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저 평화롭게 먹고 싶었을 뿐

19.03.15(목)

by 어깨아빠

그동안 방학(?) 기간이었던 아내의 목장 모임이 오늘부터 다시 시작됐다.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했다. 그나마 위안거리가 된 건 돌아올 때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내가 목장 모임을 마치고 사무실로 온다고 했다. 같이 저녁도 먹고, 카페도 갈 생각이었다.


목장 모임을 마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나 집이야"

"지금 끝난 거야?"

"아니. 끝난 건 아까 한시쯤"

"아. 애들 괜찮았어?"

"어. 그런데 시윤이 소리 들려? 숨소리?"

"어. 쇳소리 같이 나는 거?"

"어. 병원에 들러야 하나"

"그래. 들렀다가 와"


잠시 후 또 전화가 왔다.


"여보. 시윤이 잠들었어"

"아. 진짜?"

"오늘도 각오해야겠다"


아내가 말하는 '각오'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자지 않고 뺀질거리는 시윤이를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병원에 다녀온 아내가 또 전화를 했다.


"어. 여보. 시윤이는 뭐래?"

"일단 다른 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코가 막혀서 그렇대"

"다행이다"

"시윤이는 깨지도 않은 상태에서 진료받았어"

"아. 진짜?"


사무실에 거의 도착했을 때 다시 전화가 왔다.


"여보. 소윤이가 너무 졸려해서 전화했어요"

"아. 그래?"

"소윤이가 너무 졸려서 곧 잠들 것 같대요"


"소윤아"

"아빠. 뭐해여?"

"아빠. 일하지. 소윤이 졸려?"

"네"


내가 일찍 나간다고 덩달아 이른 시간에 일어났으니 유난히 더 졸렸나 보다. 결국 소윤이는 마지막 10분을 버티지 못하고 잠들었다가 다시 깼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다시 깨서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소윤이는 뜬금없이 '치치'를 들고 다녔다. 치치는 소윤이가 태어나기 전, 소윤이의 애착 인형이 되길 바라며 야심 차게 준비한 인형이었다. 안타깝게도 치치에게는 선천적으로 가진 병이 하나 있었다. [요란스러운 방울 소리 병]. 치치의 머릿속에는 방울이 있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딸랑거렸고, 1분 1초라도 더 재우는 게 최고의 희열인 신생아 시절에, 치치는 점점 배척당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윤이도 치치의 존재 자체를 잊을 정도로 멀어졌고. 그러다 오늘 우연히 신생아 때 치치랑 앉아서 찍은 사진을 봤는데, 그 뒤로 계속 치치를 끼고 다녔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작은 아기'에게 좀 소홀하다 싶더니, 결국 치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일을 마치고 저번에 장모님, 장인어른이랑 갔던 닭갈비 집에 갔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소윤이가 얘기했다.


"어? 여기 저번에 파주할머니, 할아버지랑 왔었던 곳 같은데?"

"오. 어떻게 알았어?"

"저기 그림 보고 알았지여"


5살이지만 진심으로 나보다 길눈이 밝고 관찰력이 좋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이었지만, 난 그런 게 있는지 몰랐다.


(아내와 소윤이 기억에 의하면) 저번에는 없었던 놀이 공간이 생겼다. 아주 조그마한 공간이긴 해도, 다른 아이들이 없어서 소윤이랑 시윤이 놀기에는 딱 좋았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그 지루한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아주 유용하고 감사한 공간이었다.


닭갈비가 나오고 아이들을 앉혀서 밥을 먹었다. 애들 주려고 양념이 안 된 아이용 닭갈비도 따로 시켰다. 둘 다 맛있게 잘 먹었다. 잘 먹다 말고 갑자기 시윤이가 울기 시작했다. 먹는 것 말고 다른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울 때는 보통 한 가지 이유다. 혀를 깨물었다. 혀에서 피도 조금 나고 있었다. 많이 아팠겠지. 시윤이는 세찬 울음을 그치지 않고 엄마를 찾으며 보채기 시작했다. 한창 닭갈비 흡입에 가속을 붙이고 있는데 제동이 걸렸다. 아내에게 안아 달라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저런 방법을 써 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평화롭던 식사 시간의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화가 났다. 짜증이 났다.


'지가 깨물어 놓고 지금 누구한테 짜증이야. 밥 먹는 시간에'


시윤이한테 딱밤도 때리고, 말도 퉁명스럽게 했더니 지켜보던 소윤이가 날 나무랐다.


"아빠. 시윤이한테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여"

"시윤이가 말을 안 들으니까 그렇지"

"그래도여.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아빠가 맨날 그렇게 하니까 내가 따라하져"

"아빠가 뭘 맨날 그렇게 해"

"맨날이 아니라"

"조용히 해. 너도 얼른 밥 먹어"


소윤이의 시선으로 보면, 구구절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말리는 건 아니었지만 옆에서 한마디 한마디 보태는 게 참 얄미웠다. 그 와중에 똥이 마려운지 잔뜩 힘을 주며 용을 썼다.


'하아. 가지가지하는구나'


"시윤아. 똥 다 쌌어?"

"떵"

"다 쌌어?"

"응"


그대로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씻겨주려다가 혹시 모르니 바지를 들춰봤다. 없었다. 똥이.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닦아주려고 바지를 내렸는데 그제서야 헛똥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것도 짜증이 났을 거다. 그렇다고 진똥이었어도 그건 그것대로 못마땅했을 거고.


마침 시윤이는 다시 아기의자에 앉겠다고 했다.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똥이면 어떠하리. 울면 어떠하리'


다행히 평화는 깨지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나서 근처에 있는, 요즘 파주에서 뜨고 있다는 카페에 갔다. 압도적인 공간에 비해, 커피와 빵이 너무 평범했다. 그 평범한 빵을 두 개나 샀다. 아내가 고른 마늘빵. 소윤이가 먹고 싶다는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간 크로와상. 그리고 소윤이, 시윤이 각각 쿠키 하나씩.


소윤이는 빵 먹느라 돌아다닐 생각도 안 하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시윤이도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애들이 빵 먹을 동안만 앉아 있다가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처갓댁에 들렀다. 전해주실 짐이 있다고 하셨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주차장으로 내려오셨는데, 시윤이는 징징거렸다. 난 내려 달라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얼른 출발하라고 재촉하는 거였다. 자기 졸리니까 얼른 가자고. 소윤이는 장모님 손을 꼭 붙잡고는


"나 파주 할머니 집에 가고 싶은데"


라며 잠깐 질척거렸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둘 다 잠들었다. 소윤이는 아주 곤히 잠들었는데 시윤이는 가득 찬 코 때문에 숨쉬기가 불편한지 계속 징징거렸다. 시윤이가 살짝 깨긴 했지만 둘 다 무사히 각자의 자리에 잘 눕혔다.


아내가 누군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동영상을 보여주며 오늘이 화이트데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


"여보? 뭐 없어?"

"화이트데이는 무슨"


차에 짐을 가지러 가면서 집 앞 빵집에 들러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빵 TOP3 안에 들어가는 아몬드뺑오쇼콜라를 하나 샀다. 꽃집에 들러 노란 튤립도 한송이 샀다.


"그냥 비닐 포장하면 3,000원이고 안개꽃 포장하면 5,000원인데 어떻게 해드릴까요?"

"비닐포장 해주세요"


짐 사이에 숨겨서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진심이 닿다]를 보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여보. 짐 정리부터 해"

"정리할 거 없는데?"

"냉장고에 넣을 거 없어?"

"응. 젓갈만 넣으면 돼"


드라마가 끝나고 짐을 정리하던 아내가 빵과 꽃을 발견했다.


"여보. 이거 뭐야?"


지난번 나의 일기를 의식했는지, 아내가 왠지 가식스러운 톤으로 꽃에 대한 감상을 표현했다.(여보. 그냥 담백하게 해도 돼) 내가 생각해도 요즘 꽃 선물의 빈도가 너무 잦았다. 자제해야지.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뺑오쇼콜라를 먹으려고 식탁 의자에 앉은 순간, 덜커덕하고 안방 문이 열렸다.


"음마. 음마"


강시윤 님 어서 오세요. 오늘도 또 방문해 주셨네요. 심야 거실의 단골손님이시네요. 반갑습니다 고객님.


아내가 남긴 오늘의 마지막 유언은 이거였다.


"여보. 다른 건 몰라도 이거(뺑오쇼콜라)는 꼭 숨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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