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15(토)
가영이 할머니, 그러니까 소윤이의 증조할머니를 뵈러 성남에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애들 아침도 거르고 준비했지만 목표했던 시간보다 30분 늦게 출발했다. 30분 늦게 출발했지만 내 몸은 소중하니까 카페인 충전이 필요했다. 평소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해야 하거나 자유를 얻어 나오긴 했는데 마땅히 갈 데도 없고 집에는 들어가기 싫을 때 아내나 나나 자주 가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 가지고 마시며 갈 참이었다. 도장 10개를 다 모은 쿠폰이 있었다. 나랑 애들은 차에서 기다리고 아내가 커피를 사러 갔는데 잠시 후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옛날 도장 3개가 섞여 있다고 쿠폰은 못 쓴대"
"진짜?"
"나는 그런 설명 못 들었다고 했더니 6개월 전부터 얘기한 거래"
"와. 대박이다. 됐다. 스벅에 가서 마시자"
이런 야박한 카페 같으니라고.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사 온 아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보 5,000원밖에 안 들었어"
"아, 잘 됐네"
대수롭지 않게 기계처럼 대답했다.
시윤이는 가는 내내 잤고 소윤이는 뒤에서 계속 쫑알거렸다. 아내의 증조할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사촌 동생이 한 집에서 살고 있었고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함께 갔다. 아리 라는 이름의 강아지도 한 마리 있었다. 소윤이는 아리를 발견하자마자 쫄아서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시윤이는
"멈머, 멈머"
이러면서 엄청난 관심을 보이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일정 거리 이상은 좁히지 않았다. 관심은 가지만 왠지 무서운 상태인 듯했다. 그러다 한 번 자신 있게 다가가서 얼굴을 만지려는데 아리가
"컹컹"
하고 짖었다.
(아리는 말티즈와 푸들의 믹스견이라고 했고 사이즈는 크지 않았다)
순간 시윤이는 놀람과 동시에 아리한테 뭐라 뭐라 알아먹지 못할 나름의 언어를 발사했는데 분명한 건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니, 짜증이 대부분이었다.
"아아아악!!알멍닐;ㅁㅇㄴ라1!!!"
그러더니 나한테 쪼르르 와서 안겼다. 그 후로는 계속 아리가 다가오면 나한테 피신하고, 아리가 좋아하는 뼈다귀 장난감을 던져주는 것도 날더러 하라며 내 손을 막 잡아끌었다. 누가 소윤이 동생 아니랄까 봐 겁도 많고 허세도 많고.
해물요리하는 곳에 가서 밥을 먹었는데 소윤이는 할머니(장모님) 옆에 앉겠다고 해서 장모님이 맡으셨고 시윤이는 내 옆에 앉혔다. 시윤이를 먹이면서 나도 같이 밥 먹는 건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대화까지 하는 건 불가능하다. 시윤이의 초반 기세는 빠르고 무섭기 때문에 내 숟가락을 들 틈은 없고 어느 정도 시윤이 배를 채우고 난 뒤에 부지런히 먹어야 한다. 한마디로 정신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상가 앞에 광장 같은 게 있어서 거기 앉아 있었다. 아, 난 계속 서 있었다. 옛날 여의도 광장(아내는 나랑 두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여의도 공원이 광장이었던 사실을 전혀 기억 하지 못한다.) 같은 느낌의 아주 널찍한 공간이라서 미니 전동카, 전동 킥보드 같은 걸 대여해주기도 하고 킥보드를 타는 애들도 많았다.
"아빠, 우리 킥보드 가지고 왔나?"
안 그래도 아내랑 킥보드를 트렁크에서 꺼내 올까 어쩔까 얘기하다가 귀찮아서 굳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는데 소윤이가 콕 집어서 물어보니 별 수 없었다. 차에 가서 킥보드를 가지고 왔다. 시윤이는 아내 사촌동생이 따라다니고 나는 소윤이랑 놀고. 나름 신나게 잘 놀았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넓은 광장이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가 막 쏟아지려고 해서 다시 집에 들어갔다. 아내 할머니는 아주 초기 단계의 치매 증상이 있으시다. [기억력 감퇴의 심화]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멀쩡하신데 홀로 일상생활은 불가능하신 정도다. 노인유치원(?)에 가셔서 점토로 만드신 조그마한 자동차랑 판다곰이 있었다. 소윤이가 어린이집에서 자기가 만들었다며 가지고 오던 것과 비슷한 모양, 수준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할머니랑 애들이랑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늘 그렇다. 8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고 다시 돌아갈 때 쯤이 되면, 네 살 소윤이랑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얼마만큼인지는 몰라도 소윤이는 할머니의 피를 나눠 가졌다. 오히려 나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고.
저녁에는 내 친구 아들 돌잔치가 있었다. 성남에서 신림동까지 가야 하니 꽤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출발했다. 소윤이 시윤이 모두 출발하자마자 잠들었다. 한 2시간 걸릴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는 덜 걸렸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근처에 있는 롯데백화점에 잠시 들렀다. 아무런 목적은 없었고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었다. 이것도 여의치 않은 게 이제 시윤이는 정말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자기가 내려가 본 곳, 내려갈 수 있는 곳
이라는 판단이 서면 유모차에 앉아 있다가도 내려가겠다고 온몸을 비틀며 용을 쓴다.
서둘러 백화점을 빠져나와 돌잔치 장소로 갔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돌잔치 분위기에 강소윤 강시윤을 앉혀 놓고 밥을 먹으려니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아내는 신림동에 올 때부터 영화가 보고 싶다면서
"오늘도 애들 맡기고 영화 볼까?"
라며 농담 섞인 제안을 했었다. 집에서 나올 때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당연히 애들 옷이나 우리 옷을 비롯한 1박 준비도 없었다. 이 때문에 아내는 고민을 거듭했다. 영화는 보고 싶지만 준비는 안 해왔고. 그래 봤자 옷인데 어머니(내 엄마)한테 좀 빨아달라고 하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던 차에 엄마가 먼저 애들 맡기고 놀다 오고 싶으면 그러라는 말과 함께 아예 자고 가도 된다는 연락을 해왔다. 아내는 결심했다.
"여보, 자고 가자"
식사를 모두 마치고 다른 친구네 부부 및 커플, 홀로 온 친구 아내와 함께 카페에 갔다. 애들을 맡기려고 엄마아빠 집으로 가려는데 연락이 왔다. 저녁 드시고 혹시나 해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슬렁슬렁 걸어오셨다는거다. Sensitive Action of the Year 가 아닐 수 없다. 엄마아빠 리스펙.
"소윤아, 잘 가, 잘 자고"
"여보, 자유다"
와.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하루 종일 어수선함 속에서 공존하던 두 녀석을 떼어 놓으니 그리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움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엄마 아빠한테 맡긴 것도, 먼저 연락을 주셨으니 그것도 부담 없었다. 마음 놓고 수다를 떨었다. 수다를 끝내고는 근처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봤다. 원래 [신과 함께 2]를 보려고 했는데 끝물이 지나도 한참 지났는지 가까운 곳에 맞는 시간이 없었다. [신과 함께 2] 만큼 보고 싶었던 [서치]를 보기로 했다. 조수석에 앉아 영화를 예매하려던 아내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왜?"
"아, 아까 써버렸네"
"뭘?"
" KT VIP 혜택. 한 달에 한 번인데 아까 스타벅스에서...어쩌구저쩌구"
샷 추가 인지 사이즈업인지 아무튼 하찮은 데다 VIP 혜택을 썼나 보다. 아까 커피 들고 차에 탈 때 환하게 웃던 아내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여보 5,000원 밖에 안 들었어"
어쨌든 영화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라자냐를 처음 먹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난생처음 먹어보는 음식인데 너무 맛있어서 잊히지 않는. 아무튼 그만큼 재밌었다는 말이다. 아내나 나나 엄청 피곤했지만 무사히 영화를 봤다. 요즘은 영화를 볼 때 잘 졸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소중한 시간이니까 (설교 시간에 미친 듯이 졸아대는 스스로를 또 반성해본다) 그렇게 피곤하면서도 그냥 들어가기 아쉬우니 간단히 야식도 좀 먹고 1시가 넘어서 집(신림동)에 들어갔다. 나도 나지만 아내도 놀 때는 참 체력이 세다. 평소에는 나 죽어요 하는 게 다반사면서 놀 때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의문스럽다. 엄마는 안 자고 있었고 좀 전에 빨래를 다 널었다고 했다. 시윤이는 좀 일찍 잤고 소윤이는 매우 늦게, 12시가 넘어서 잠들었다고 했다.
원래 집에서 나올 때는 돌잔치 끝나면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근처까지 갔는데 안 보고 돌아갔다고 하면 혹시나 서운해하실지도 모르니 엄마 아빠한테는 전화로 잘 말씀드리려고 했다. 애초 계획은 이랬다. 그랬는데 애들 맡기고 퍼질러 놀다 오다니. 지난주에도 오고, 이번 주에도 오고, 다음 주에도 또 와야 한다. 다행이다. 아내가 시댁을 그리 싫어하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