 있거나 뭔가를 할 몸 상태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누워야 하는 형편이었다.


‘아, 커피 한 잔 마셔야지’


라는 생각은 진작부터 했는데 한 잔의 여유를 내기가 어려웠다.


아이들과 함께 쿠키도 만들었다. 형님(아내 오빠)네서 가지고 온 전자레인지 겸 오븐이 잘 작동하는지 실험하느라 쿠키를 만들어 봤는데 잘 됐다. 그 전에 가지고 있던 건 오븐만 켜면 차단기가 떨어졌다. 아내와 아이들은 무척 기뻐했다. 쿠키 반죽을 만들어서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기들이 모양을 만들어서 납작하게 눌렀고, 서윤이는 내가 뭉쳐주면 누르는 것만 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이것만으로도 참 즐거워했다. 아내가 혼자 있을 때는 이 간단한 것도 해 주기가 어렵지만. 아이들은 구운 쿠키를 나갈 때 가지고 나가자고 했다.


주말이니 아이들과 나가야 했다. 그 전에 잠깐 눈을 붙였다. 어차피 구운 쿠키를 식힐 시간도 필요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30분 후에 깨워달라’고 부탁하고 잤다. 이런 부탁은 어찌나 칼같이 잘 지켜주는지.


오늘은 근처 대학교 운동장에 가기로 했다. 시윤이는 축구를 하고, 소윤이는 인라인스케이트와 자전거를 타고, 서윤이는 킥보드를 타고. 아이들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재깍재깍 옷을 찾아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 또 한 번 큰 사단이 났다.


시윤이가 마치 아침처럼, 또 동생과 투닥대며 다투는 거다. 시윤이를 불러서 훈육을 했다. 처음에는 조곤조곤 잘 얘기하다가 감정이 쏟아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감정이 막 섞여서 나왔다. 시윤이가 듣기에 매우 속상한 말도 하게 됐다. 시윤이는 아빠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한 게 속상하다고 했다.


“시윤아. 너 엄청 속상하지? 평소에 엄마는 너보다 몇 배는 더 속상해. 니가 속상한 만큼 너도 엄마나 누나, 동생한테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마”


이런 종류의 얘기를 한참 동안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시윤이가 충격(?)을 좀 받고 다른 이(특히 아내)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윤이는 매우 서럽게 펑펑 울었다. 그래도 나가는 건 포기 못하겠는지 ‘나갈 기분 아니니 집에 있겠다’는 얘기는 안 했다.


아내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외롭고 고독한 나날의 연속이다.


짐을 바리바리 챙겨서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 빵 가게에 들러서 점심 대신 먹을 빵도 몇 개 샀다. 아내도 공복 시간을 메워줄 쿠키를 사 달라고 했다. 최대한 향과 맛이 덜한 쿠키류는 그래도 좀 먹힌다고 했다. 아내에게 쿠키를 전달하고 운동장으로 갔다.


언제 가도 사람이 북적거리지 않는 곳이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오늘도 역시나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윤이는 바로 인라인스케이트를 신었고, 시윤이는 자전거부터 탔다. 소윤이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운동장을 딱 한 바퀴 돌더니 다시 벗었다.


“소윤아. 왜?”

“아, 그만 타려고여. 다리랑 허리가 너무 아파여”


그 뒤로는 계속 자전거를 탔다. 소윤이가 서윤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서윤이가 멀찍이 떨어진 언니를 쫓아가며 놀기도 했다. 시윤이는 나와 축구를 했다. 그새 다리 힘이 좀 세졌는지 공 차는 폼이나 궤적이 더 나아졌다. 단조로운 주고 받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중도가 높았고. 중간 중간 소윤이와 서윤이도 함께 껴서 하기도 했다.


저녁은 교회에 가서 먹기로 했다. 토요일 저녁마다 중고등부와 청년부 모임이 있는데 교회 집사님과 권사님들이 저녁을 해 주신다. 물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오늘은 사모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아내를 통해 저녁을 먹고 가라고 권유를 하셨다. 아무런 명분(?)없이 가서 저녁만 먹고 오는 게 다소 민망하긴 했지만 형식적인 권유가 아니었고 아이들도 교회에 가면 좋아할 테니 가서 먹기로 했다.


“아빠. 너무 재밌어여”


시윤이는 한창 재미가 있던 차에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하니 조금 아쉬워했다. 그래도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아쉬움에 깊게 빠지지는 않았다. ‘김치 등갈비찜’이라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먹기 힘든 음식을 저녁으로 먹었다. 밥값을 하기 위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나왔다. 심지어 남은 밥과 등갈비찜을 싸 주기도 하셨다.


집에 있는 아내는 변함없이 환자 상태였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누워 있기만 했다. 아이들이 모두 눕고 나서 교회에서 싸 온 등갈비찜에 밥을 조금 먹었다. 당연히 고기는 먹지 않았고, 김치와 국물을 조금 먹었다. 저녁이라 소화를 시킨다고 거실을 조금 걸었는데, 흡사 출산 후 모습 같았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구부정하게 한 발 한 발 어렵게 떼는 게.


“여보. 내일은 청소 나가지 마”

“왜?”

“그냥. 벌금 내. 여보 그것까지 나가면 너무 힘들 거 같아”


내일 한 달에 한 번 있는 빌라 청소하는 날인데, 아내가 나가지 말고 좀 자라고 했다. 아내 말 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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