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09(토)
아침부터 쉴 틈 없는 하루였다. (지났지만) 소윤이 생일을 기념해 양쪽 부모님들과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후에는 부모교육을 받으러 가야 해서, 조금 이른 시간으로 약속을 잡았다. 벌써 다섯 번째라 해가 갈수록 연례행사 같은 느낌이 강해지고 있다. 식당도 그냥 동네 근처로 잡았고, 사진 찍을 때 배경이 되는 가렌드 같은 것도 없었다. (원래 아침에 스타필드에 가서 사 오려고 하다가 말았다) 대신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우와. 소윤이 생일 축하를 몇 번 하는 거야?"
"네 번"
"네 번이나?"
"어 파주할머니랑 한 번, 엄마 아빠랑 한 번, 파주 할머니 할아버지랑 신림동 할머니 할아버지랑 한 번, 엄마 친구들이랑 또 한 번. 이렇게여"
"이야. 엄청 좋겠다. 오늘도 할머니, 할아버지 한 번에 다 보니까 엄청 좋겠네"
말로 소윤이의 기분을 충분히 예열시켰다.
아침으로 치아바타를 구워줬는데 둘 다 심드렁했다. 특히 시윤이는 빵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밥을 보자, 밥을 찾으며 울기 시작했다. 나이 셋에 아침부터 밥 타령이라니. 아무튼 치아바타는 둘 다 잘 안 먹고, 영양학적으로 최후의 마지노 선인 계란 프라이와 후식으로 준 딸기만 잘 먹었다.
식사 시간이 이른 데다가 그래도 생일이니만큼, 한 장이라도 남을 사진을 위해 온 가족이 꽃단장을 하려니 제법 분주했다. 그나마 식당이 집에서 5분 거리라 압박이 덜했다. 아내도 치장에 공을 들였다. 요즘 맛들린 고데기도 하고. 소윤이도 엄마 하는 걸 보더니 자기도 해 달라길래 소윤이도 했다. 오늘도 시윤이가 제일 치장용(?) 옷이 아니었다. 시윤아, 괜찮아. 니가 우리 집에서 제일 옷맵시가 좋은 것 같아. 니 누나는 잘못 걸치면 큰 사달이 나기 때문에 신경을 쓰게 되네. 넌 티 하나만 입어도 태가 다르더라. (너희 엄마 말로는 누나가 까매서 그렇대)
짜장면, 짬뽕, 탕수육, 유린기 등을 시켰다. 시윤이는 조용히 앉아 배를 채웠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꾸준한 페이스로 먹어 치웠다. 그에 반해 소윤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만나면 언제나 그렇듯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식사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기 배 채울 만큼은 먹은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 "아. 맛있게 잘 먹었다" "아. 배부르다"라며 만족스러운 소감이 등장한 걸 보면, 극도로 정신없는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소윤이는 오늘 생일축하 할 때 꽂을 거라며 어제부터 들고 다니던 '5'모양의 초가 댕강 부러져 매우 슬퍼했다. 사실 두 동강이었는데 내가 억지로 붙이려다가 세 동강이 나 버렸다. 소윤이한테는 비밀로 했다.
"어? 왜 다 부러졌지?"
"그러게"
한차례 눈물을 쏟았지만 막상 촛불을 켜니 이내 웃음을 되찾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시윤이도 옆에 앉혔지만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아는 애처럼 멀뚱히 있다가 뒤늦게 박수를 치며 참여했다. 생일 축하 의식을 마친 후에는 바로 옆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시윤이는 배도 찼겠다 안에 있으려 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내가 데리고 나갔다가 금방 장인어른이 나오셨다. 할머니에게 애교를 부려서 쿠키를 얻어낸 소윤이는 쿠키를 다 먹을 때까지는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쿠키가 사라지자 시윤이를 따라 밖으로 나갔고, 그런 그녀를 여러 사람이 번갈아 따라나섰다.
한참 시간을 보내고 슬슬 일어나려는데 소윤이가 신림동 할머니 집에 가서 잘 거라는 말을 주문 외우듯 반복했다.
"아빠. 나 신림동 할머니 집에서 잘 거에여"
"할머니. 내 손 놓지 마세여"
"엄마. 나 신림동 할머니 집에 가서 혼자 잘 거다여"
다른 때처럼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오늘은 양상이 좀 달랐다. 신림동 할머니 손을 꼭 붙잡고서 놓지를 않고, 자기는 진짜로 거짓말 아니고 신림동 할머니, 할아버지 따라갈 거니까 엄마랑 아빠랑 시윤이만 가라는 말을 진심을 가득 담아서 했다. 사실 그럴 생각도 있었는데 (내) 엄마, 아빠의 사정상 오늘은 그게 안 됐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데리고 가야 했다. 끝까지 말로 설득해서 울더라도 자기 발로 걸어오게 하려고 했는데(그동안은 항상 그랬었고) 오늘은 아주 완강했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 옆을 지키고 선 소윤이를 힘으로 안았다. 근래 보기 드문 저항이었다. 밀고, 때리고, 악 쓰고. 폭력은 어떠한 상황과 이유에도 절대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단호하게 그만하라고 말했더니 울음은 더 폭발했다.
아무튼 웬만하면 대화가 통하고, 말이 먹히는 소윤인데 오늘은 유독 달랐다. 그렇게 할머니 집이 가고 싶었을까. 지난주에도 갔으면서.
낮잠 시간을 훌쩍 넘긴 시윤이는 누나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다. 다행히 소윤이는 격렬했던 이별의 시간에 비하면 금방 제 기분을 되찾았다. 오랜만에 손녀의 격앙된 울음을 보고 슬픔과 착잡함에 사로잡힌 할머니에게 위로 전화도 했다.
"할머니. 어디에여?"
"할머니 지하철 타고 가고 있어. 소윤아 이제 괜찮아졌어?"
"네. 저는 괜찮아졌어여"
"할머니가 미안해. 소윤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못 데리고 가니까 마음이 너무 속상했어"
"할머니. 이제 괜찮아여. 할머니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여"
부모교육 장소가 15분 거리라 시윤이는 계속 잤다. 카시트에서 꺼내 바닥에 눕혔는데도 대자로 뻗어서 쿨쿨 잤다. 아내와 나는 부모교육이 끝나고 바로 집에 가지 않기로 했다. 3시가 넘어서 잔 시윤이가 일찍 가 봐야 자지도 않을 거고, 그럴 바에는 더 놀다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부모교육이 끝나고 어디를 갈지 얘기하는데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날씨도 좋고, 미세먼지도 없으니 밖에 있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러자니 시간이 늦어서 금방 깜깜해질 것 같았다. 아내가 롯데몰을 제안했는데, 썩 내키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스타필드, 롯데몰 같은 곳을 아이들이랑 가는 게 영 불편해졌다. 나로 비유하자면 사방팔방이 치킨 천지인 곳에 떨어뜨려 놓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하는 곳 같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가면 '안 돼'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게 된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기는 좋은 곳이지만, '즐겁고 행복하게' 시간을 쓰고 오는 느낌은 아니었다.
대안이 없었다. 안 좋은 점을 늘어놓긴 했어도 그 거부하지 못하는 '편리함' 때문에 가게 되는 거다. 그나마 롯데몰은 간이 놀이터 같은 곳이 있어서 애들이 좀 뛰어놀 수 있기는 하다.(물론 매우 비좁고, 복잡하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그 와중에 즐겁게 잘 뛰어놀았다. 대부분 푹신하게 만들어 놔서 혹여 시윤이가 넘어지거나 부딪혀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 같고, 시윤이의 운동 능력도 많이 향상돼서 그런 염려도 많이 줄었다. 덕분에 아내와 나는 나란히 앉아서 두 녀석 노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평일에 여기를 와야겠다"
"왜?"
"그냥. 애들 이렇게 잘 놀면 편하니까"
그렇게 애를 키우고도 아직도 모르나.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오늘의 달콤함을 기억하고 다시 방문하면 무슨 이유에서건, 누구 때문이건 쓴 맛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컷 놀게 한 뒤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여정이 참 고단했다. 시윤이는 흥미로워 보이는 곳에 지멋대로 들어가고 올라타기가 일쑤였고, 그걸 제지하거나 안으면 자지러졌다. 하아. 운다. 울어. 아빠의 주먹이. 소윤이는 소윤이대로 머리 지끈지끈하게 만드는 은근한 떼와 짜증으로 힘들게 하고. 결국 예상대로 끊임없이 안 된다고 하고 막아서고, 혼내고. 식당에 들어가기 전 최고조에 다다른 소윤이의 불순종을 다스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곳에 데리고 가서 5분 동안 벽을 보고 서게 했다.
내가 봐도 애들 눈이 휘까닥 돌아가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데려다 놓고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이러고 있으니 애들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까 싶었다. 주차장에 들어설 때만 해도
"소윤아. 우리 오늘 가족 데이트 시간 즐겁게 보내고 가자?"
"네. 아빠"
이랬었는데. (그렇다고 그때까지의 시간이 영 형편없었던 건 아니다. 나름 즐겁고 재밌었지만 그만큼 고되기도 하고 회의감도 들고) 남은 시간을 조금 더 만족스럽게 보내기 위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애들도 비슷한 흐름이었는지, 식사 시간이 매우 평안했다. 둘 다 잘 먹기도 했고, 대화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은혜로다.
밥 먹고 나서 바로 앞에 있는 오락실 코너에 들어갔다. 아, 참 그전에 그 앞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기차를 탔다. 1,000원 넣으면 시윤이 길 때 속도만큼 느리게, 싱글 사이즈 매트리스만 한 레일을 빙빙 도는 그런 기차. 둘 다 신나서 탔지만 소윤이는 중간에 내게 물었다.
"아빠. 내려도 돼여?"
시윤이는 끝까지 흥분을 이어갔다.
"오"
"우와"
"무지?(뭐지?)"
를 연발하며 1,000원 값을 했다. 기차가 멈추고 오락실에 들어가서 시윤이는 자동차 모양 게임기에 정신이 팔렸고, 소윤이는 한 바퀴 돌다가 볼링 게임기 앞에 멈춰 섰다.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을 정도로 신박했다. 나도 처음 봤다. 탱탱볼 같은 걸 실제 볼링처럼 레인에 굴리면 끝에 가서는 화면에 볼링공이 나타나고 핀을 쓰러뜨리는, 실제와 게임이 혼합된 볼링이었다.
"아빠. 저 저거 해보고 싶은데여"
"하고 싶어?"
"네"
"그래. 잠깐만"
아내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받아왔다. 총 5 프레임이었다. 소윤이는 매우 집중해서, 열심히 공을 굴렸고 난 뒤에서 목청을 높였다.
"오. 잘 굴리는데"
"오. 완전 열심히 하는데"
"소윤아. 볼링 선수해도 되겠는데?"
경기를 마친 소윤이는 한껏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빠. 저 잘했지여?"
"어. 짱이야"
그다음 코스는 마트. 마트는 아내와 나의 소비욕구만 잘 자제하면 애들이랑 가기에 은근히 괜찮은 곳이다. 특히 시윤이가 카트에서 나오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아내랑 나랑 하나씩 카트를 밀었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각각 태우고. 마트에서 나올 때까지 둘 다 잘 앉아 있었던 덕분에 매우 편안하고 즐거운 마트 데이트가 됐다.
"여보. 나 폴바셋에 가서 커피 마셔도 돼? 너무 좀 그래?"
"아니. 마셔"
"나. 교환권이 하나 있어서"
"그래. 가자"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아이스크림라떼를 하나씩 시켰다. 여기서는 그리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애들이 비협조적이었다기보다 이미 폐장시간이 거의 다 됐었다. 아내와 나의 피로도도 많이 차오른 상태였고.
(이 모든 걸 한 건물 안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 다들 그렇게 찾아가는 거지)
그 늦은 시간에도 쌩쌩하게 집에 돌아온 소윤이와 (특히) 시윤이를 보며, 우리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위안했다. 사실 즐겁기도 했다.
"소윤아. 가족 데이트하니까 좋지?"
"네. 아빠. 우리 다음에 또 하자여"
"시윤이도 오늘 좋았어?"
"응"
"얼만큼?"
"매(많이)"
차례대로 한 명씩 씻겨서 옷을 갈아 입혔다. 아내는 오늘도 일찌감치 포기했다. 어차피 남은 시간도 체력도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고 난 뒤, 아주 대충이나마 어질러진 집을 치웠다. 집은 대충 치웠는데 베란다를 가로막고 선 재활용 쓰레기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안 보았으면 몰랐을 것을 보고 나니 가슴이 턱턱 막혔다. 재활용 쓰레기도 버리고, 내일 축구하러 갈 때 필요한 짐도 가방에 싸서 차에 갖다 놨다.
날씨도 좋고, 미세먼지도 없어서 어디가 됐든 뻥 뚫린 야외에서 좀 놀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힘들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