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끝자락에서 라떼를 쏟았을 때

19.03.31(일)

by 어깨아빠

숙소 근처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자그마한 교회였는데 예배가 굉장히 은혜로워서 내심 놀랐다. 예배 끝나고 얘기해 보니, 아내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었다. 시윤이는 중간쯤부터 엄청 졸려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자지는 않았다. 소윤이도 협조적이었고.


제주도에 왔으니 흑돼지를 한 번은 먹어야 했다. 제주도에서 흑돼지 집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기왕이면 맛있는 집에서 먹고 싶었다. 이전에 가 봤던 곳들이 있기는 했지만 거리도 멀고, 애들이랑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드럼통 구이) 인터넷 검색과 현지인 추천을 적극 활용했다. 제주 시내에 있는 커다란 규모의 고기집에 가기로 했다.


흑돼지 반마리를 시켰는데 여러 부위가 골고루 나왔다. 목살, 삼겹살을 제외한 가브리살, 항정살 등의 부위는 아내가 먹을 수 없는(자의적 선택이지만) 부위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오겹살을 시킬 걸 그랬다. 그래도 맛있었다. 밑반찬의 질도 꽤 괜찮고.


"소윤아. 고기 맛있지? 어제 먹은 것도 맛있긴 했지만, 오늘은 더 맛있게 구워지는 고기야"


먹는 내내 자던 시윤이는 거의 다 먹었을 때쯤 깼다. 적절했다. 시윤이 먹을 고기도 미리 빼 놨었다. 바로 밥을 먹였다. 넙죽넙죽 잘 받아 먹었다. 시윤이의 적절한 수면과 기상 덕분에 흑돼지의 육질만큼이나 수준 높은 양질의 식사 시간이 가능했다.


오늘도 바닷가에 가야 했다. 소윤이가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춥고, 바람도 더 거셌지만 잠깐이라도 들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바다 타령]을 들어야 하니까. 이동 시간에 비해 바닷가에서 누리는 그 무엇(?)이 거의 없는 날씨라 매우 비효율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닷가에 가려니 다른 데 갈 수도 없고, 아무튼 좀 그랬다.


"소윤아. 우리 바닷가는 나중에 갈까? 어차피 오늘은 너무 추워서 모래 놀이도 못 할 것 같은데"

"그래도 한 번 가보자여. 가서 너무 추우면 안 하면 되잖아여"

"그래"


역시 먹히지 않는구나.


일찍 일어난 소윤이는 점심 먹고 나더니 졸음에 허덕였다. 하루 종일 커피를 못 마셨으니 일단 커피도 마셔야 했다. 바닷가로 가는 길에 있는, 역시나 아내가 검색으로 찾아낸 카페에 갔다. 소윤이는 졸려 가지고 약간의 짜증과 말 안 듣는 태도를 뒤섞어 내보냈다. 나와 끊임없는 신경전이 이어졌다. 오키나와 흑당 푸딩이 유명한 곳이라고 아내가 얘기해줬다. 아이스 라떼, 아이스 아메리카노, 흑당 푸딩이 나왔다. 엄마와 아빠의 커피에 자기가 빨대를 꼽겠다며 소윤이가 빨대를 집어갔다. 그러라고 했다.


아내의 아이스 라떼에 빨대를 꼽으려다가 그만, 소윤이가 컵을 툭 밀쳤고 아이스 라떼는 바닥으로 쏟아졌다. 근근이 붙잡고 있던 나의 이성의 끈도 놓치고 말았다. 사실 소윤이가 크게 잘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멋대로 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짜증이 났다. 소윤이를 나무랐다.


"소윤아. 이제 앞으로 빨대 꽂는 건 엄마, 아빠가 할 게. 알았어?"

"(삐죽삐죽)"

"니가 자꾸 말 안 듣고 짜증 내니까 이런 일이 생기잖아. 어?"

"(삐죽삐죽)"


소윤이의 작은 말과 행동에도 짜증을 잔뜩 담아 제재했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정상이 아니었다. 아내가 소윤이를 데리고 나갔다. 아마 차분히 얘기했겠지. 나를 데리고 나갈 수는 없으니까.


하긴. 5살, 3살 애들 데리고 카페에, 그것도 인스타 감성 충만한 그런 카페에 가면 결과는 뻔한 건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꼬박꼬박 카페에 가는 건지. 불나방 같이 미련한 짓을 하는 건지. 스스로를 곱씹어 봤다.


'돈 쓰고, 감정 쓰고 이게 뭐하는 짓이람'


아내가 소윤이를 데리고 나가서 얘기하는 동안 나도 앉아서 마음을 좀 가다듬었다. 오키나와 흑당 푸딩에는 라떼가 잔뜩 쏟아져서 흑당과 커피가 만나 달달한 맛을 내긴 했지만 원래의 맛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질러진 자리를 치워주시는 직원 분에게 사과하고, 직원분은 괜찮다며 받아주시고. 아내는 라떼를 한 잔 더 사고. 구운 마시멜로 두 개를 서비스로 받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시간이었다.


"여보. 천천히 마시고 나와. 난 애들 데리고 밖에 나가 있을게"


카페 앞에 자그마한 마당이 있어서 애들을 데리고 나갔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여유롭게(그 상황에 눈 앞에서만 애들이 사라진다고 해 봐야 얼마나 여유로울지 의문이지만) 커피를 마시고 나오길 바랐다. 물론 아내도 금방 나왔다.


"소윤아. 바닷가 꼭 가고 싶어?"

"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너무 추워서 진짜 잠깐만 있다 와야 할 것 같아"

"알았어여"


신혼 때 왔다가 매료되었던 금능해수욕장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아무도 없었다. 일단 왔으니 어디 한 번 놀아 봐라.


정말 잠깐 있었다. 시윤이는 자기가 먼저


"아추. 아추(추워)"


를 연발하며 의지를 상실했고, 소윤이도 가자는 말에 크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일어났다.


"여보. 오늘은 더 빨리 재우자"

"그래"


보상받고 싶었다.


작년에 가 봤던 수제 햄버거 가게에서 아내와 내가 저녁으로 먹을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샀다. 애들 재우고, 아무 걱정과 근심 없이 먹을 생각이었다. 애들은 그 옆, 국숫집에서 국수랑 만두를 먹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은근히 내공 있는 맛집 같았다. 언젠가 다음에 오게 된다면 여기서 꼭 먹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아니었다. 더 이상 애들이랑 겸상하기 싫었다. 1인 1 주문 부탁한다는 글이 붙어 있었다. 은근슬쩍 우리(어른)는 먹지 않고 애들만 먹일 거라는 걸 알리긴 했지만, 괜히 죄송하고 민망했다. 맛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내가 앉은자리에서 사장님이 너무 잘 보이는 곳이라 면발 하나도 먹지 않았다.


'사장님, 전 결백했어요. 정직했구요'


이번에는 강시윤이 안 먹고 난장을 피웠다. 하아, 정말 이것들이. 조금만 더 버티면 찾아올 해방의 시간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서둘러 씻기고 잘 준비를 마쳤다.


"여보. 오늘은 여보가 들어가서 좀 재워줘"

"알았어"


아내도 고된 하루였을 텐데,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했다. 둘 다 금방 잠들었고, 곧 아내도 다시 만났다.


"여보. 먹자"

"그래. 먹자"


비록 햄버거는 식고, 감자튀김은 눅눅해졌지만 세상에 둘 도 없는 꿀맛이었다. 어제처럼 TV를 보며 짜릿한 시간을 보냈다.


"여보. 내일이면 벌써 돌아가야 한다니"

"그러게. 시간 잘 가네"


결코 낭만으로만 가득 찬 여행도 아니고 오히려 장소만 제주로 옮긴, 경치와 공기가 좋은 곳에서 펼쳐지는 육아의 한 복판인 것 같아도, 돌아가려니 아쉬운 건 똑같네. 내일은 더 알차게 보내야지. 꼭. 화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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