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부인

19.04.04(목)

by 어깨아빠

왠지 아내에게 자유시간을 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냥 그랬다. 여행 다녀와서 바로 처치홈스쿨 시작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는데, 여행 때문에 월요프리데이도 그냥 넘어가고.


"여보. 오늘 나갈래?"

"오늘? 아니야 할 거 많아"

"뭐?"

"내일 처치홈스쿨 준비"

"반찬?"

"반찬도 해야 하고"

"반찬은 뭐 할 건데?"

"찜닭 해야 돼"

"찜닭 어려운가?"

"여보는 잘하겠지"

"그럼 내가 할 게. 나갔다 와'

"봐서. 상황 봐서"


오늘은 괜히 튕기는 느낌은 아니었다. 실제로 할 일은 반찬 만드는 것 밖에 없었지만(물론 무적의 집안일, 빨래는 항시 대기 중이었다) 마음의 부담이 있는 듯했다. 집에서 보내는 것도 힘든데 여러 사람이 함께, 뭔가 맡아서, 시간표대로 착착착착 보내야 하는 처치홈스쿨이 주는 부담이랄까.


"난 밖에 나갈 거야"

"어디?"

"몰라. 일단 나가려고"


아주 이른 오후부터 애들을 데리고 밖에 나간다던 아내는 정말 오후 내내 밖에 있었다. 어느 특정한 장소를 간 것도 아니고,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애들이 놀만 한 곳이 있으면 잠시 머물렀다가, 또 움직이고. 시윤이는 언제 재웠냐고 물어봤더니 꽤 이른 시간에 재웠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왠지 아내의 마음은 이미 자유부인 쪽으로 기운 게 아닌가 싶었다.


집에 돌아와 과일을 먹는 아이들과 영상통화를 했는데, 소윤이는 요 며칠 밖에서 좀 많이 놀았다고 얼굴이 거뭇거뭇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벌써 까망소윤의 시절이 찾아오다니.


아내가 처치홈스쿨에서 쓸 밥솥을 중고로 샀다면서, 퇴근길에 들러서 받아오라고 했다. 탄현에 있는 어느 아파트였는데, 입구가 여러 개라 많이 헤맸다. 덕분에 1시간 30분이나 걸린 퇴근길에 짜증이 나려다가 버스와 지하철이 아닌 차를 타고 퇴근하는 게 어딘가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퇴근했더니 애들은 밥을 거의 다 먹었고, 찜닭(봉추찜닭, 안동찜닭을 상상하면 안 됨)도 모든 재료의 손질이 끝난 상태였다. 소윤이가 자랑스럽게 와서 얘기했다.


"아빠. 이 중(감자, 고구마, 당근)에 내가 자른 게 뭐게여?"

"음, 감자? 감자 같은데?"

"어? 어떻게 알았어여?"

"그냥. 아무거나 고른 거지"

"이거 내가 다 잘랐어여"


꽤 많은 양의 감자를 아주 반듯한 깍둑썰기를 해놨다.


"그거 진짜 다 소윤이가 한 거야"


확실히 결이 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좋아하고 잘하는 행위(?)가 비슷하다. 가위질, 칼질, 종이접기, 약통에 약 담기, 쌀통에 쌀 옮기기.


아내는 많이 지쳐 보였다.


"여보. 오늘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받을 게"


나의 제안을 받는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소윤이랑 시윤이를 씻겨서 내가 재우러 들어갔다.


"소윤아, 시윤아. 이제 엄마한테 인사해"

"엄마랑 자고 싶은데"

"응, 아니야. 오늘은 엄마가 나가셔야 해. 아까 얘기 다 했지?"

"그래도 엄마가 재워주고 나갔으면 좋겠는데"

"응, 억지 그만 부리고. 얼른 인사해"

"엄마, 안녕"


"시윤이도 엄마한테 인사해야지"

"안농"


소윤이는 누워서도 몇 번 더 울먹거렸다.


"아빠"

"응"

"엄마 보고 싶은데 참고 자는 거에여"

"그래. 고마워. 엄마 보고 싶지. 그래도 꾹 참고 자니까 고맙네"

"엄마 오면 내 옆에 누우라고 얘기해 주세여"

"그래. 알았어"


시윤이는 마치 자는 것처럼 숨소리를 내길래 조용히 불빛을 비춰봤더니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시윤아. 얼른 자. 안 그러면 아빠 나간다"

"아아아앙"


단 한 번의 엄포로 금방 잠들었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길래 아내가 안 끄고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내가 거실 바닥에 앉아서 (다 된) 빨래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보. 뭐해?"

"어. 빨래 널고 가려고"

"아, 그냥 나가지"

"그래도 너무 많아서"

"에이, 지금 나가서 뭐하고 오려고. 좀 일찍 나가지"

"왜, 잠깐이라도 나갔다 오면 좋지"

"이제 다 한 거야?"

"어. 거의 다 했어. 나머지는 여보에게 맡길 게"

"그래. 얼른 나가"


오늘의 외출은 자유를 향한 희망찬 발걸음이라기보다, 찐득찐득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는, 생존을 위한 외출이었다. 뭐 할 거냐고 물어봤더니 롯데몰에 가서 소윤이 옷이나 바꿀까 한다고 했다. 엄마의 사명이란.


아내가 카톡 사진을 보냈다. 콩나물 국밥과 티라미스.


[난 너무 배고파서 혼자 콩나물국밥 먹고 무스앤피스에 왔음]


롯데몰에서 소윤이 옷 바꾸고 구경 좀 하다가 그 근처 국밥집에서 먹었단다. 은근히 혼자 밥을 잘 먹는다. 연애할 때는 혼자 파스타도 먹고 그랬다. 신혼 때였나. 아무튼 아내는 자기가 고기 좋아했으면 고기도 혼자 잘 먹었을 거라고 했다.


아내는 그렇게 소소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오늘 같은 날은 자유부인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거창하다. 그냥 밤마실 정도. 짧은 시간이어도 아내는 충분히 회복돼서 복귀했다.


새삼 대단해, 여보. 하루 종일 애들이랑 지내는 것도 엄청난데, 거기에 처치홈스쿨이라니. 난 늘 그대의 위대한 하루하루를 존경하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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