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01(금)
어제 아내가 넌지시 얘기했다.
"여보. 내일 소윤이랑 조조영화?"
"그럴까? 소윤이 괜찮겠지?"
"그게 좀 걱정이긴 한데"
"무섭다고 나가자고 할까 봐. 팝콘으로 꼬시면 괜찮으려나?"
"그래. 괜찮을 거야"
어린이집 다닐 때,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가 본 것 말고는 영화관에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다. 3살때였나, 농구장에 데리고 갔다가 10초만에 나온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겁이 많다.
백석에서 10시30분에 상영하는 [슈퍼미니2]가 가장 적당한 영화였다. 일단 점 찍어 두고 아침에 일어나서 소윤이에게 물었다.
"소윤아"
"네"
"오늘 아빠랑 영화보러 갈까?"
"아빠랑 둘이여?"
"응. 시윤이랑 엄마는 집에 있고"
"무슨 영화여?"
"음. 아빠도 잘 모르는데 예고편 한 번 볼까?"
"예고편이 뭐에여?"
"음. 어떤 영화인지 조금 보여주는 거"
소윤이랑 같이 예고편을 봤다. 조금만 무서운 장면이나 느낌이 나와도 무섭다고 할 게 뻔한 소윤이에게 적당해 보였다. 애들 울리려고 작정하고 만들지만 않았으면 무당벌레나 개미가 무서워 봐야 얼마나 무섭겠나.
"어때? 아빠랑 둘이 갈까? 팝콘도 먹고"
"팝콘이 뭐에여?"
"소윤이 한 번도 안 먹어 봤나?과자 같은 건데 엄청 맛있어"
"그래여. 가자여"
낌새를 감지한 시윤이가 들썩거리며 얘기했다.
"아꺼. 아꺼(나도 혹은 내꺼)"
"아. 시윤이는 엄마랑 집에 있고 누나랑 아빠만 갔다 올 거야"
"아꺼어어어. 아꺼어어어"
시윤아. 내년쯤이면 너도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 넌 일단 30분이상 앉아 있기가 힘드니까.
거의 영화시간 딱 맞춰서 도착했다. 급히 티켓을 뽑고, 팝콘을 샀다. 중간에 나오면 안되니까 화장실도 들르고. 7관 J열 10, 11. 소윤이와 나의 자리였다. 7관의 문을 여는 순간, 이미 시작된 광고가 쿵쾅거리고 있었다.
"아빠아아아. 무서워어어어어"
"소윤아. 무서워? 괜찮아. 아빠랑 같이 있잖아. 그리고 저건 그냥 광고야 광고"
"그래도오오오오. 무서워어어어어어. 안 들어갈래에에에에에"
"소윤아. 괜찮다니까. 저건 금방 끝나"
"으아아아아아아아"
농구장의 악몽이 떠올라서 다급하게 소윤이를 설득하고 있었다. 출입구에서 그러고 있었는데, 누군가 지나가다가 팝콘을 들고 있는 내 왼팔을 툭 쳤다. 덕분에 팝콘의 일부가 흩뿌려졌다. 순간 짜증이 나서 어둠 속에서 상대방을 노려봤다. 어떤 아저씨였는데 약간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저씨는 급했는지 갈 길을 갔다. 늦었지만 그 아저씨에게 사과를 전한다. 죄송합니다. 그 때 제가 약간 정상이 아니었어요.
"소윤아. 일단 들어가 보자. 아빠랑 같이 있으니까"
"으아아아아아아"
마침 광고가 끝나고 조용해졌다.
"거 봐. 금방 끝난다니까. 자, 이거 팝콘 하나 또 먹어 봐"
팝콘의 달달함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건지, 일단 자리에 앉는데는 성공했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베이비시트(?)를 챙겨오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소윤아. 앉아"
"아빠. 의자가 자꾸 올라와여"
"아. 앉혀줄게"
아직 소윤이의 몸무게가 조금 부족한지 어른들처럼 90도가 아니라 한 75도 정도로 다리가 들렸다.
"소윤아. 안 불편해?"
"괜찮아여"
"아빠 무릎에 앉을래?"
"아니여. 괜찮아여"
대사가 없는 (만화)영화였다. 소윤이한테는 크게 상관 없을 거 같았다. 나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건 확실히 작정하고 유아들 보라고 만든 영화라서 중간에 좀 졸았다. 소윤이도 엄청 몰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40분쯤 지나니까 산만해졌다.
"하아빠하. 허언제헤 끄흩나하혀?"
"어. 조금 더 있어야 돼"
"하아빠하. 빠할리히 나하가하고호 시히퍼허혀"
"그래. 그래도 우리 끝까지 다 보자"
팝콘이 없었더라면 아마 진작에 나왔을지도 모른다. 큰 사이즈의 팝콘을 사서 들어갔는데, 소윤이랑 나랑 다 먹었다.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소윤이가 절반은 먹었다. 백해무익 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음식을 딸에게 퍼주고 있는 게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아빠와의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1시간 30분을 무사히 있었다.
"소윤아. 영화 재밌었어?"
"네"
"재미 없으면 없다고 해도 되는데"
"그냥 그랬어여"
"그래? 영화관 또 오고 싶어?"
"네. 팝콘 사서 또 보고 싶어여"
"그래도 아빠는 소윤이랑 데이트하니까 엄청 행복한데?"
"아빠. 나도여"
"진짜야?"
"그럼여. 아빠랑 둘이 팝콘도 먹고, 영화도 보고 그래서 좋아여"
"다음에도 아빠랑 둘이만 영화관 오고 싶어?"
"네. 다음에도 아빠랑 데이트 하자여"
"그래. 다음에는 소윤이가 조금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찾아볼게"
엘리베이터로 가는데 각종 액세서리를 파는 가판대가 있었다.
"소윤아. 이리와 봐"
"왜여?"
"아빠가 머리핀 사줄까?"
"왜여?"
"그냥 예쁘니까. 소윤이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골라 봐"
가격을 물었는데 제일 싼 게 4,000원이었다. 4,000원 보다 비싼 것들은 왠지 돈이 좀 아까운 느낌이었다. 다행히(?) 소윤이는 4,000원짜리 핫핑크 꽃모양 머리핀을 골랐다. 그냥 고르지 않고, 자기 머리에 한 번 해본 다음, 거울까지 보고 결정했다.
"아빠. 예쁘져?"
"어. 예쁘다"
"그럼 이걸로 할게여"
주차장에 가서 차에 올라탔다.
"아빠. 우리 이제 어디 가여?"
"이제 집에 가야지"
"아빠랑 좀 더 놀고 싶은데"
"그럼 밥을 밖에서 먹을까?"
"밥도 밖에서 먹고 우리 마트 같은데 갈까여?"
"마트? 마트가서 뭐하게?"
"그냥. 뭐 필요한 것도 사고 그러는거져"
"그럴까?"
같은 건물 지하에 홈플러스가 있었다.
"소윤아. 여기 홈플러스가 있네. 다시 내리자"
소윤이랑 홈플러스에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소윤이는 뭘 사달라고 강력하게 떼를 쓴 기억이 별로 없다.(더 강력하게 제재해서 그런 건가) 오늘도 마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는데, 장난감 코너에서도 소윤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 이거 재밌겠져? 나중에 우리 집에 있는 거 다 없어지면 그때 사주세여"
"그래. 알았어"
"아빠. 이거 엄청 신기하져? 나중에 우리 집에 있는 거 다 없어지면 그때 사주세여"
"그래. 알았어"
"아빠. 이거 사면 안 돼여?"
"어. 그건 지금 필요 없는 거야"
"알았어여"
소윤이를 졸졸 쫓아다니기만 했지만 전혀 힘들지 않고 재밌었다. 빨리 가자고 채근할 일도 없고, 이 쪽으로 오라고 부를 일도 없고, 조르는 걸 안 된다고 막을 일도 없고. 꽤 한참 거닐었다. 이것저것 시식도 하면서.
"소윤아. 아빠가 초코송이 사 줄까?"
"왜여?"
"음. 소윤이가 조르지도 않고, 너무 기특해서?"
"좋아여"
치료해야 할 충치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초코송이 따위를 먼저 권하는 아빠가 된 것 같아 한심스러웠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자식 키우는 아빠는 다 알 거고, 딸 키우는 아빠는 더 잘 알겠지.
그 옆 푸드코트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난 별로 생각이 없어서 뭘 먹여야 고민하는데 마침 주먹밥 파는데가 있었다. 멸치견과류 주먹밥을 하나 시켰다. 크기가 꽤 커서 나도 조금 먹긴 했는데, 소윤이가 워낙 잘 먹었다. 팝콘을 하도 먹어서 별로 안 먹을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밥 먹은 뒤에는 초코송이도 먹었다.
"소윤아. 아빠는 소윤이랑 데이트 하니까 진짜 좋다"
"아빠. 나도 아빠랑 데이트 하니까 너무 좋아여"
"그래? 다행이네"
"아빠 회사도 안 가고 아침부터 아빠랑 있으니까 엄청 재밌다여"
진짜 마음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자주 얘기했다. 얼마 전 들은 부모교육에서 그러라고 했다. 소윤이의 말에서도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이때만큼은 애틋하기 짝이 없는 부녀지간이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밖에 있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와 시윤이는 막 잠에서 깬 상태였다.
"소윤아. 아빠랑 재밌었어? 영화는 어땠어?"
"어. 영화는 그냥 그랬는데, 나중에 또 영화관 가서 팝콘 먹고 싶어여"
역시. 소윤이답다. 먹는 게 인생 최고의 낙인가 보다. 누구 딸 아니랄까 봐.
"엄마. 호떡은 언제 만들어여?"
"어. 조금만 이따가"
소윤이한테 '나중에 000 하자'라고 말하는 순간, 질문 폭격기가 된다.
"엄마. 그거 언제 할 거에여?"
"엄마. 이제 몇 분 남았어여?"
"엄마. 빨리 하고 싶은데. 왜 안 해여?"
기다림과 인내를 좀 가르쳐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방법을 잘 모르겠다. 호떡도 며칠 전에 아내가 약조한 내용이었다. 아침부터 호떡 타령을 어찌나 하던지. 먹는 것도 먹는 거지만 자기가 반죽하고 속 넣고 이게 재밌으니까, 아주 안달이 났나 보다.
오늘은 호떡 만들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내가 없을 때도 하던 거니까, 유사시에 거들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 과정마다 "엄마. 내가 할게여. 내가"를 외치는 소윤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런 소윤이를 사랑으로 받아주려고 노력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도 못하면서 고집만 부리는 시윤이 목소리도 들리고. 난 소파에 앉아 기타치며 찬양을 불렀다. 그대들(가영, 소윤, 시윤)에게 은혜와 평화가 함께하길.
나의 찬양 덕분이었을까. 큰 탈 없이 호떡 만들기가 마무리 됐다. 만든 호떡을 하나씩 먹고 나서 다시 외출준비를 했다. 저녁에는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만나 밥을 먹기로 했다. 저번에 포장해서 먹은 쭈꾸미 집에 가기로 했다. 물회와 쭈꾸미가 주된 메뉴라 애들 밥과 반찬은 아내가 따로 싸서 갔다.
신발 벗고 앉는 자리에서 먹었다. 두 녀석은 뭐 그럭저럭이었다. 다른 손님들이 좀 많았다면 굉장히 피곤했겠지만, 그게 아니라서 어느 정도는 돌아다니게 둘 수 있었다. 장모님이랑 장인어른이 밥 먹는 건 전담해 주시기도 했고.
시윤이는 장인어른을 보자마자 "하버. 하버"하며 안기더니 자리도 할아버지 옆에 앉고, 밥 먹는 것, 물 마시는 것 등 일체의 행위도 다 할아버지한테만 도움을 받았다.
밥 먹고 카페는 주교동에 있는 [큐커피]로 갔다. 주 건물이 있고, 바로 옆에 창고처럼 따로 떨어진 공간도 있는데 거기가 애들이랑 앉아 있기 아주 좋다. 다른 손님들이 별로 없다. 대부분 주 건물에 앉기 때문에.
카페에서도 계속 먹었다. 스콘, 호떡, 과자 등등등. 요즘은 시윤이도 누나랑 똑 닮은 식탐을 가졌다는 게 느껴진다. 절대 안 진다. 누나가 먹으면 자기도 꼭 먹어야 하고, 누나가 안 먹어도 자기는 꼭 먹어야 하고. 우리 음식이 아니어도(생판 남이 먹고 있는 것이라도) 꼭 가서 얻어 먹어야 하고. 아무래도 이미 나의 유전자가 너무 강력히 박혔나 보다. 미안하다, 얘들아. 그게 다 너희 탓만은 아닌 거 같아.
시윤이는 낮잠을 꽤 오래, 늦게 자서 잠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잠들었다. 오히려 소윤이가 잠들지 않았고. 시윤이를 방에 눕혀 놓고 나왔다. 아내는 소윤이를 씻기려고 화장실 앞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덜커덕 하더니 안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한 손으로 급히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동시에 나를 쳐다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여보. 어떻게 해"
매우 당황함을 표현하는 얼굴 움직임이었다. 일단 쌌는데 휴지가 없을 때처럼.
뭘 어떻게 해. 이미 깨서 나오려고 하는데. 망한 거지.
터덜터덜 시윤이가 걸어 나왔다. 아내와 나는 불길한 예감을 공유했다. 소윤이의 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시윤이도 나온 김에 옷도 갈아 입히고. 아내가 데리고 들어갔다. 30-40여분 후 아내가 나왔다. 시윤이도 따라 나왔다.
"여보. 얘 어떻게 해"
"어쩔 수 없지 뭐. 데리고 놀아야지"
시윤이는 또 다시 수면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와 자유를 쟁취했다. 자꾸 이러면 습관될까 봐 두렵긴 한데, 지가 안 자고 나오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내와 나는 체념하고 놀게 놔뒀다. 왜 이 시간에 나와서 놀면 짜증도 하나도 안 내고, 생글생글 웃기도 잘 웃고, 유독 애교를 많이 부리는 걸까. 얄미워서 꿀밤 한 대 쥐어박아도 모자랄 판에 야밤에 설치는 아들을 바라보며 헤벌쭉 하고 있다. 아내도 나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다시 아내가 시윤이랑 들어갔다. 30분 후에 카톡이 왔다.
[안 잔다]
[아직도 안 자? 대박이다]
[나만 잠들 듯]
[여보도 그냥 포기하고 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래도 내일 새러데이야. 힘내]
결국 그렇게 끝났다. 우리의 삼일절. 강시윤아, 이러지 마라 자꾸. 엄마, 아빠는 겁이 난다. 엄마, 아빠가 유일하게 붙잡고 있는 한가닥 희망이 너희의 빠른 취침인데, 자꾸 그걸 붕괴시키려고 하면 엄마, 아빠는 매우 불안해.
아들아, 부탁할 게. 그것만은 지켜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