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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Apr 23. 2019

친구 같은 아빠가 되려면

얼마 전 처음으로 딸이랑 둘이 영화를 봤다. 아내랑 연애할 때 가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곤 했는데, 자녀들이랑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80% 이상, 특히 아빠들은 작정하고 자는 듯했고. 난 그들과 다른 아빠가 되겠노라고 굳은 결심을 하고 갔다. 영화 중반부쯤부터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조금 더 지나서는 나도 같은 류의 인간이 되었다.


“아빠. 저 무당벌레는 어디 가는 거에여?”

“어. 글쎄. 친구 구해주러 가는 것 같은데. 보면 알겠지”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가뜩이나 대사가 없는 애니메이션이라 누가 누군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결국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영화는 끝났다. 차마 ‘졸아서 모르겠어’라고 얘기하지는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잘 아는 것처럼.


“소윤아. 영화 재미있었어?”

“음. 그냥 그랬어여”


딸도 엄청 재미있게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난생처음 먹어본 팝콘의 강렬한 맛에 매료되었다. 


“아빠. 다음에 영화관에 와서 팝콘 또 먹자여”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예쁜 머리핀도 하나 사줬다.


“우와. 소윤아 엄청 예쁘다. 완전 잘 어울려”

“아빠. 저 예뻐여? 잘 어울려여?”

“어. 짱이야. 짱”


바로 집에 갈까 하다가 마트에 들러서 구경하자는 딸의 말을 전격 수용했다. 마트의 모든 코너를 다 돌아보겠다는 집념을 가진 것처럼 꼼꼼히 돌아다니는 딸의 뒤를 착실하게 따라다녔다. 뭔가 질문을 하거나 반응을 요구할 때마다 한껏 응해주면서. 3,500원짜리 주먹밥을 사서 점심을 해결하고, 후식으로 초코송이와 우유를 건넸다.


딸에게 의도적으로,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이 시간은 [데이트]고 데이트는 [행복한 것]이라고 은근히 세뇌했다. 물론 딸도 나와의 시간을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더 증폭시키기 위해서 그랬다.


“소윤아. 아빠는 소윤이랑 둘이 데이트하니까 너무 좋다. 소윤이는?”

“아빠. 저도 그래여. 아빠랑 둘이 있으니까 엄청 행복해여. 다음에 또 오자여”


오늘 밤에는 모처럼 온 가족이 밤에 동네 산책을 나갔다. (보통 7시-8시면 재우는데, 오늘은 딸의 생일을 맞아 특별히 야간시간을 허용했다) 어느 상가 건물 꼭대기 층에 볼링장이 있었다.


“소윤아. 나중에 소윤이랑 시윤이가 중학생쯤 되면 저기 볼링장에 다 같이 갈 수 있을까? 그때도 소윤이가 아빠, 엄마랑 노는 걸 재미있어할까?”


어느 순간 딸이든 아들이든 자녀와 데면데면해지고 서먹서먹해졌다는 아빠들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자녀에게 사랑을 주고픈 의지가 충만한 아빠들이 그런 고백을 하는 것도 자주 들었다.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고, 요즘은 (너무 이른 듯하긴 하지만) 가끔 겁이 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대부분 엄마하고는 하루 종일 지지고 볶으니까, 아무리 어린이집, 학교를 보낸다고 해도 아빠에 비하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니까. 애증이든 애정이든 엄마랑은 끈끈해질 수밖에 없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노력. 노력해야 한다. 딸도 인간이고, 딸과의 관계도 인간관계다. 인간관계의 3요소(어느 전문가의 주장이 아닌, 순전히 나의 생각)인 돈, 시간, 마음을 후하게 써야 한다.


20년, 아니 20년도 길다. 요즘 애들은 빠르다니까. 한 15년을 가만히 있다가 뜬금없이 영화 보러 가자고 그러고, 데이트하러 가자고 그러면 누가 좋아할까. 15살에 손 잡고 다니고 싶으면 5살부터 손 잡고 데리고 다녀야 한다. 뭘 좋아하는지 연구도 하고, 공부도 하고, 실습도 해보고. 데이터를 모음과 동시에 나에게 적응시켜야 한다. 같이 낚시 가고 싶으면 지금부터 낚시터에 부지런히 데리고 다녀야 하고, 같이 야구장 가고 싶으면 바로 지금, 열심히 데리고 다녀야 한다. 물론 알고 있다. 뭇 남성들에게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배 같은 시간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 같은 아빠’를 꿈꾸고 있다면 그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나름대로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데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엄마다. 첫째고 둘째고 엄마 품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게 부지기수다. 내 품을 놓고는 그러는 일이 거의 없다. 얄팍한 배신감이 들 때도 있지만, 얼른 치워내고 또 노력한다. 아내에게 쏠려 있는 아이들의 애정 지분을 조금이라도 빼앗아 오기 위해서.


연골을 바쳐 말이 되어주고. 경추를 바쳐 목마도 되어주고. 욕할 때나 쓰던 가운데 손가락으로 똥덩어리도 긁어내고. 날 배 아파 낳아주신 우리 엄마, 아빠도 평생토록 거의 못 먹어본 나의 요리를 하루가 멀다 하고 해 주고.


친구 같은 아빠까지는 아니어도, 어른 중에는 제일 친한 사람이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작은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사랑은 가만히 있어도 느껴지지만, 표현하면 더 빨리, 더 많이 느껴진다는 걸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내일은 또 뭘로 우리 애들을 즐겁게 해 줄까 궁리해 본다.


덧붙임)

화도 잘 내고, 소리도 버럭버럭 잘 지르는 보통의 아빠인데, 너무 자기 미화가 된 것 같다. 덜 된 성품으로 좋은 아빠를 꿈꾸자니 자괴감에 시달릴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중이다.



* 이 글은 리드맘 공식 포스트(http://bitly.kr/pdkxz)에 포스팅 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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