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29(금)
눈 뜨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았다.
"아빠. 오늘은 시간 많으니까 엄청 오래 해도 돼여?"
"어. 소윤이 하고 싶은 만큼 해"
내가 아침을 준비하고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욕조에 들어갔다. 아내가 어제 마트에서 산, 잘게 썬 야채와 으깬 두부를 섞어 놓은 식재료(?)에 계란을 풀어서 전처럼 부쳤다. 애들은 그걸 반찬으로 먹이고 아내와 나는 시리얼을 먹었다. 아침부터 한 시간이 넘게 물놀이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미리 일정을 짜지 않고 왔다. 가볼 만한 곳 몇 군데를 찾아보기는 했지만 꼭 가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왔다.
"여보. 오늘 어디 가지?"
"그러게"
일단 꽃단장을 했다. 옷도 예쁘게 입고, 머리도 하고. 아내는 고데기도 하고 화장도 공들여했다. 소윤이도 계절에 걸맞은 원피스를 입고 머리도 정성스레 양갈래로 묶었다. 우리 시윤이만 불쌍했다. 앞면에 붙은 알파벳 중 두어 개가 사라진 티셔츠와 손질할 것 없는 비루한 머리 덕분에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시윤아, 넌 맵시가 좋으니까 아무거나 걸쳐도 돼.
일단 숙소 바로 옆에 괜찮은 카페가 있다길래 커피를 한 잔 하러 갔다. 출입문에 {No Kids Zone]이라고 크게 붙어 있었다. 그래도 덧붙인 설명이 참 친절했고, 사장님이 문 밖까지 나와서 바깥에는 앉으셔도 된다고 미안함을 담아 말씀해 주셨다. 바깥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공터가 있기는 했지만 주차장을 겸하고 있어서 아이들이 막 뛰어놀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데크 위에서 왔다 갔다 하며 나름 재밌게 놀았다.
점심은 숙소가 있던 동네의 맛집을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 허름한 국수, 국밥집에서 먹었다. 멸치국수, 고기국수, 순대국밥, 따로국밥 등을 파는 가게였다. 1992년에도 할머니셨던 사장님이 여전히 운영하고 계신, 나름 뼈대와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마침 시윤이는 잠들어서 유모차에 눕혔다. 수석 종업원(?)쯤으로 보이는 분이 가게 안의 평상에 앉아 커다란 칼로 돼지 머리를 서걱서걱 썰고 계셨다.
"여보. 뭐 먹을래?"
"난 멸치국수 먹을까?"
"그래. 그럼 난 순댓국 먹을 게"
"사장님. 여기 순댓국이랑 멸치국수요"
돼지머리를 썰던 수석 종업원 같은 아줌마가 끼어드셨다.
"고기국수 먹지 왜요"
"아. 고기국수가 맛있어요?"
"그럼요"
멸치국수를 고기국수로 변경했다. 시킨 지 5분도 안 돼서 두 음식 모두 나왔다. 와우, 대박. 일단 건더기가 박하지 않았다. 대충 숟가락 넣고 뜨면 한가득이었다. 국물도 조미료 맛이 강하지 않고 적당했다. 아내의 고기 국수도 맛있어 보였다. 커다란 살코기 덩어리가 네댓 점 들어갔고, 면발도 적당히 두툼했다. 난 아주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아내였다. 멸치국수를 시켰어야 했다. 여행이라고 흥분해서 잠시 이성을 잃었다. 아내는 국수가 아니라 고무줄을 씹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난 딱 알 수 있었다.
'가영이는 맛이 없구나'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나로 치자면, 까망베르 치즈에 발사믹 식초를 뿌려 먹으면 나올만한 표정이랄까. 마치 소윤이가 먹기 싫은데 억지로 깨작깨작 먹는 듯한 모습이었다. 맛있게 먹는 듯하던 소윤이도 금방 숟가락을 내려놨다. 미안하게도 나만 행복한 식사시간이 됐다. 불쌍한 시윤이는 점심도 못 먹고.
날씨가 엄청 따뜻하지는 않았다. 약간 서늘한 편에 가까웠다. 일기 예보를 보니 내일은 더 춥다고 했다.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당장 내일부터 혹시 날씨가 흐려지거나 추워지면 갈 수 없는 곳을 가기로 했다. 소윤이는 계속 바다에 가자고, 가서 모래놀이를 할 거라고 얘기했다. 모래놀이라니, 생각만 해도 번잡스럽기도 했고, 바다보다는 숲에서 뛰어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항 근처에 한라 수목원이 있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5살, 3살 애를 동반해서 수목원에 가 봐야 얼마나 호사를 누리겠나. 그저 애들이 좀 즐겁게 뛰어 놀기를 바랄 뿐이었다. 소윤이는 잘 설득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제주도라 그런 건지 뻔하디 뻔한 수목원인데 푸르고 푸른 나무가 가득한 곳에 들어서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 소윤아. 진짜 좋지 않아? 우리 동네에 있으면 이런 맑은 공기도 못 마시잖아. 아빠 따라 해 봐. 흐으으으음. 하아아아아"
"흐으으으음. 하아아아"
"어때? 기분 좋지?"
"네"
일단 편의점에 들러 시윤이 요깃거리를 좀 샀다. 바나나와 견과류, 우유. 소윤이에게는 여행이니만큼 특별히 아이스크림. 다행히 유모차를 끌고 갈만 한 산책로가 있었다. 과연 소윤이가 언제까지 걸을 수 있을까 걱정하며 한 10분 정도 걸었더니 넓은 잔디밭이 나왔다.
"우와. 소윤아. 여기 봐. 잔디밭이 있네. 여기서 마음껏 뛰면 되겠다"
안타깝게도 소윤이는 또 먹을 것에 집중했다.
"엄마. 초콜렛 하나 먹어도 돼여?"
"엄마. 나도 바나나 하나 주세여"
"엄마. 뭐 맛있는 거 없어여?"
내가 아무리 먹는 걸 좋아해도, 노는 것보다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누굴 닮았을까. 처음에 내가 상상한 그림은 이랬다. 아내와 나는 벤치에 앉아 있고, 소윤이랑 시윤이는 저 멀리서 자기들끼리 신나게 뛰어놀고. 현실은 벤치에 앉아 있는 아내와 내 옆에서 끊임없이 먹을 것을 갈구하는 딸과 아들.
"소윤아. 뭐 이런 데 와서까지 먹을 걸 달라고 해. 재밌게 뛰어놀아야지"
아쉬운 마음에 타박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짧은 순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마음 깊은 곳에 '나는 쉴 테니 너희끼리 놀아라'는 마음이 있었다. 엉덩이를 떼고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갔다.
"소윤아. 아빠랑 저기까지 뛰어볼까?"
"아빠. 누가 빨리 뛰어가는지 해보자여"
그것을 시작으로 한참을 소윤이, 시윤이랑 뛰놀았다. 계속 뛰고, 돌고, 안아서 돌리고, 숨바꼭질도 하고. 몸이 힘들기도 하고, 매 순간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소윤이랑 시윤이는 좋아했다. 아직은 엄마, 아빠가 수고해야 하나 보다. 한 시간을 넘게 놀았다.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아내가 열심히 검색해서 식당 한 곳을 찾아냈다. 제주 시내(아닐 수도 있음)에 있는 전형적인 파스타 가게였다. 파스타 팔고, 피자 팔고, 샐러드 팔고 그런. 점심때의 피해(?)를 보상받으려 하는 건가 하는 의심을 했다. 사실 애들이랑 다니면 어쩔 수 없다. 날 것, 매운 것, 너무 자극적인 것을 제외하고 나면 먹을 게 뻔하다. 제주도까지 와서, 육지에도 널리고 널린 피자와 파스타라니, 나중에 후회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맙소사. 파스타와 피자를 먹는 순간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아니, 제주도에서 파스타랑 피자까지 맛있으면 어쩌라는 거지? 정말 너무 맛있었다. 전혀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소윤이랑 시윤이가 그렇게 협조적이지 않았는데도 만족스러운 기억인 걸 보면, 꽤나 맛있었나 보다. 아내도 낮에 고기국수 먹을 때랑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마 이때쯤부터 나의 다짐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며 내 속으로 다짐했다.
'소윤이랑 시윤이한테 즐거운 추억이 되도록 노력해야지. 짜증 내지 말아야지'
뭔가 항상 상상 그 이상의 그 무엇을 나에게 선사하는 소윤이 앞에서 평정심을 지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하루 종일 잔잔하게, 혹은 큼직하게 주고받았다. 소윤이도 소윤이지만 나도 참.
어쨌든 매우 즐거웠던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평소 같았으면 '수면' 이외의 행동은 일절 허용하지 않았을 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여행이니만큼 예외를 적용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또 욕조에 물을 받았다. 물놀이하고, 나와서 또 놀고. 매우 늦게 취침에 돌입했다. 물론 애들만.
아내와 나는 빠져나왔다. 숙소 바로 옆에 영화 [심야식당]에 나오는 그 식당 같은 식당이 있다고 해서 갔다. 우리가 조금 더 대담했다면, 아내랑 나랑 직접 가서 먹는 것도 가능했을 만큼 가까웠지만, 아내와 나에게는 그 정도 담력이 없다. 포장해서 먹을 생각이었다.
"여기 포장되죠?"
"저희는 포장 안 되는데"
이럴 수가. 워낙 외진 곳이라 다른 대안은 없었다. 어제 사놓은 과자 몇 봉지가 전부였다.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뜯었다. TV가 없으니 노트북을 켜고 영화를 탐색했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은 [남극의 쉐프]를 골랐다. 계속 먹는 장면이 나와서 그런가 영화의 초중반쯤이 되자, 과자가 물리기 시작했다.
"아, 여보. 아쉽다. 심야식당"
"그러니까"
그러고서는 내가 먼저 꾸벅꾸벅 졸았다. 내가 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도 졸고 있었다.
"여보. 그만 볼까?"
"그럴까?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졸만 한 영화야"
아내의 평이 정확했다. 재미가 없어도 졸 틈이 없는 영화가 있고, 재미는 있는데 졸린 영화도 있지. 거기에 하루 종일 여행인지 육아인지 헷갈리는 일정을 소화했으니 오죽하랴.
여보, 이제 우리도 늙어가나 봐. 노는 것도 체력이 달려서 안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