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22(금)
소윤이는 저번에 한번 파주 할머니네서 혼자 자더니만 매력을 느꼈는지 이번에는 신림동 할머니네서 혼자 자고 오기로 했다. 소윤이의 조건은 명확하다. 자기 '혼자', 엄마도 아빠도 시윤이도 없이 오로지 '혼자'면 된다. (내)엄마가 역촌역으로 소윤이를 데리러 왔다. 아내가 오전에 홈스쿨 기도모임이 있어서 역촌역 근처에 있었다.
잘 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엄마한테 전화를 했더니 소윤이가 받았다.
"아빠"
"어. 소윤아. 잘 가고 있어?"
"네. 지금 버스 타려고 기다리고 있어여"
"아. 그래? 할머니 말 잘 듣고 있어?"
"네. 이제 도서관 가려구여"
"도서관? 좋겠네. 할머니 말 잘 듣고 차 위험하니까 할머니 손 꼭 잡고 다니고"
"네"
실제로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막 버스를 타기도 했고. 중간에는 잠깐 영상통화로 바꾸기도 했다. 소윤이는 잔뜩 들떴다. 소윤이랑 통화하기 전에 7살, 5살 남매 둘이 집 앞 슈퍼인가를 다녀오다가 차에 치였다는 기사를 봤다. 떨어져 있으니 괜히 불안한 마음에 소윤이한테 말하는 척하면서 엄마가 들으라고 손도 꼭 잡으라고, 혼자 있으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놓고 보자면, 시윤이가 없는(?) 게 훨씬 자유롭다. 둘이 같이 있을 때의 노동 강도가 100이라면, 소윤이가 없을 때는 80, 시윤이가 없을 때는 40 혹은 그 이하가 되니까.
기도모임 하다가 시윤이를 재울 시기를 놓친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보. 어떻게 하지?"
그 말에는, 지금 재우면 밤이 길어도 너무너무 길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재우지 않고 밤잠 때까지 버티자니 너무 길고. 진퇴양난이라는 말이었다. 나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외통수 같은 느낌이랄까. 이리 옮겨도 죽고, 저리 옮겨도 죽고.(죽는다는 표현은 좀 과할 테지만)
시윤이는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고, 아내는 어린이 박물관으로 향했다. 자주 가지는 않아도 한 번씩 가면 시윤이가 아주 잘 놀았다. 평소라면 깰 때까지 재웠겠지만, 오늘은 아내가 손수 시윤이를 깨웠다. 그나마라도 밤잠의 시간을 당겨보고 싶은 아내의 비루한 대응이었다.
저번에 내가 데리고 갔을 때는 확인 안 했는데, 오늘은 36개월 이하라는 걸 증명할 서류를 반드시 보여달라고 했단다.(36개월 이하는 무료입장이다) 급히 주민등록등본을 뽑아서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냈다. 프린터 용지도 걸리고, 민원24도 계속 튕기고 그래서 엄청 간단한 일이 조금 오래 걸렸다.
이미 발동이 걸린 시윤이는 들어가자고 난리였고, 급기야는 막 드러눕고 그랬다. 아내는 짧지만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입장했고 아내와 시윤이 모두 조금의 자유를 얻었다.
어린이 박물관이 화정역 근처라 퇴근하는 길에 화정역에서 내렸다. 아내는 저녁을 먹고 들어가자고 했다. 자주 가는 돈까스 집으로 정했다. 누나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오늘 우연히 그런 건가, 시윤이는 유독 얌전히 앉아서 잘 먹었다. 돈까스랑 파스타를 시켰는데, 밥에는 손도 못 대고 돈까스도 시윤이가 절반은 먹었다. 누나의 부재는 시윤이의 인생에 1그램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 않다.(아니,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하네)
교회 갈 시간이 다 되어서 아내랑 시윤이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주고 바로 교회로 가려고 했다. 그래 봐야 10분인데 그냥 집까지 데려다줬다. 아내에게 오늘은 그냥 마음을 비우라고 조언하고 교회에 갔다. [늦게 재우긴 했지만, 조금밖에 안 재웠다]는 건 미봉책일 뿐, 시윤이는 그리 만만한 아이가 아니니까.
10시쯤 아내의 카톡이 왔다.
[이제 들어감. 양심 있으면 자길]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는데 거실에는 미끄럼틀이 나와 있고, 화장실에는 목욕을 한 흔적이 있었다. 시윤이의 수면을 앞당기기 위한 아내의 갖은 노력이 갸륵했다. 노력과 함께 사라졌는지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카톡을 보냈는데 잠시 후 아내가 방에서 나왔다.
"잠들었어?"
"어. 조금"
조금 잠든 것과 많이 잠든 것의 차이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내는 늘 저렇게 말하곤 한다. 얼굴은 심해 2,000미터만큼 깊게 자다 나온 얼굴이었다. 아내는 하루 종일 소윤이 없이 지내니, 너무 허전하다고 했다. 아마 시윤이가 없었다면 다른 이야기가 나왔을 것 같다.
소윤이는 나한테나 아내한테나 먼저 전화하지는 않았다. 이제 할머니랑 있으면 전혀 생각이 안 나나 보다.
"소윤아. 아빠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져"
"아닌 것 같은데. 보고 싶은데 전화도 안 하고"
"그게 아니라. 생각은 했는데 시간이 없었어여"
말이나 못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