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02(토)
그래도 꽤 늦게까지 이불에서 버텼다. 보통의 주말보다는 조금 늦게 하루가 시작됐다. 아내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애들이랑 놀았다.
일어나자마자 몸으로 놀아달라고 하는 소윤이에게 기쁘게 반응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 몸 하나 세워놓을 힘도 마땅치 않은데. 그래도 아빠랑 실컷 놀 거라며 아빠의 쉬는 날은 언제인지 목 빠져라 기다린 소윤이를 위해, 난 기꺼이 사족보행 짐승이 되었다.
“얘들아. 아침 다 됐다. 와서 앉아"
할렐루야. 얼른 가서 밥 먹어라. 아빠는 좀 쉴게. 아내는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렇지만 기분이 안 좋을 일도 이유도 없었다.
“여보. 기분 안 좋아?”
“나? 아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신나지 않을 뿐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는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뭔가를 했다. 설거지, 빨래, 빨래 개기, 또 설거지. 아내가 (평일에 비해) 애들한테 신경을 안 쓰는 대신 집안일은 다 아내가 했다. 애들을 본다는 이유로(때로는 핑계로) 난 열외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집안일을 마주할 때의 무기력함인가 싶기도 했다.
일단 집이 너무 더러웠다. 눈에 보이는 혼잡스러움은 물론이고, 집 전체의 쾌적함 수치가 낮은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랬는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면 아내는 더 심하겠지.
“소윤아. 시윤아. 정리 좀 하고 놀자”
소윤이, 시윤이(시윤이는 아무 도움이 안 되지만)와 함께 정리를 시작했다. 애들한테 장난감 정리를 시캬 놓고, 난 안방의 이불을 화장실에 가지고 가서 털기 시작했다.
내가 스스로, 아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불을 털다니. 아내 입장에서는 오늘 해가 동쪽에서 뜨다 말았나 확인해야 할 일이었다. 이불을 터는 김에 안방을 청소기로 한번 훑을 생각이었는데, 이미 아내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청소기를 잡고 집안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었다. 미세먼지 수치가 최악이었지만 잠깐 환기도 시켰다.
“여보. 이불 털었더니 너무 개운하다”
역시. 아내는 중청소(대청소는 아니고)를 마치고 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 보였다. 다음부터는 아내한테 서프라이즈로 꽃을 사줄게 아니라 대신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를 불러볼까 싶다.
“여보.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 아주머니 들어오세요”
아내의 만족도가 엄청 높을 것 같은데?
소윤이랑 시윤이는 제법 죽이 잘 맞았다. 꽤 오랫동안 둘이 역할극을 하며 놀았다. 얼마나 잘 놀았냐면, 시윤이를 재워야 한다고 했더니 소윤이가 싫다며 방방 뛰었다. 평소에는 얼른 시윤이 재웠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오늘은 시윤이가 소윤이의 디렉팅에 순종적으로 따라주니 소윤이도 재밌었나 보다. 덕분에 난 편했다. 입과 눈만 바쁘고 몸은 게으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랑 나랑 화장실을 참 자주 들락거렸다. 물론 난 전혀 느낌이 없는데 들어가는 파렴치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상황이 종료되었거나 진척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라도 조금, 때로는 한참 더 앉아 있다가 나왔다.
‘똥 또 안 마렵나’
바라기도 했다. 아내도 그랬겠지.
시윤이 낮잠을 재우러 들어간 아내가 나오지 않길래 카톡을 보냈다.
[여보 잠듦?]
곧바로 아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깜빡 잠들었어. 진동 소리에 깼네”
어느덧 점심시간. 간단히 토스트로 해결하기로 했다. 소윤이의 즐거움을 위해 아내가 맛있다며 극찬한 무슨 버터랑 딸기쨈, 카야쨈을 함께 대령했다. 시윤이는 아내와 소윤이가 식사를 마치고 나서 한참 뒤에 깼다.
거실에 앉아 있는데 아내가 갑자기 얘기했다.
"오늘 갑자기 신림동 갈까?"
"오늘? 왜?"
"그냥"
"부모교육 끝나고?"
"그래야지"
"그럼 여보가 엄마한테 전화해 봐"
"여보가 물어봐"
소윤이를 불렀다.
"소윤아. 신림동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오늘 가도 되냐고 물어봐"
"할머니"
"어. 소윤아"
"할머니. 오늘 우리 부모교육 끝나고 할머니 집에 가도 돼여?"
"오늘? 그래. 와"
"가서 자고 와도 돼여?"
"그럼. 자고 가면 좋지"
"알겠어여. 부모교육 끝나고 갈게여"
예정에 없었던 1박용 짐을 챙기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부지런을 떤다고 떨었는데 10분 정도 늦게 부모교육 장소에 도착했다. 애들 데리고 다니면서 시간 지키려면 30분은 먼저 움직여야 하나 보다.
부모교육을 마치고 바로 신림동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의 단골집이자 나의 단골집이었던, 돼지고기라면 조리법을 불문하고 별로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아내도 홀딱 반한 갈빗집으로 갔다. 엄마랑 아빠가 미리 가서 주문도 해 놓고 고기도 다 구워져 있었다. 우리는 앉자마자 먹을 수 있었다.
애들이랑 가기에 굉장히 협소하고 복잡한 곳이다. 특히 요즘의 시윤이라면 더더욱 부담이 느껴지는. 어쩌다 보니 시윤이는 오늘 점심 한 끼를 굶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허겁지겁 고기와 밥을 먹었다. 덕분에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소윤이는 할머니를 만나자 유독 제멋대로였다. 요즘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 존댓말 쓰기, 짜증 안내기 등을 하나도 안 지켰다. 집에 있을 때는 칭찬과 웃음이 절로 나오도록 잘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 만났다고 아주 기세 등등이었다. 한 번씩 소윤이한테 지적을 했더니, (내) 아빠가 나를 지적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왔을 때라도 자유롭게 좀 놔두라고.
그래서일까. 시윤이는 오늘도 할아버지 껌딱지였다. 밥 먹는 것도 하버하버. 신발 시는 것도 하버하버. 안는 것도 하버하버. 할아버지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시윤이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다시 한번 묘사하고, 얼굴에는 웃음이 한가득이다.
집에 가서도 소윤이의 버릇없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심해지면 심해졌지. 선을 넘는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불러서 주의를 줬다. 방에서 할머니랑 복작거리던 소윤이가 거실에 나와, 소파에 앉아 있던 아내와 나에게 얘기했다.
"엄마, 아빠. 얼른 영화라도 보고 와여"
"왜?"
"엄마, 아빠 나가면 나 늦게 자게여"
그때가 이미 11시였다.
"소윤아. 저기 긴 바늘이 6에 가면 씻고 자자"
"아. 싫어여"
"싫긴 뭘 싫어. 오늘 엄청 늦게까지 논 거야"
자러 들어갈 때도 소윤이는 나를 배척하고 싶어 했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엄마는 엄마니까 늘 곁에 두지만, 아빠는 좀 다른가 보다. 할머니, 엄마와 함께 방에 들어갔는데 나도 따라 들어가니까 소윤이가 낮게 읊조렸다.
"아빠도 들어왔네"
자기가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소윤이는 거의 눕자마자 갑자기 잠들었다. 시윤이도 빠르게 잠들었고. 하긴, 시간이 그럴 시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다시 거실로 탈출했다. 어디 나가기에는 너무 늦어서 오늘은 그냥 집에 있기로 했다. 소파에 앉아서 TV도 보고, 수다도 떨고 그랬다. 그것도 나름 재밌었다.
아침에는 depressed의 실체인 듯 보인 아내가 자려고 누웠을 때는 오히려 생기가 가득했다. 역시 해결책은 탈육아였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