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윤이 마음은 갈대

19.03.08(금)

by 어깨아빠

"아빠. 나 쉬 마려운데, 쉬 하면 아빠가 나와서 닦아주세여?"


세상에 용변 뒤처리 얘기를 이리도 달콤하게 건네다니. 그럴 때마다 좋다고 아빠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난 또 뭐고. (물론 졸려서 맥을 못 출 때는 끈질기게 버티지만)

요즘 잠에서 깬 소윤이의 첫마디는 주로 저거다. 저 얘기를 했을 때 그나마 아빠가 가장 발딱발딱 일어난다고 느꼈나 보다.


소윤이는 요즘 잘 삐진다. 별로 삐질만한 얘기나 일이 아닌데도 아랫입술을 삐죽 내미는 일이 많다. 오늘도 아침에 마스크를 뜯길래 혼낸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말투로 뜯지 말라고 했더니, 입술을 내밀고는 한참을 토라져 있었다. 그럴 때 꼭 들먹이는 핑계가 시윤이한테는 다정하게 대해줬다는 거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괜히 소윤이 눈치 보면서 시윤이한테 수위를 조절하게 된다. 소파에 앉아 5분 정도 안아주고 토닥여주니 다시 멀쩡해지긴 했다.(이유 없는 삐짐이니 풀리는 것도 금방이다)


"아빠. 갈 게. 오늘도 엄마랑 잘 지내"


남은 자(아내)는 남은 자대로 떠나는 이를 아쉬워하고, 떠나는 자는 떠나는 자대로 남을 수 없어서 아쉬워하고. 모두가 아쉬워하는 이 상황이 우리 가정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라는 게 어찌 보면 참 묘하다.


"아침 먹었어?"

"네"

"뭐 먹었어?"

"그냥 미역국에 말아 먹었어여"

"맛있었어?"

"네. 미역국이 너어어무 맛있었어여. 나중에 또 끓여 주세여"


소윤이는 아빠의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법을 확실히 알고 있다. 칭찬은 아빠를 춤추게 한다.


점심 무렵에는 영상통화가 왔다. 시윤이가 없는 걸 보니 재운 모양이었다.


"시윤이는 자?"

"네"

"점심은 먹었어?"

"아니여. 이제 먹어야지여"


"소윤아. 엄마가 시윤이 재우는 동안 소윤이가 어떻게 했는지 말씀드려"


"아빠"

"어"

"엄마가 시윤이 재우러 들어갔을 때 내가 집 다 치웠어여"

"우와. 진짜?"

"그리고 저거 시끄러울까 봐 소리도 다 줄였어여"

"뭐? 오디오?"

"네"

"이야. 대단하다"

"그리고 또 엄마 나올 때 환하면 시윤이 깰 수도 있으니까 불도 껐어여"

"이야. 소윤이 진짜 짱이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소윤이가 엄청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한 거야. 대단하다. 엄마한테 진짜 도움이 많이 됐겠다"


소윤이는 한껏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가 휴대폰으로 집을 보여줬는데 정말 깨끗했다. 아내는 소윤이의 청소 스타일이 꼭 나 같다며, 각종 쇼핑백에 구겨져 담긴 옷과 양말들을 보여줬다. 그래도 그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귀한가. 아빠라는 작자(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책상 좀 치우라는 잔소리를 그렇게 듣고도 손하나 까딱하지 않은 못난 아들이었는데. 아빠에 비하면 백배 천배 낫다. 소윤아.


퇴근할 무렵에 전화를 했을 때 아내가 얘기했다.


"여보. 우리 이제 리스토어(카페)에 갈 거야. 여보도 퇴근해서 거기로 와요"

"그래. 알았어"


아내의 말대로 카페로 바로 갔는데, 없었다. 바쁘게 일 하면서 통화하느라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 어디야?"

"여보는?"

"나. 리스토어"

"아. 벌써 도착했어? 우리는 아직 집이야. 여보 오면 같이 가려고 그랬지. 전화할 줄 알고"

"아. 그럼 내가 집으로 갈까?"

"그래요"


집에 갔더니 아내는 애들 저녁으로 먹일 볶음밥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양쪽 팔로 동시에 안고 오디오에서 나오는 찬양에 맞춰 막 흔들었다. 둘이 깔깔대면서 좋다고 웃길래, 더 격렬하게 흔들었다. 칭찬은 아빠를 춤추게 하고, 웃음은 고통을 잊게 만든다.


소윤이는 나랑 철야예배에 같이 가겠다 했다. 카페에 있다가 소윤이랑 나는 교회에 가고 아내랑 시윤이는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커피를 마시고 소윤이랑 시윤이는 많은 걸 먹었다. 싸 가지고 간 밥도 번갈아가며 한 숟가락씩 먹고, 딸기도 먹고, 양파즙도 먹고. 아내가 가지고 온 폴리백은 요술 가방처럼 무언가가 끊임없이 나왔다.


정신없이 먹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되었다. 소윤이가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그냥 엄마랑 집에 갈까"

"소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아내와 시윤이를 버스 정류장에 내려주러 가는 동안(5분 정도 거리)에도 소윤이는 결정을 못했다.


"소윤아.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지?"

"소윤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오늘은 그냥 엄마랑 갈 게여"

"그래 그럼"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아내와 아이들을 정류장에 내려주고 교회로 출발했다. 예배를 마치고 아내에게 들어보니 짧은 시간이었지만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여정은 매우 즐거웠다고 했다. 자가용(이것도 옛날스러운 표현인가)을 통한 이동이 워낙 일반적이다 보니, 짧은 거리라도 버스를 타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일인가 보다. (쓰다 보니 짧은 거리였기 때문에, 모두에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아무튼 애들은 버스도 즐기고, 내려서도 아내한테 안아 달라고 하지 않고 나란히 손을 잡고 잘 걸어갔단다. 집에 가서도 제법 금방 자고.


소윤이는 집으로 가면서


"엄마. 근데 아빠 혼자 가서 심심하지는 않았을까? 그냥 내가 같이 갈 걸 그랬다"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맞아. 아빠는 내심 너랑 같이 가고 싶었어.


집이 매우 깨끗했다. 아내는 무슨 소리냐며, 보이지 않는 곳의 불청결함을 얘기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완벽히 깔끔했다. (아내 기준에서) 그 정도라도 해내려면 적잖은 결심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내는 거대한 양의 빨래를 널고, 꽤 오랜 시간 빈둥거리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머리를 감았다. 아내가 머리를 말릴 때쯤 소윤이가 깨서 나왔다. 시윤이가 아닌 소윤이가 등장하는 건 매우 오랜만이었다.


아내가 머리를 마저 말리는 동안 소윤이를 마주 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뭐 특별한 대화를 나눈 건 아닌데 그냥 사람다운(?) 대화를 알차게 했다. 막 깨서는 엄마를 찾던 소윤이가 아내가 화장실에서 나왔는데도 내 허벅지 위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서로에게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5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내는 머리를 거의 다 말리고, 아이를 낳고 자신의 사명이 된 얼룩 제거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때 시윤이도 깨서 거실로 나왔다. 어쩌다 보니 1시가 넘은 시간에 온 가족이 거실에.


그래. 언젠가. 너네가 좀 많이 커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그러면, 어디 가까운데라도 놀러 가서 밤새 이야기도 하고, 야식도 같이 먹고. 그러는 게 아빠의 소망이다. 둥지탈출인가 하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정은표 배우님의 가족처럼 대화가 자연스럽고, 도저히 연출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유기농스러운 건강한 가정의 그런 모습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 들어가서 다시 자거라.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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