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01(월)
아침에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 나가서 놀았다.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마당이었는데 애들이 뛰어 놀기에는 딱 좋았다. 숙소 사장님은 (내) 아빠나 장인어른 정도의 연배인 듯했는데, 시윤이가 "하부지. 하부지" 하면서 엄청 아양을 떨었다. 소윤이도 덩달아 친밀함을 표시하며, 누가 보면 진짜 할아버지인 것처럼 따라다녔다. 물론 사장님도 애들의 장난과 애교를 기분 좋게 받아주셨고.
"넌 몇 살이니?"
"다섯 살이여"
"어린이집 다녀?"
"아니여. 저는 홈스쿨 해여. 처치홈스쿨인데 이제 미광교회에서 아름다운빛 처치홈스쿨 해여. 엄마도 매일 같이 가는 거에여"
Too much talker, Too much information 의 선두주자 강소윤. 사장님은 소윤이의 언변에 놀라시며 껄껄 웃으셨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바닷가에서 못다 한 모래놀이를 여기서 원 없이 했다. 날씨도 어제보다 따뜻해졌다.
체크아웃 시간이 되었고, 짐을 정리해서 차에 탔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진짜 할아버지랑 헤어질 때처럼, 사장님과 끝까지 인사를 나눴다.
오며 가며 봤더니 숙소 근처에 벚꽃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축제는 어제까지였지만 축제가 끝났다고 꽃잎도 떨어지지는 않으니, 오늘은 거기를 가보기로 했다. 오히려 좋았다. 천막 점포들은 다 철수해서 한가하고, 사람도 없고. 벚꽃은 여전히 풍성하고. 실컷 사진을 찍었다. 날도 따뜻하고 활짝 핀 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늙고 있음을 실감했다. 내가 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다니.
바로 옆에는 자그마한 유채꽃 밭도 있었다. 사실 이번에 제주도에 오면서 유채꽃밭과 청보리밭을 잔뜩 기대하고 왔다. 아내가 유채꽃 명소라며 찾아놨던 곳은 막상 가보니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봄제주에 와서 유채꽃도 못 보고 가는 건가 하고 내심 아쉬웠는데, 마지막 날 선물을 받았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유채꽃에 무슨 특별한 애정이 있는가 싶지만, 사실 유채꽃과 개나리를 구분도 못할 만큼 꽃에 관한 지식은 전무했다.
"여보. 저기 유채꽃이다"
"저거 개나리잖아"
"저기저기. 저긴 유채꽃"
"저것도 개나리지"
"저건 개나린가?"
"저건 유채꽃"
아내는 유채꽃과 개나리도 구분 못하냐며 타박을 했다. 여보, 그거 구분 못하는 남자 꽤 많을 걸? 유채꽃이면 어떻고 개나리면 어떠냐. 유채꽃밭 앞에서도 사진을 많이 찍었다.
막 도착했을 때, 호두과자랑 땅콩과자 파는 아저씨가 보이길래 한 봉지를 샀었다. 소윤이, 시윤이한테 한 개씩 주면서 나눠 먹였다. 어느덧 바닥을 보였고, 땅콩 과자 세 개가 남았다. 어쩌다 보니 먼저 시윤이한테 한 개를 주고, 시윤이가 그걸 다 먹을 때쯤 남은 두 개를 소윤이랑 시윤이한테 나눠주게 됐다. 소윤이는 그게 못마땅했나 보다. 왜 시윤이는 두 개 주고, 자기는 한 개만 주냐며 뾰로통해졌다. 사실 소윤이가 훨씬 더 많이 먹었다. 거의 항상 그렇다. 시윤이 모르게 늘 소윤이한테 한 개라도 더 주게 되는 게 나의 본능이거늘, 이 녀석이 그런 것도 모르고.
차에 타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왜 자꾸 시윤이랑 비교하느냐, 비교하면 행복해질 수 없다, 니가 받은 한 개에 감사하고, 평소에 못 먹는 호두과자를 먹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왜 자꾸 다른 사람이랑 비교를 해서 행복을 못 누리고 감사할 줄 모르느냐, 자꾸 그러면 그나마 손에 쥔 것도 앞으로는 못 갖게 되는 거다.
나도 그렇게 못 살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자식들까지 그렇게 살면 안 되니까. 어려서부터 비교의 불행에 젖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다 보니 말이 길어졌고, 수준 이상의 설교를 늘어놨다.
차중설교를 마치고 점심 먹으러 갔다. 역시나 미리 정하지 않고 있다가, 아내가 급히 검색으로 찾은 곳이었다. 또 돈까스와 파스타였다. 여기도 평균 이상의 맛집이었다. 제주도까지 와서 하루가 멀다 하고 돈까스에 파스타에, 아쉬울 법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맛있었으니까. 자고 있던 시윤이가 유모차에 옮기자마자 깨는 바람에 결코 녹록지 않은 시간이긴 했지만, 아이들을 적당히 외면하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이번 여행에서 깨달았다. 한 끼 좀 덜 먹는다고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다.
밥을 먹고 마지막으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을 고민하다가 절물휴양림으로 정했다. 어제보다는 따뜻하다고 해도 여전히 쌀쌀한 데다가 월요일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보. 우리는 10분의 1 지점까지만 갔다가 돌아올지도 몰라"
"그래. 맞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훨씬 컸다. 작정을 했다. 전진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말자고. 그래도 거대한 나무 사이에 파묻히니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시 집으로 가면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생각하니, 괜히 더 아쉬웠다.
"소윤아. 얼른 맑은 공기 많이 마셔. 흐으으으음. 하아아아아"
"흐으으으으음. 하아아아아아"
우리의 예상대로 전진은 매우 더뎠다. 우리가 선택한 산책로의 초반부에 놀이터가 있었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거기서 한참 놀았다. 아니, 한참이 아니고 거기서만 놀다가 도로 내려왔다. 둘이 마음껏 뛰어다니고, 웃어대고. 이런 건 아파트 놀이터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울창한 숲 안에서, 제주의 공기를 마시는 건 분명히 다르다고 위안했다. 자기들 놀 거 다 놀더니 내려갈 때는 둘 다 안아달라고 하길래, 아내는 시윤이를 안고 난 소윤이 목마를 태웠다. 10분의 1이 아니라 20분의 1도 못 가고 내려왔지만,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소윤아. 이제 곧 집에 가야 한다니. 너무 아쉽다. 그치?"
"제주도에서 또 자고 싶다"
"집에는 안 가고 싶어?"
"집도 보고 싶고 김포공항도 보고 싶은데, 제주도에 있는 것도 좋아여"
이제 소윤이도 여행의 즐거움과 기쁨이 무엇인지, 여행이 끝났을 때의 아쉬움이 무엇인지 조금 아는 것 같다.
"소윤아. 그래도 재밌었어. 맑은 공기도 마시고, 놀이터에서도 놀고"
"맞아여"
이제 우리에게 선택의 폭은 없었다. 공항에 가기 전, 아주 조금의 시간만 허락되었다. 불나방 부부인 아내와 나는 또 카페를 찾아갔다. 아내가 카페 한 곳을 찾았고, 쏟아지는 졸음을 못 이겨 운전대를 아내에게 넘기면서까지 갔지만, 휴무였다. 근처의 카페를 검색해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한 곳을 찾아갔다. 뭐 그럭저럭 그냥 그런 카페였는데, 구분된 좌식 공간이 있어서 거기 앉았다. 덕분에 조금이라도 편하게, 아니 편하게는 아니지. 편하지는 않았지. 그래도 테이블에 앉는 것보다는 애들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없고 그래서 좀 낫지 않았나 싶다.
시윤이는 여기서 나한테 처음으로 짜증을 냈다. 바닥에 누워서 뒹구는 시윤이한테 장난친다고, 이마에 딱밤 때리듯이 발바닥을 때렸는데 아팠는지 날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빠아아아"
글로는 전달이 잘 안 되지만, 보통 어른들이 짜증을 담아 말하는 딱 그 억양이었다. 좋으면 웃거나, 싫으면 울거나였는데, 시윤이의 감정 표현이 점점 다채로워진다. 아직까지는 자기 누나보다는 덜 까탈스럽고, 덜 도도해서 다행이다. 소윤이한테는 이미 간지럼 태우는 장난은 못하고 있다. 간지럼은 정색으로 되돌아온다.
어느덧 공항으로 돌아가야 할, 여행을 끝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유모차도 반납하고, 카시트도 반납했다. 마지막으로 차도 반납했다. 몸과 마음이 여행의 설렘과 산뜻함으로 가득 찬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짙은 피곤함과 고단함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도 아쉬웠다.
공항으로 오는 길에, 제주도에서 유명하다는 김밥을 샀다. 비행기 타기 전 저녁으로 먹이고, 아내와 나도 먹을 생각이었다. 일반적인 김밥은 아니었다. 한 입 크기로 잘라 놓은 오니기리에 가까웠다. 밥은 전복내장으로 비비고, 속재료는 달달하고 푸딩 같은 촉감의 계란말이를 넣은 김밥이었다. 시윤이는 계란만 먹겠다고 했고, 소윤이는 계란은 빼고 달라고 했다. 이런 환상의 콤비를 보았나. 탑승 수속대 앞의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급히 먹었다. 곁들임으로 사 온 오징어무침이 제일 맛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덕분에 부담은 좀 덜했다. 우리 앞자리에도 애 셋과 함께한 부부가 있었는데, 나중에는 소윤이랑 시윤이가 그 집의 둘째와 막내랑 논다고(의자 뒤로 숨었다가 눈 마주치는 게 고작이지만) 서로 깔깔거렸다. 그 집도, 우리도 부모는 점점 지쳐갔다.
마침내 김포에 도착했고, 소윤이랑 시윤이는 차 안에서 잠들었다. 믿기지 않는구나. 5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다니. 작년과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행 다녀오면 출근하기가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 아니다. 출근할 직장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늙은 걸까.
"여보. 제주도 갔다 오니까 해외여행 가고 싶더라"
"헐. 나도 그랬는데"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