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생일

19.03.07(목)

by 어깨아빠

소윤이가 자고 있는 내 위를 온몸으로 스윽 덮고 슬며시 뽀뽀를 하며 얘기했다.


"아빠. 나가자여"


이럴 때마다 딸을 한 명이라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드린다. 시윤이는 조금 더 커 봐야 알겠지만, 벌써부터 예상이 된다. 아직 발길질까지는 아니어도, 과격하다. 소윤이가 스윽 내 위를 덮는다면, 시윤이는 퍽 떨어지며 덮친다.


"소윤아. 소윤아"

"왜여?"

"생일 축하해"


이런 것도 아내한테 배웠다.(혹은 닮았다) 아내는 연애할 때 법정생일유효기간(?)인 자정부터 자정까지, 수시로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곤 했다. 떨어져 있을 때는 전화해서, 같이 있을 때는 뜬금없이.


소윤이는 아기의자에 놓인 의문의 쇼핑백을 눈치 채지 못했다. 시윤이랑 아내도 깨서 거실에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내가 먼저 귀띔을 했다.


"소윤아. 저거 뭐지?"

"뭐여?"

"저거. 의자 위에 있는 거"

"으잉? 내 생일선물?"

"소윤아. 시윤이 있으니까 안 보이는데서 몰래 봐. 안 그러면 시윤이가 또 자기도 달라고 난리일 거야"


소윤이는 작은 방에 들어가 문까지 닫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5년의 생을 사는 동안 선물 받고 펄쩍펄쩍 뛸 듯이 기뻐한 적이 거의 없는 것처럼, 오늘도 그랬다. 좋아하긴 했지만 얼핏 보면 '안 좋은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평정심 속에 기쁨을 표현했다.


생일이라 유독 그런 건지 그냥 오늘따라 그런 건지, 출근 몇 시에 하는 거냐고 묻더니 출근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자기도 안 된다는 걸 아니까 목소리에 힘은 없었다.


사무실에서 아내와 영상통화를 했다. 애들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소윤아. 미역국 어때? 아빠가 끓인 거야"

"아빠. 맛있어여"

"진짜야?"

"네에. 지인짜 맛있어여"


나머지 반찬은 어묵볶음(소윤이 요청), 시금치, 계란말이었다. 생일상 치고는 너무 남루한 듯해도 나름 소윤이의 의사를 많이 반영한 상이었다. 소윤이, 시윤이 둘 다 맛있게 먹었다.


낮에는 장모님이 오신다고 했다. 며칠 동안 집에만 갇혀 있기도 했고, 오늘은 미세먼지 수치가 조금 낮아진다고 하니(그래봐야 '나쁨') 스타필드로라도 외출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내 생각에 소윤이의 만족도만을 따진다면(생활습관 개선, 훈육 등을 제외하고) 할머니들이 최고였다. 말하는 건 다 들어주고, 하지 말라는 말은 없는. 그야말로 존재가 선물인 분들이니까.(엄마, 아빠는 다 좋은데 잔소리가 너무 많다고 느끼지 않을까)


퇴근해서 스타필드로 갔다. 역시나 소윤이는 딱 봐도 무척 즐거워 보였다. 날 보자마자 안아달라고 들썩 거린 시윤이부터 안아줬다. (소윤이는 카트에 앉아 할머니랑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아 주는데 팔이 너무 아파서 목마를 제안 했다.


"시윤아. 아빠가 목마 태워줄까?"

"응?"

"목마. 목마 몰라?"

"응?"


일단 태웠다. 엄청 좋아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전에 태웠을 때는 한 손으로 허리춤을 받쳐야 했는데, 이제 두 다리만 잡고 있어도 안정감이 있었다. 이만큼 컸다는 걸 또 실감했다. 시윤이는 깔깔거리면서 목마를 즐겼다. 그걸 본 소윤이가 자기도 태워 달라고 성화였다. 마침 시윤이가 내려가겠다고 하길래, 시윤이를 내려놓고 소윤이를 안아서 올리는데. 헉. 이건 차원이 다른 무게다. 목마를 태우려면 소윤이의 가랑이가 내 머리 위까지 올라가도록 번쩍 들었다가 목 위로 내려 앉혀야 하는데, 이게 보통 근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같은 무게라도 헬스장에서 바벨을 드는 것과, 사람을 드는 건 확연한 차이가 난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몇 개월만 지나면 이 동작(?) 이 힘든 건 둘째 치고,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스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진심으로)


여느 때(장모님을 만나 마트류의 장소에 왔을 때)처럼 아내의 손에는 먹거리와 식재료가 한가득이었다. 물론 계산은 아내의 친정엄마께서. 오늘의 주인공은 소윤이 인데, 소고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양갈비는 왜 있으며, 와인은 왜 있는지. 딸의 생일을 핑계로 사욕을 채운 게 분명했다.(물론 양갈비는 나를 위해 아내가 골랐겠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애들을 씻기고 난 저녁 준비를 했다. 밥을 안쳐 불을 올리고, 새우와 소고기, 양갈비를 구웠다. 소윤이 생일 기념 저녁인 만큼 식탁이 아닌 상을 펴고 앉았다. (구조상 식탁은 둘러앉는 게 불가능한 반면, 상은 둘러앉는 게 가능해서 뭔가 더 생일스러운 분위기 연출이 가능하다 는 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진심을 가득 담은 나의 축복기도가 무색하도록, 소윤이의 저녁 식사 태도는 영 꽝이었다. 생각해 보라. 아니, 찰진 밥과 살치살, 양갈비, 새우, 시금치, 어묵볶음, 미역국이 놓인 저녁상을 받는 5살이 우리나라에 도대체 몇이나 있겠냐는 말이다. 소윤이, 시윤이가 식사 시간에 감사할 줄 모르고 아까운 줄 모르는 건 정말 용납할 수가 없다. 시윤이는 상에서 먹은 덕분에(아기의자에 결박되지 않은 덕분에) 지멋대로 움직이고, 난리도 아니었다.


"여보. 이제 애들 당분간 고기 주지 말자. 매일 고기가 올라오니까 감사한 줄 모르는 것 같아. 장모님한테도 당분간 고기는 사주지 말라고 해. 엄마한테도"

"알았어요"


뿌리 깊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집안이지만, 아이들의 바른 식습관 태도를 함양하기 위해 사찰음식을 배워야 하나 싶었다. 며칠 동안 풀만 씹어봐야 정신을 차릴라나.


그나마 오늘은 소윤이 생일이라는 걸 머리로 끊임없이 되뇌며, 사자후를 자제했다. 보릿고개 얘기하고 꿀꿀이죽 얘기하는 게 너무 꼰대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애들 키우면서 참 많은 걸 배운다. "야. 아빠는 어렸을 때 소고기는 먹어 본 적도 없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도로 삼켰다.


나만 배부르게 먹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조각케이크에 초를 꽂아 소윤이 생일 축하 의식을 행했다.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소윤이 옆에 앉은 시윤이가 초를 불어서 2개를 먼저 꺼버렸다. 소윤이가 남은 3개의 불을 껐다. 그러고 나서는 초코케이크 흡입.


'밥을 그렇게 먹어봐라 좀'


생일을 맞아 특별히 밤 산책을 나갔다. 날이 풀렸다고 생각해서 애들 옷을 얇게 입혀 나갔는데 생각보다 공기가 찼다. 아내가 다시 집에 들어가 두꺼운 겨울 점퍼를 가지고 나와서 입혔다. 목적이 있어서 나온 건 아니었고, 그냥 밤에 나와서 걷기만 해도 소윤이가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끝없는 의미부여와 함께.


"우와. 소윤아. 가족끼리 나와서 산책하니까 엄청 좋다? 그치?"


소윤이도 좋아했다. 시윤이도 간만에 밖에 나와서 그런지 누나를 따라서 신나게 뛰어다녔다. 아내가 하도 춥다길래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줬다.


"여보는 괜찮아?"

"어. 난 괜찮아"


처음에는 정말 괜찮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춥긴 했다. 아직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꽃집에 들러 아내에게 꽃 한 송이를 사줬다.


"아빠. 왜 엄마한테 꽃을 사 줘여?"

"소윤이 생일에 가장 고생한 사람이 엄마니까"


원래 어제 소윤이 꽃을 사게 되면 아내 것도 사려고 했었다. 결국 누구의 꽃도 못 사고 돌아왔지만. 소윤이는 낮에 장모님이 꽃을 사주셨으니, 아내 것만 샀다. 역시, 같이 가서 샀더니 서프라이즈로 사 줬을 때만큼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 꽃은 언제 받아도 좋다는 아내의 말이 100% 진실은 아닌 것 같다.


좀 춥긴 했지만 나름 즐거웠던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시윤이는 오랜만에 목마를 타 보더니 재미있었는지 또 태워달라고 얘기했다.


"맘마. 맘마"


시윤이를 태워줬더니 그걸 본 소윤이가 자기도 태워달라길래 평등 정책에 입각해 소윤이도 태워줬다. 이러다 진짜 경추가 나가겠구나 싶었다.


"소윤아. 아빠 너무 힘들어. 이제 내리자"


나가기 전에 이미 다 씻고 옷도 갈아입어서 손과 발만 씻고 눕기만 하면 됐다. 아내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씻기 시작했다. 오늘은 애초에 미련을 두지 않고 수면의 세계에 입장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소윤아. 이제 생일 다 지났네. 생일 축하해. 5년 동안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커 줘서 고마워"

"아빠. 조금 아픈 적은 있었잖아여"

"아.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아파. 많이 안 아팠으니까 감사하지"

"아. 그래여?"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커서 목마도 태워주기 힘들 정도로 컸나 싶은데, 그 옆에서 총총거리는 강시윤이 3살이나 되었다는 것에 새삼 더 놀랍다.


소윤아. 생일 선물 뭐 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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