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도 좀 놀자

19.03.30(토)

by 어깨아빠

"아빠. 오늘도 아침에 물놀이 할 수 있어여?"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야"

"왜여?"

"이제 오늘 하고 내일은 다른 숙소에서 자는데 거긴 욕조가 없어"


오늘도 첫 활동은 물놀이.


"여보. 여보가 애들이랑 들어가. 내가 아침 만들게"


아내를 욕조에 떠밀고 난 볶음밥을 만들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막판에는 모두 욕조에 들어갔다. 소윤이는 뭐가 뒤틀렸는지 영 심드렁하고 말도 안 들었다. 몇 번의 꾸지람을 들은 소윤이는 기분이 상했는지 그만 하고 나가겠다고 했다. 마지막 물놀이는 그렇게 어정쩡하게 마쳤다.


첫날, 마트에 들렀을 때 제주도에 왔으니 흑돼지를 먹는 건 물론이고, 숙소에서도 한 번 구워 먹어야 한다며 오겹살과 목살을 500g씩 샀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주인 사장님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에서는 고기나 생선류만 아니면 간단한 조리는 가능해요"

"아. 네. 바베큐는 필요할 때 말씀드리면 되나요?"

"저희는 바베큐 없는데요?"

"아, 그래요?"


아내와 눈을 맞췄다.


"아, 맞다. 여기 바베큐 없지"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저희가 쓰는 거 빌려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오겹살과 목살을 냉장고의 가장 시원한 곳에 고이 모셔놨다. 그걸 차에 싣고 돌아다니면 상할까 봐, 다음 숙소에 미리 갖다 놓기로 했다. 첫 번째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어제 그 노키즈존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산 뒤, 바로 다음 숙소로 갔다.


사장님에게 숙소 이용에 관한 설명을 듣고, 바로 숙소를 나섰다. 점심 먹을 곳을 찾아야 했다. 무슨 여행이 먹다 끝나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아내와 나의 여행에서 '맛있는 식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역시나 아내의 검색을 통해, 숙소 근처의 한 일본 요리집을 찾았다. 아내가 이러저러한 설명을 할 때만 해도 별 기대가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 들었는데, 막상 가게에 들어서니 뭔가 맛집의 기운이 가득했다.


돈코츠 라멘, 흑돼지 히레 카츠, 마제 소바. 이렇게 세 개를 시켰다. 이제 두 개 시켜서는 애들이랑 먹기에 부족하다는 게 아내와 나의 주장이지만, 가끔은 우리의 욕망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정당성 확보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세 개 시키길 잘했다. 슈퍼울트라초특급 맛집이었다. 어제는 파스타와 피자, 오늘은 돈까스와 라면, 소바. 굳이 제주도까지 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맛있으면 장땡이다.


"여보. 애들은 신경 쓰지 말고, 우리나 맛있게 먹자"


아내의 한 마디에 큰 위로를 얻고, 고개를 처박았다.


'아빠는 일단 먹는다'


현재 얼마나 유명한 맛집인지는 모르겠는데, 부디 안 유명해졌으면 좋겠다.(사장님, 죄송해요)


소윤이는 이제 식사의 평균이라는 게 생겼다. 아무리 안 먹어도 꾸역꾸역 어느 정도 먹어내는 끈기가 붙었다. 시윤이는 아직 극과 극을 달릴 때가 많다. 잘 먹을 때는 너무 많이 먹는다 싶을 정도로 잘 먹고, 안 먹을 때는 아예 입에도 안 대고. 오늘도 거의 후자에 가까웠다.


바닷가에 꼭 가야 했다. 소윤이가 제주도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 중 하나였다. 바닷가에서 놀기. 원래 물에도 들어간다고 하는 걸,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잘 설명했다. 대신 모래 놀이는 포기할 수 없었는지, 첫날부터 바닷가는 언제 가는 거냐고 틈틈이(라고 쓰고, '시도 때도 없이'라고 읽자) 물어봤다. 사실 바닷가에 갈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날도 서늘하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약속했으니까. 이 바람에, 추위에 무슨 모래놀이인가 싶고, 생각만 해도 고된 여정이라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윤이가 잠들어서 일단 깰 때까지는 어딘가에 머물러야 했다. 협재 해수욕장 근처의 카페에 갔다. 거센 바람을 뚫고 힘겹게 갔는데 [유모차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제주도에 부는 육아인 배척의 바람이 서글펐다. 혹시나 싶어 아내가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야외 자리(한 자리, 비닐하우스 안)에는 앉을 수 있긴 한데, 앞에 대기하고 있는 손님들이 야외에 앉는다고 하면 그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우리 앞에 젊은 여성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야외 자리를 취했다.


"여보. 어디 가지?"

"그러게"


소윤이를 혼자 바닷가에서 놀게 하기에는 시윤이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거센 바람이 부는데 계속 밖에서 재울 수도 없고. 아내는 근처의 또 다른 카페를 검색했다. 아무런 기대나 바람 없이, 그저 시간만 때울 요량으로 들어갔다. 막 찾아서 간 것 치고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분위기도, 맛도. 소윤이도 바닷가에 가기 위한 기다림이라는 걸 알았는지, 즐겁게 있었다.(큰일이 있었는데, 밝힐 수 없어 안타깝다. 내가 죽는 날, 내 옆에서 2019년 봄, 협재의 어느 카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소상히 알려줄 생각이다. 소윤이, 시윤이에게는 특별히 언제든 알려줄 테니 물어보거라)


시윤이가 깼고, 협재 해수욕장으로 갔다. 난 웬만큼 추워도 밖에서 노는 걸 별로 걱정하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춥다기보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었다.


"여보.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렇지 춥지는 않네"


딱 5분 뒤에 생각이 바뀌었다. 춥지 않기는.


소윤이랑 시윤이는 이 와중에 모래 위에 털푸덕 앉아서 재미있게 모래 놀이를 했다.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좀 아쉬웠다.


"아빠. 봐봐여. 잘 만들었져?"

"오. 대단한데?"


"아빠. 바바. 바바"

"오. 시윤이도 잘 만들었네?"


해변을 거니는 사람도 몇 명 안 됐고, 우리처럼 애를 데리고 온 사람은 더 없었고, 모래놀이하는 애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니네가 즐거우면 됐지 뭐.


오래 하지는 못했다. 찬바람을 너무 오래 쐬는 애들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아내와 내가 너무 추웠다. 그렇다고 같이 앉아서 즐겁게 놀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냥 뭔가 황량했다. 얼른 장면을 전환하고 싶었다.


"소윤아. 이제 조금만 더 놀고 가자. 너무 추워서 감기 걸리겠다(니네 말고 엄마가)"

"아빠.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여?"

"그래. 조금만 더 놀고"


자기들도 보다 세찬 바람과 찬 기운에 움찔했는지, 그만하고 가자는 말에 바로 훌훌 털고 일어났다.


"소윤아. 그래도 좋지? 제주도 바닷가에서 모래 놀이도 하고. 짧았지만 재밌었지?"

"네. 아빠. 내일도 또 오자여?"


내일은 오늘보다 더 춥대, 소윤아. 정신 차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장을 봤다. 오늘은 소윤이 낮잠을 재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보. 그래도 여행인데, 우리도 좀 놀아야지"

"맞아"


오늘만큼은 둘 다 일찍 재우고 아내와 나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해수욕장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의 딱 중간쯤 있는 마트에 일부러 들렀다. 소윤이 잠 깨라고.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아내는 애들을 씻기고 난 불을 피웠다. 해가 지니 날은 더 서늘해졌다. 밖에서 구우며 먹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열심히 구워서 숙소 안에 넣어주려고 했다.


"아빠. 고기 굽는 거 구경할래여"


누나가 나가는데 시윤이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두 녀석 모두 점퍼를 두껍게 껴입고 나왔다. 고기 구워 먹는 숯불은 물론이고, 장작도 있어서 장작불도 피웠다. 춥긴 해도 나름 운치도 있고, 재밌었다. 소윤이랑 시윤이도 태어나서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둘 다 약간의 흥분과 신남을 감추지 못했다.


두 녀석 모두 고기를 달라고 난리여서 그 자리에서 가위로 잘라 조금씩 입에 넣어줬다. 꽤 많이 먹었다. 쉴 새 없이 잘라서 먹이고 굽고 그랬다. 오겹살까지 다 구워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애들은 밖에서 고기를 많이 먹었는지 오히려 안에서는 썩 잘 먹지 않았다. 아내도 영 시큰둥했다. 어제 고기국수를 먹을 때의 표정과 몸짓이었다. 오겹살이 비계가 너무 많다 싶었는데, 역시 아내의 입맛에는 별로였나 보다.


"여보. 라면 끓여서 같이 먹을까?"

"그럴까? 귀찮은데"

"내가 끓여줄게"

"됐어. 그냥 먹자"

"왜, 끓여줄게"


후다다닥 라면 한 개를 끓였다. 아내는 고개를 처박고 열정적으로 먹었다. 조금 전 고기 먹을 때랑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여보. 맛있게 잘 먹네?"

"흐흐흐흐흐흐"


식사를 마친 뒤 서둘러 재우기에 돌입했다. 엄청 이른 건 아니었지만, 제주도에 오고 나서는 가장 빠른 시간이었다. 역시나 아내도 함께 잠들었다. 살짝 흔들어 깨웠다.


"여보. 피곤하면 그냥 자"

"아니야. 그래도 오늘은 나갈 거야"


아내랑 거실에서 TV를 봤다. 여기는 TV가 있었다. 집에도 TV가 없다 보니 가끔 아내랑 이런 얘기를 한다.


"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누워서 티비나 봤으면 좋겠다"


아내랑 앉아서 여러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거리고, 과자를 집어 먹었다. 집에 TV를 두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TV가 있었으면, 아내와 나의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졌을 거다. 둘 다 TV 귀신이니까.


아내가 불현듯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고, 여행이니까 특별히 하겐다즈를 먹겠다고 했다. 기꺼이 문 연 편의점을 찾아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임산부도 아닌데 말이야.


[시윤 깸]


강시윤은 여기 와서도 깨는구나. 아마 집이었으면 그대로 잠들었을 아내가, 하겐다즈를 먹어야 한다는 일념 때문인지, 시윤이를 재우고 귀환했다. 정신없이 아이스크림을 퍼먹은 뒤(나도 같이 먹음), 아내는 졸기 시작했다.


"여보. 들어가서 자"

"그래야겠다. 여보는 안 자?"

"어. 나는 TV 좀 더 보다가 잘게"


아내가 들어가고 나서도 재밌었다. 그냥 누워서 이리저리 채널 돌려가며 TV 보는 게 너무 즐거웠다. 정말, TV를 혼수로 들이지 않은 건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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