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30(화)
처치홈스쿨을 마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어, 여보. 끝났어?"
"어"
"오늘은 좀 빨리 끝났네?"
"그런가?"
'애들은 잘했어?"
"그럼요, 소윤이가 아주 가끔씩 말을 안 들으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선생님들 말 들으면 바로바로 고쳤어요"
소윤이가 끼어들었다.
"아빠"
"응, 소윤아"
"제가 아주 쪼오끔 말을 안 듣긴 했는데, 그래도 고집부리거나 짜증 내지 않고 잘했어여"
"우와. 역시 소윤이 잘하네"
시윤이도 끼어들었다.
"아빠아"
"어, 시윤아"
"나두나두"
"그래. 시윤이도 잘했어요"
아내는 파주로 온다고 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오겠다며, 그동안 처갓댁에 있겠다고 했다.
내일 쉬는 날을 맞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기자촌 공원에 가기로 했다. 어느 정도의 공원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505호 사모님이 아내에게 너무 좋다며 추천했다. 기왕 가는 거 소풍 기분도 잔뜩 내려고 김밥도 싸기로 했다. 소윤이, 시윤이도 함께. 아내는 사무실에 오기 전, 김밥 재료를 다 샀다.
소윤이에게도 잔뜩 바람을 넣어 놨다. 소윤이는 이미 며칠 전부터 기대와 흥분에 사로잡혔다.
"소윤아. 내일 우리 김밥 싸서 소풍 가네?"
"아빠. 나 내일 7시부터 일어나서 김밥 쌀래여"
"그건 너무 빠른데?"
"아, 그래도여. 일어나자마자 김밥 쌀 거에여"
"엄마, 아빠는 그때 못 일어날 텐데"
"그럼 나 혼자 쌀 거에여"
오후에 약간의 비 예보가 있긴 했지만, 아주 조금 온다길래 개의치 않았다.
시윤이는 요즘 자꾸 남자아이 같은(?) 소리를 낸다. 문자로 표현하자면 "꾸에에엑" "께에에에엑" 이런 소리랄까. 아무튼 소윤이는 이런 소리를 만든 적도 별로 없거니와 낸다고 해도 남성스러움을 담지 못했을 거다. 덕분에 보잘것 없이 사소한 일이지만 신기하고 재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한참이나 괴성을 만들어 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려는데, 아내가 소고기를 샀다며(아마 장모님이 사주셨겠지만) 구워서 먹자고 했다. 소고기를 꺼내면서 장바구니에 있는 걸 하나씩 꺼내다가 평소에는 보기 힘든 뭔가를 발견했다.
"여보. 이건 뭐야?"
"어. 엄마가 청 사주셨어"
"아, 그래? 우리 집에서 썩어 나간 청이 많은데"
"뭐? 무슨 청이 썩어나갔다고 그래. 어이없네"
"왜 많이 있었지"
"어떤 거? 자몽청도 다 먹고 그랬는데"
"뭘 또 정색하고 그래"
"여보가 없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
아내가 발끈했다. 아내를 그렇게 만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내가 정색하며 화를 내니 나도 짜증이 났다.
'아니, 무슨 얘기만 하면 그래. 그냥 좀 넘어가면 되지'
머리로도 생각하고, 거의 비슷하게 입 밖으로도 냈다. 덕분에 우리의 저녁시간은 2차 세계대전 후의 팽팽한 냉전시대 같았다. 아이들은 이런 기류를 못 느낀 것 같았다.(다 느끼나?) 아내와는 필요한 대화만 주고받았다. 아내도 나도 아이들한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맛있는 소고기를 뭐 씹듯 씹었다. 뭐 심각한 주제가 아닌, 순간적인 감정의 충돌이라 식기도 금방 식었다.
애들 재우러 들어가는 아내에게 얘기했다.
"여보. 김밥 재료는 내가 준비해도 되니까, 힘들면 나올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 내일 놀러 가려면 안 아파야지"
"그래도 내가 해야지"
"아니야. 괜찮아. 내가 할 테니까, 너무 억지로 일어나지 마. 당근만 볶으면 돼?"
"당근 볶고, 계란 지단 만들고, 시금치는 살짝 데치고"
"알았어"
뭐지. 이건 마치 어제의 데자뷔?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소윤이는 잔뜩 신나서 잠들었다. 소풍 전 날의 기분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똑같나 보다.
운동하러 갈까 하다가 시간도 좀 늦고 귀찮아서 그냥 안 갔다. 대신 집에서 팔굽혀펴기를 했다. 팔굽혀펴기보다 야구 중계를 시청하는데 더 집중했지만.
운동을 마치고 김밥 재료 준비를 시작했다. 어제처럼 당근부터 채 썰어 볶기 시작했다. 그나마 채 썰어서 볶으니 어제보다는 좀 나았다. 그다음 햄도 살짝 굽고. 시금치는 뜨거운 물에 데쳐서 찬물로 헹구고. 깻잎도 썰고. 계란 지단도 만들었다. 그냥 다 감으로 했다. 어차피 우리 식구 먹을 거니까. 한 쟁반에 모아 놓으니, 나름 어렸을 때 엄마가 김밥 쌀 때와 비슷한 모습을 갖춘 듯했다. 육아를 하면 할수록 육아는 모르겠고, 요리 실력만 느는 것 같다. 더불어 엄마가 김밥 싸줬던 게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 새삼 느꼈다. 꼴랑 네 식구 먹을 김밥 재료 준비하는 건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은근히 체력도 소모했다.
어느 정도 재료 준비를 다 마쳤을 때 아내가 잠에서 깨서 나왔다.
"재료 준비는 다 했어"
"진짜?"
아내는 잠깐 앉아 있다가 양치만 하고 다시 들어갔다.
"여보. 쌀도 좀 씻어놔 줘"
"물 양은?"
"평소보다 좀 적게. 쌀은 평소보다 많이 하고"
"알았어"
아내가 들어가고 나서 쌀을 씻으려는데 도통 보이지 않았다. 보통 플라스틱 물병에 담아 싱크대 밑에 보관하는데, 모두 비어 있었다. 물병 하나에 뭔가 담겨 있긴 했지만 딱 봐도 쌀이 아니었다. 냉장고를 뒤지다 보니 '오분도미'가 있었다.
'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시험 보다가 틀린 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찍게 되는 그런 심정으로 오분도미를 씻었다. 그래도 어쨌든 모든 준비를 다 마치니 뿌듯했다.
얘들아, 아빠 이러다 대장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