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25(월)
아내는 낮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다행히(나에게 다행히) 가까이 사는 친구라 버스 타고 갔다. 점심때쯤 가서 늦게까지(나 퇴근 무렵까지) 있을 거라고, 어제 얘기했다. 실컷 놀고 나서 아내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여보. 오늘 시윤이 안 재움]
맙소사.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었다. 그때가 세 시쯤이었으니까 최소한 4시간은 더 버텨야 밤잠 시간이었다. 그러다 다섯 시나 여섯 시쯤 어설프게 잠들면, 그 뒤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아마 놀다 보니 잘 시간을 놓쳤을 테고(아마 시윤이는, 재우려고 했어도 안 잤을 거다) 늦게 재우면 나에게 너무 고된 밤을 선사하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 같았다.
[잘 버텨 볼 게]
[너무 무리하지 마. 그냥 데리고 있으면 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망했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오늘 자유의 날이었고, 아는 동생과 약속을 잡았다며 내가 퇴근하자마자 바로 나갈 거라고 얘기했었다.(그러고 보니 나에게 차를 내어준 것도 나의 빠른 퇴근, 곧 본인의 빠른 육아 퇴근을 위함이었구나) 시윤이는 태어나서 낮잠을 안 잔 날이 한 번도 없었다. (아마 맞을 거다) 아예 마음을 싹 비웠다.
'그래. 오늘은 시윤이랑 같이 밤을 불태우는 거야. 아내가 올 때까지 안 잘지도 모르지'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시윤이 입술 양 옆이 꼭 어른들 피곤할 때 부르트는 것처럼 그렇게 돼서 병원에 가보려고"
"그래? 심해?"
"심하지는 않은데 걱정이 돼서. 여보도 병원으로 오면 될 거 같아"
"알았어"
퇴근하고 병원으로 갔는데, 월요일이라 그런가 사람이 무지 많았다. 아내는 한남동 모처에서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진료 다 받고 가면 너무 늦을 것 같았다.
"여보. 얼른 가"
"에이. 그래도 진료는 받고 가야지"
"그럼 너무 늦어. 그냥 얼른 가"
아내는 병원에서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소윤이가 조금 슬픈 기색을 내비쳤지만 잘 헤어졌다.
다행히 시윤이의 입술은 크게 걱정할 게 아니었다. 그냥 주부습진 같은 가벼운 질환(?)이고, 금방 사라질 수도 있고 엄청 오래갈 수도 있다고 하셨다. 바세린이나 챕스틱을 부지런히 바르라고 하셨다.
진료가 끝났으니 갈 바를 정해야 했다. 소윤이나 시윤이나 겉보기에는 쌩쌩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차에 태우면 바로 잠들지도 모른다는 걸. 특히 강시윤.
"소윤아. 시윤아. 우리 여기서 저녁 먹고 가자"
"왜여?"
"그냥. 아빠랑 소윤이랑 시윤이랑 데이트도 할 겸"
병원 바로 앞에 있는 칼국수 집에 들어갔다. 저번에도 한 번 먹어본 적 있었는데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장님. 여기 칼국수 하나랑 공깃밥 하나 주시구요. 칼국수는 안 맵게 해주세요"
시윤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바깥 풍경에 집중했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엄청 자주 지나감)
"아빠. 빠방. 빠방. 빠방"
을 연호했다. 밥 먹는 내내.
칼국수와 밥이 나왔다. 그릇 두 개에 적당한 양을 각각 덜어내고 후후 불어서 식히고 있는데, 소윤이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아빠. 똥 마려워여"
"하아. 진짜? 못 참아? 밥 먹고 갔다 오자"
"아빠. 못 참을 거 같아여. 너무 마려워여"
도로 넣을 게 따로 있지. 그러면 안 됐는데, 아무 관련 없는 시윤이까지 데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번잡스러워서 소윤이한테 괜한 소리를 했다.
"그래. 가자. 시윤아 너도 같이 가자"
"떵? 떵?"
"어. 누나 똥 마렵대"
식히던 국수 그릇을 내려놓고 시윤이를 아기의자에서 꺼내서, 한 팔로는 시윤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소윤이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갔다.
"아빠. 다 쌌어여"
"그래. 어. 어. 시윤아 거기 만지면 안 돼. 지지야 지지"
닦으랴, 막으랴 정신없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식사를 이어갔다. 애초에 나는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식욕이 아예 사라졌다. 소윤이는 국수를 엄청 잘 먹었다. 시윤이는 밖에 지나다니는 차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평소보다는 덜 먹었다. 그래도 둘 다 배가 충분히 찰 정도는 먹었다.
"소윤아. 우리 밥 먹고 편의점에도 갈까?"
"왜여?"
"그냥 데이트하게"
밥 먹고 나왔는데도 시간이 일렀다. 조금 더 머물러야 했다. 근처에 마땅한 편의점이 없어서 빵집으로 유도했다.
"소윤아. 우리 그냥 빵집에 갈까?"
"편의점 가고 싶은데"
"여기는 편의점이 잘 없는 것 같아. 그리고 우리 집 앞 편의점처럼 앉는 데가 있는지도 모르고. 빵집에 가서 빵이랑 우유 먹자"
"그러자여"
양 옆으로 소윤이와 시윤이를 잡고 걸어갔다. 둘이 동시에 안아달라고 떼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었다. 길 건너편에 있는 파리바게뜨에 가서 꽈배기 하나랑 뽀로로 마들렌 두 개를 샀다. 우유도 하나.
마들렌을 하나씩 쥐어줬더니 야금야금 잘 먹었다. 둘 다 졸려 보이기는 했어도 겉으로 막 짜증 내거나 칭얼대는 건 없었다. 꽈배기까지 나눠 먹이고, 드디어 차에 돌아왔다.
7시. 적당한 시간이었다. 시윤이는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고 소윤이는 잠들지 않았다. 마지막에 먹은 꽈배기에 설탕이 가득이라 그대로 재우기 찝찝했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시윤아 미안. 너의 입 안도 깨끗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아빠는 쫄보라 그렇게 못했어. 니가 깰까 봐)
소윤이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물었다.
"아빠"
"어. 소윤아"
"엄마랑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어여?"
"아니. 어른이 되고 나서 만났는데"
"그런데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한 거에여?"
"아. 엄마도 알고 아빠도 아는 어떤 이모가 서로 소개해 준 거지. 그래서 남자 친구, 여자 친구 하다가 결혼한 거야"
"아 그래여?"
그때만 해도 너 같은 딸을 선물로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집에 도착해 시윤이는 그대로 눕히고, 소윤이는 씻겨서 재웠다. 오늘도 소윤이는 무섭고 두렵다는 말을 많이 했다.
"아빠. 무서운 사람이 들어와서 저거 가지고 가면 어떻게 해여?"
"아빠. 이게 무슨 소리에여?"
내 손을 꼭 잡고 잠들었다.
아내는 시윤이 상태가 어떤지도 궁금하고, 애들이 걱정도 되고, 나도 걱정이 됐는지 방에서 애들 재울 때 전화도 하고, 상황이 종료(?)되면 연락을 달라고 카톡도 보냈다.
"여보"
"어. 애들은?"
"자"
"괜찮았어?"
"어. 괜찮았어. 시윤이는 괜찮대. 그냥 가벼운 습진 같은 거래. 연고는 처방해 주시긴 했는데 발라도 다 빨아먹을 거라고 하셔서 안 받아왔어"
"아. 저녁은?"
"그 앞에서 칼국수 먹고 빵집에서 빵도 먹고 왔어"
"애들은 괜찮았고?"
"어. 밥도 잘 먹고 기분도 좋았어. 여보는 어디야?"
"나는 이제 거의 만나기 전"
"이제?"
"어. 나 집에 들렀다 갔거든"
"왜?"
"카드가 없어서 교통카드도 없으니까"
"내 카드 받아갈 걸. 너무 늦었다. 아깝다"
아내는 한남동에 갔다. 차를 안 가지고 갔으니 지하철 끊기기 전에 돌아오려면, 체류 시간이 너무 짧아서 내가 다 아쉬웠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중간에 한 번 깼다. 둘이 동시에 문을 열고 나왔다. 소윤이는 다시 자리에 눕고(날 호출하면서), 시윤이는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시윤아. 엄마 없어. 아까 빠이빠이 했잖아"
"으아아아아앙. 엄마아아아아악"
"엄마 없다니까. 봐 봐. 아빠랑 들어가서 자자"
"아아아아아악. 엄마아아아아아"
"시윤아. 아빠랑 들어가서 자자. 엄마 없잖아"
조금 더 울던 시윤이는 갑자기 현실 인식이 됐는지 고분고분해졌다. 순순히 누워서 기저귀도 갈고, 겉옷도 벗겼다. 한 30분 정도 누워서 다시 재웠다. 아내는 그 사이 귀가했다.
아내는 여러모로 오늘의 외출을 만족스러워했다. 뿌듯했다. 나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구나.
그나저나, 시윤이가 낮잠 안 자고 버티는 게 가능하구나. 정말 낮잠을 없애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