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적, 미세먼지

19.03.06(수)

by 어깨아빠

아무도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방을 나왔다. 해가 길어져서 밖이 환하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먼지가 잔뜩이었다. 뿌옜다. 마스크를 하나 챙겨서 나갔다. 밖에서 볼 때도 뿌옜지만 나와서 보니 더 흐릿흐릿했다. 꼭 안개 같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안개도 많았다고 한다)


사무실에 도착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전화가 왔다.


"여보. 잘 갔어?"

"응. 잘 갔지? 지금 일어났어?"

"아니. 지금은 아니고, 한 8시쯤?"

"애들은 다 괜찮아?"

"어. 괜찮아"

"여보도? 푹 잤어?"

"응. 나도 잘 잤어"


아침 먹을 때는 영상통화도 했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무척 맛있게 잘 먹었다며, 경쟁하듯 자랑을 했다. 빈 밥그릇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홈스쿨 시작 시간인 10시 30분쯤 전화가 왔는데, 아주 짧게(한 1초 정도) 소윤이 목소리가 들리고 끊어졌다. 다시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보통 수요일에는 준비해서 나가느라 정신없기 때문에, 나한테 전화를 잘 안 하는데 했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하고.(원래 걱정은 꽂히면 배가 배가 배가 된다)


[여보. 잘 갔어?]

[응. 잘 왔어. 쉬는 시간에 연락할게용]


나에게는 비보, 아내에게는 낭보를 전했다.


[오키. 난 축구 취소됨]


그랬다. 미세 먼지 수치가 너무 높아서 오늘 하루는 쉬겠다고 공지가 올라왔다. 슬펐다. 물론 아침에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뿌연 풍경에 '이런 환경에서 축구를 해도 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 나갈 건 아니었다. 지난 주일날, 좀 격하게 뛰어서 오히려 오늘이 유독 기다려졌는데. 매우 실망했다.


홈스쿨을 마친 아내와 통화를 했다.


"여보. 어디라도 나갔다 와요"

"나가긴 어딜"


아내가 그렇게 얘기 안 했어도 나가려고 마음먹고 있긴 했다. 총 맞은 것처럼 뻥 뚫린 축구의 빈자리는 어딜 가도,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겠지만.


아내는 홈스쿨을 마치고 [큐커피]에 갔다. 시윤이가 잠들긴 했는데 유모차를 안 가지고 와서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문 바로 앞에 차를 세우고 카시트에 그대로 앉혀 놨다고 한다. 아내랑 소윤이는 카페로 들어가고, 아내는 5분에 한 번씩 시윤이 깼는지 확인하러 나오고. 애 둘과 함께 카페를 즐기는(이걸 즐긴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시윤이가 깨고 나서는 집에서 싸 가지고 간 밥도 먹였다. 소윤이, 시윤이 둘 다. 아내는 하나로 마트에 들러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저번처럼 사무실로 온다는 말은 없었다. 축구도 못하는데 1시간 30분씩 버스와 지하철 타고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참담했다.


집에 가고 있는데 아내에게 또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지금 버스야. 조금 전에 탔어"

"우리도 방금 막 도착했어"

"늦게 갔네?"

"어. 하나로 마트 들렀다가 한살림 들렀다가"

"애들은 괜찮아?"

"응. 괜찮아. 여보. 하나로 마트에서 고기 조금 샀는데 여보도 먹을래여?"

"그래"

"그래도 제주산 흑돼지래요. 한 400g 샀는데 너무 적으려나?"

"어. 뭐. 그냥 먹으면 되지 뭐"


이런 건 타고날뿐더러 학습이 안 되나 보다. 내가 아무리 수학을 잘하려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처럼. 400g이면 정말 허기질 때는 게 눈 감추는 것보다 5분 정도 빠르게도 먹을 수 있는 양인데.


소윤이랑 시윤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아내도 그렇고. 아, 시윤이는 요즘 잘 안 그러더니 손가락을 빼라고 해도 안 빼고 주야장천 빨고 있었다. 억지로 뺐더니 저녁 준비하고 있는 아내에게 가서 서럽게 울었다. 어차피 고기도 구워야 해서 아내가 주방에서 빠지고, 내가 투입됐다. 고기는 딱 한 팩, 프라이팬 한 판 정도의 양이었다. 구우면서 맛을 봤는데, 헐 대박. 제주산 흑돼지는 서울에서 먹어도 맛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고기를 구우며 아내에게 실토를 했다. 400g 샀으면서 고기 파티라도 할 것처럼 얘기한 게 너무 웃겼다고.


소윤이한테 40%, 시윤이한테 30%, 아내와 내 몫으로 30% 정도로 분배했다. 시윤이는 허겁지겁 고기부터 먹어 치웠고, 소윤이는 영 지지부진했다. 하루 종일 밥 잘 먹었다던데 왜 저녁에는 꼭 이럴까. 졸리고 피곤한 게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아내가 소윤이 고기를 시윤이에게 좀 덜어주면 어떠냐고 물었지만 안 된다고 했다. 다른 이유보다 소윤이에게 고기를 더 많이 먹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시윤이는 먹을 만큼 먹었다. 나중에라도 시윤이(혹은 미래의 또 다른 형제 혹은 자매)가 모르게(언젠가 이 일기를 읽게 되면 차별받았다고 호소하겠지만) 소윤이 몫은 꼭 따로, 더 챙겨주게 될 것 같다. 어떤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 그냥 첫째를 향한 아빠의 마음이랄까.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아내가 내게 와서 속삭였다.


"여보. 소윤이 못 먹을 것 같아. 시윤이 나눠 주면 안 될까"

"그래. 그럼"


사실 나도 내심 걱정이었다. 내일 소윤이 생일인데, 오늘 저녁밥 못 먹어서 내일 점심까지 간식을 못 먹는 사태가 발발할까 봐. 생일날 즐겁고 또 즐거워도 모자랄 판에.


소윤이에게 다가가서 얘기했다.


"소윤아. 너무 많아?"

"네"

"그럼 시윤이 조금 줄까?"

"네"


시윤이 나눠 주면서 나도 좀 먹었다. 덕분에 소윤이의 저녁 식사는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 사실 정해진 30분을 조금 넘었지만 모르는 척 눈 감았다. 소윤이의 행복한 내일(생일)을 위해.


소윤이는 축구가 취소되었다는 걸 아는 애처럼(소윤이한테는 축구가 취소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축구하러 가지 말라고 매달렸다. 소윤이가 이렇게 불쌍하게 애원하면 정말 혹하기도 한다. 물론 오늘도 혹 했을 뿐, 넘어가지는 않았다.


현관 앞까지 맨발로 나와 애틋함을 표현하는 소윤이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고 스타필드로 갔다. 소소한 소윤이 선물을 사러 갔다. 진짜(?) 선물은 아내랑 상의 후에 결정하겠지만, 생일 아침에 눈을 뜬 소윤이에게 뭔가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었다. 계획은 이랬다. 초콜렛, 과자, 사탕 등의 군것질 거리와 함께 작은 꽃 한 송이를 사서 거실에 놓고 싶었다. 그럼 아침에 일어난 소윤이가 보고 깜짝 놀라며 기뻐하고. (이 시나리오의 최대 변수는 시윤이가 먼저 선물을 발견하고 파헤치는 것)


착각했다. 플라워 카페가 있는 곳은 롯데몰이었다. 스타필드에도 꽃집이 있기는 했지만 너무 비쌌다. 한송이에 15,000원이 넘었다. 꽃값 2,000원 + 포장 및 장식 값 3,000원 + 낭만 값 10,000이 아닐까. '낭만'이라는 단어 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소윤이를 위해 쓰기에는 조금 아까웠다. 초콜렛만 하나 사서 동네로 돌아왔다. 동네 꽃집도 문을 닫은 뒤라 꽃은 사지 못했다. 너무 아쉬웠다. 꽃이 주인공이었는데. 내 구상에서는.


초콜렛, 고래밥, 추파춥스, 한 줌 견과류 등을 사서 작은 종이가방에 담았다. 소소한 투자로 최고의 행복감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먹는 게 최고다. 적어도 소윤이한테는. 분명히 한 번에 많이 먹으려 할 테고, 옆에서 시윤이는 자기도 달라고 할 테고. 후폭풍은 다 아내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꽃을 못 산 게 두고두고 아쉽다. 우리 소윤이도 엄마 닮아서 꽃 좋아하는데.


그나저나 아내는 소윤이도 생각보다 늦게 잠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윤이는 한참 동안 잠들지 않아서 열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결국 다시 거실로 나왔다는 것까지만 전해 들었다. 그 뒤로는 답장이 없었다. 다시 재우러 들어갔다가 같이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걱정이 됐다. 미역국도 끓이고 이것저것 반찬도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잠들면 내일 아침에 준비가 될까 싶었다.


카페에서 일기 좀 쓰다가 집으로 복귀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나. 지금 지하야"

"하하하. 어이가 없다"

"왜? 지금 깬 거야?"

"어"


아내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열도 안 받고 웃음만 나온다고 했다.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는데 생일상 준비는커녕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집도 치워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고, 미역국도 끓여야 하고. 아내는 바스라진 영혼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역국은 내가 끓였다. 그 사이 아내는 혼란스러웠던 집을 아주 깔끔하게 치웠다.


소윤아. 아빠가 미역국 맛있게 끓였어.


아직 너무 먼 얘기지만 너에게 사주는 꽃값을 아까워하지 않는 남자, 널 위해 미역국을 끓여주는 남자, 엘지트윈스를 응원하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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