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팔라 육아

19.03.27(수)

by 어깨아빠

아내와 아이들은, 요즘 홈스쿨 모임에 (아내의)친구들 모임에, 뭔가 쉴 새 없이 바쁘다가 간만에 아무 일 없는 하루였다. 아, 그렇다고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당연히 아니다. 며칠 동안 바깥에서 시간을 보낸 만큼, 집안일은 차곡차곡 쌓였으니까. 아내에게 언제나 큰 마음의 짐이 되는 빨래가 오늘도 아내의 최우선 과제였다. 나처럼 대충대충 해도 귀찮은데 모든 공정에 정성을 들이는 아내에게는 더욱 피곤한 일일 거다.


"뭐해?"

"빨래하지"

"애들은 괜찮아?"

"어. 괜찮아"


그렇다고 목소리에 생기와 활력이 넘치고 그런 건 아니었다. 지친 듯 다소 힘이 빠진 목소리였지만 그게 평균(괜찮은 상태)이 된 지 오래다.


조금 시간이 더 지나고 다시 전화를 했다.


"어. 여보. 난 롯데몰에 왔어"

"아. 그랬어? 사모님이랑?"

"어"

"애들은 괜찮아?"

"소윤이가 뭔가 계속 반항적이야"

"왜?"

"말 안 듣고. 잘못해서 얘기하려고 하면 네에 네에 이러면서 건성으로 대답하고"

"그래?"

"하람이한테도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하고"

"여보는 괜찮아?"

"어. 뭐 그럭저럭. 소윤이는 지금도 내 눈치를 살살 보고 있어"

"왜 그럴까"

"우리가 너무 사랑을 안 줬나"

"그런가"


사랑을 안 줬다기보다, (소윤이가 느끼기에)과도한 훈육 때문에 사랑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아무튼 소윤이는 아내에게 끊임없는 잽을 날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내도 나랑 비슷하게 집에 도착할 것 같다길래, 따로 연락을 하지 않고 (퇴근 후) 집으로 갔다.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려는 순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 아직 롯데몰이야?"

"...어...여보는..?"

"나 방금 들어왔지"

"...알았어..."

"여보. 목소리가 왜 그래?"

".........."

"왜?"

"....너무 짜증이 나는데 참고 있어"

"왜? 소윤이 때문에?"

(소윤이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아아아. 엄마아아아. 엉엉엉")

"....어..."

"왜 그러는데?"

"..아니..아까부터 계속 이어진 거지 뭐...나도 못 참고..."

"계속 말 안 들었어?"

"....어...여보...나도 갈게"


아내의 말에 의하면, 하루 종일(집에 있을 때부터) 그랬단다. 말하면 들은 체 만 체하고, 그렇다고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게 차곡차곡 아내의 마음을 긁고 있었던 거다.


얼른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아내의 격앙된, 혹은 침체된 목소리를 듣거나 감정을 읽으면 나타나는 남편의 본능이랄까. 설거지를 90% 정도 끝냈을 때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다. 아내와 소윤이는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롯데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윤이에게 묻지 않았다. 아예 모르는 척, 언급을 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소윤이도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오늘만큼은 엄모자부. 소윤이를 괜히 더 안아주고 살갑게 대해줬다. 물론 도도한 소윤이는 그렇다고 나한테 막 와서 엉겨 붙거나 내 품을 파고들거나 그러지도 않는다.


소윤이는 시간이 좀 지나니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랬다. 그렇다고 자기 나름대로 상한 속마음까지 다 풀렸을 리 없겠지만.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 기분이 대략 어떤 건지 안다. 오만가지 좋지 않은 감정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느낌. 어릴 때 엄마가 회초리로 때리고 나면 "엄마는 너네 때리고 나면 뭐 기분 좋은 줄 알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도 기분이 안 좋을 거라는 정도는 당연히 생각했지만 그게 이렇게 복잡 미묘한 감정의 복합이었을 거라고는 당연히 상상도 못 했다.


한차례 분노와 짜증이 휩쓸고 간 아내의 속을 어느새 슬픔과 자책이 차지하고 있었다. 소윤이, 시윤이랑 놀면서도 아내와 소윤이의 동태와 기분을 파악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축구하러 가는 날이라 나도 모르게 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날은 그냥 동물 다큐에 자주 등장하는 광활한 초원 위의 임팔라 같은 최약체처럼 굴어야 한다. 남편도 알아서 길 때가 있어야지. 부디 두 사람이 원만한 끝맺음을 보길 바라며 집을 나섰다.


실컷 땀을 빼고 나서 집에 돌아오며 우리 집 창을 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어. 좀 전에 나왔어"

"진짜? 시윤이가 늦게 잤어?"

"어. 늦기도 했고 나도 잠들었고"

"소윤이는 기분 좋게 잤어?"

"소윤이는 또 울면서 잤어"

"왜?"

"자려고 누웠는데 아까 거기가 계속 아프다면서 오줌도 못 싸겠다는 거야.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쉬 하라니까. 그거 가지고 한 30-40분을 씨름했지 뭐. 나중에는 나도 너무 짜증이 나더라고"

"그래서 결국에는 오줌 쌌어?"

"쌌지. 그러고 나서 둘이 기도하고 울고 회개하고. 소윤이가 아빠 오면 자기 옆에 누우라고 꼭 말해 달라고 했어"


집에 들어가서 샤워하고 할 일 하다가 자려고 할 때쯤 소윤이랑 시윤이가 깼다. 언제는 나보고 자기 옆에 누우라더니 엄마를 찾았다.


"소윤아. 아빠 보고 누우라며"

"엄마"

"그래도 엄마가 좋아?"

"네"


내가 좀 삐진 척했더니 그런 거 외면하지 못하는 소윤이가 쭐래쭐래 내 옆으로 와서 누웠다.


"소윤아. 아빠 장난친 거야. 엄마 옆에 가서 자"

"아빠. 여기 누워서 자다가 깨면 내려 갈게여"

"그럴래?"


잠시 후 소윤이가 내게 말했다.


"아빠"

"응"

"아빠가 코 골아서 시끄러워서 못 자니까 엄마한테 갈게여. 괜찮져?"

"어. 그래. 괜찮아"


그렇게 엄마랑 지지고 볶아도, 그래도 결국 엄마가 좋지? 그러니까 부디, 이 일기를 읽고 있을 때부터라도 니들 엄마한테 잘하란 말이다. 너네가 스스로 큰 게 아니니까. 알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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