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01(수)
날씨는 화창했다. 미세먼지 수치는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좋아도 나가고, 나빠도 나갈 건데 굳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소윤이는 어제의 공언대로 정말 엄청 일찍 일어났다. 아내와 나는 소윤이처럼 일찍은 아니어도, 적당한 시간에 잘 일어났다.
"아빠. 이제 김밥 만들자여"
"그래. 조금만 기다려 봐. 밥도 해야 하고. 준비를 좀 해야지"
"여보. 어제 쌀을 못 찾았어. 그래서 오분도미로 씻어놓긴 했는데. 아니지?"
"응. 아니지. 쌀 못 찾았구나"
아내가 다시 쌀을 씻고 불을 올렸다. 소윤이는 폭발하는 즐거움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몇 번이나 김밥은 언제 싸냐고 반복해서 물었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나고 온 가족이 김밥 싸기에 돌입했다.
아내와 나는 어제 시뮬레이션을 했다. 최악의 상황을. 그런 상황만은 막아보자는 의미로.
"강소윤. 그렇게 싸는 거 아니라니까. 장난만 치면 어떻게 해"
"소윤아. 그만하라고 했지. 너 그렇게 말 안 듣고 마음대로 할 거면 그만해"
"강소윤 손 떼. 손 떼고 방으로 들어와"
아내와 킥킥대며 상상했었다. 예전에 읽은 심리학 책이었는지 육아 서적이었는지, 아무튼 어떤 책에서도 그랬다. 자기가 어느 지점에서 화를 내는지 되짚어보고, 정확히 알고 있으면 분노를 막을 수 있다고.
덕분에 오늘은 평화롭고 즐거움이 가득한 가운데 김밥을 쌌다. 싸면서 조금씩 집어 먹는 것으로 아침도 대신했다. 소윤이는 잘 먹었는데, 시윤이는 영 먹지를 않았다. 그 와중에 단무지는 골라내고. 재료만 보면 엄청 많은 것 같았는데 막상 싸 놓으니 얼마 되지 않았다. 오래 걸리기도 하고.
김밥과 간식을 싸서 출발했다. 아침부터 고된 격무에 시달린 아내와 나는 일단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샀다. 기자촌 공원까지는 한 20분 정도 걸렸다. 시윤이는 낮잠 시간이라 잠들었다. 여기에 공원이 있나 싶은 곳에 공원이 있었다.
그야말로 동네 공원 정도의 크기였다. 대신 굉장히 높은 지대에 있어서 주변 동네가 한눈에 보이는 기가 막히는 전경이었고, 나무가 울창했다. 급하게 조성된 인공의 냄새도 거의 안 나면서, 방치된 듯 무질서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엄청나게 매력적이고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멀리서 찾아올 만큼의 공원은 또 아니라 사람도 없고. 살펴보니 북한산 둘레길하고도 닿아 있었다. 나중에 꼭 혼자 와서 걸어 보고 싶었다.
"소윤아. 여기 너무 좋지"
"네. 아빠"
"아빠는 진짜 완전 좋다. 소윤이도 얼른 공기를 들이마셔 봐. 우리 동네에서는 못 마시는 공기야"
돗자리를 깔고 집에서 싸 온 김밥을 먹는데 모든 게 완벽했다. 시윤이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시윤이까지 자니 평화로움은 극대화됐다. 소윤이도 즐거워 보였다.
"소윤아. 여기서 뭐 할 것도 별로 없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안 지루하지? 나무도 많고, 꽃도 많고, 바람도 불고 그러니까"
"맞아여.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역시 사람은 자연과 가까이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아, 과자랑 사이다도 좀 사 올 걸' 하는 생각도 했다. '역시 사람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연과 가까이 살아야 한다'가 내 욕망의 정확한 표현이겠지.
한쪽에는 조그마한 놀이터도 있었다. 시윤이가 깨기 전에 소윤이랑 먼저 갔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비하면 뭐 아무것도 없는 놀이터였다. 거기에 막상 혼자 놀려니 흥이 나지 않는지, 소윤이는 시찰 나온 간부처럼 서성였다. 다른 언니, 오빠들이 노는 걸 지켜보면서. 그나마 비눗방울 가지고 간 게 있어서 그걸로 좀 신나게 놀았다. 그러던 차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어. 여기 놀이터"
"시윤이 깼어. 누나하고 아빠를 엄청 찾아"
"아. 그래? 그럼 여보도 여기로 와. 아, 아니다. 짐이 많지. 그럼 소윤이랑 내가 갈 게"
"그래"
시윤이는 멍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소윤이와 나를 발견하자 검지 손가락을 뻗으며
"아빠아. 은나아"
를 외쳤다. 싸 온 김밥을 주긴 했는데 역시나 잘 먹지는 않았다. 포도랑 치즈는 엄청 잘 먹었다. 각종 식량을 어느 정도 먹어 치운 뒤 다 함께 놀이터에 갔다. 소윤이는 시윤이가 있으니 아까보다는 더 신나게 놀았다. 시윤이도 나름의 재미를 즐겼다. 오늘도 누나의 허락 아래 킥보드 동냥도 하고. 제대로 타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타고 싶은가 보다. 고민이 깊다. 어린이날 선물을 뭘 사줘야 할지. 소윤이는 후보군이 많다. 카시트도 있고, 킥보드도 있고. 시윤이는 킥보드도 카시트도 누나가 쓰던 거 물려받으면 되니까(새 걸 사 주기에는 너무 아까우니까) 마땅한 게 없다. 장난감은 더 이상 사주기 싫고. 묘안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놀고 나서 다시 차에 탔다. 바로 저녁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은평한옥마을에 가기로 했다. 아내랑 아이들은 가 본 적 있고, 나는 처음이었다. 차로 5분 거리였다. 엄청 유명하고 큰 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셔틀 차량을 타고 갈 수 있었다. 물론 걸어갈 수도 있었고, 멀지도 않았다. 구경도 할 겸 그냥 걷자고 했더니 소윤이는 아빠랑도 그 차를 한 번 타 봐야 한다며 셔틀버스를 타고 가자고 버텼다. 소윤이 뜻에 따르기로 하고 차를 기다리는데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소윤아. 거 봐. 그냥 걸어가고 올 때 타자니까"
소윤이도 약간 멋쩍은 눈치였다. 어쨌든 셔틀버스(카니발)가 도착했고, 한 2분 만에 카페에 도착했다. 소윤이는 그게 그렇게 신나나 보다.
"아빠. 저랑 같이 셔틀버스 처음 타니까 좋지여?"
"아빠. 이거 차는 엄청 넓어여"
빵이 유명하다는 카페였는데, 빵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엄청 많이 온 듯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앙버터만 곧 나온다고 했다. 집에서 가지고 온 다른 빵집의 크로와상을 먹었다. 집념의 빵순이, 아내는 기어코 앙버터를 하나 사 왔다. 여느 카페나 마찬가지겠지만 애들이랑 오래 앉아 있기는 힘들었다. 빵만 먹고 금방 일어났다.
돌아갈 때는 동네 구경을 하며 걸어 다녔다. 고급스러운 한옥과 단독 주택이 즐비했다.
"아빠. 우리도 이런 마당에서 살면 좋겠다여"
그래, 소윤아. 정말 얼마나 좋겠니. 니가 아빠 나이쯤 됐을 때는 부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닌, 그런 세상이길 간절히 바란다. 지금 당장은 아마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래도 (비록 자가가 아니어도) 살 집이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감사하니.
걷다 마주친 편의점에서 소풍 특별 서비스로 미리 약속한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소윤이는 바밤바를 골랐다. 엄청 잘 먹었다. 누구 닮아서인지 아이스크림은 종류를 가리지 않는구나. 아직 아이스크림의 문까지 허물지는 못한 시윤이에게는 소시지를 쥐어줬다. 사실 시윤이는 소시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만만하다는 이유로 자주 선택한다.
저녁 메뉴도 미리 정해놨다. 차를 타고 집에 가다 보면 원흥역 근처에 큰 감자탕 가게가 하나 있다. 길가 쪽 창으로 놀이방이 보인다. 소윤이가 아주 예전부터 얘기했다.
"엄마, 아빠. 우리 언제 저기 한 번 꼭 가자여"
"그래. 나중에 한 번 가자"
메뉴가 감자탕이다 보니(아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 보니) 말만 그렇게 하고 갈 생각은 거의 안 했다. 결국 소윤이는 이렇게 토로했다.
"아빠. 저기는 도대체 언제 가는 거에여. 맨날 간다고 얘기만 하고"
오늘을 날로 잡았다. 소윤이는 아마도 거대한 미지의 놀이터가 있지 않을까 상상했겠지.
"소윤아. 오늘 드디어 거기 가보네?"
"아빠. 신난다여. 빨리 가고 싶어여"
누가 보면 어디 놀이공원이라도 가는 줄 알겠네. 소윤이랑 시윤이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놀이방으로 달려갔다. 진짜 놀이공원처럼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소윤아. 놀다가도 한 번씩 시윤이 잘 있나 살펴보고 그래야 돼. 알았지?"
"네"
좀 지켜보다가 자리로 가려고 했는데, 소윤이는 시윤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불안해서 계속 같이 있었다. 시윤이는 아직 불안하다. 원래 감자탕을 먹을까 하다가 너무 많을 거 같아서 그냥 국밥 하나씩 시키기로 했다. 나는 뼈다귀 해장국, 아내는 장터 국밥. 애들 메뉴는 마땅히 없어서 만두랑 공깃밥을 시켰다. 중간중간 군것질을 많이 해서 어차피 잘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뼈다귀 해장국 같은 건 엄청 좋아하지만 자주 못 먹으니까, 엄청난 감격과 함께 먹어야 하는데(맛있어서라기 보다, 오랜만에 만난 뻔하디 뻔한 MSG 맛을 향한 반가움 때문이랄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일단 식사 시작 전부터 시윤이가, 화장실에 간 엄마와 누나를 따라가야겠다며 울어 젖혔다.
'그럴 거면, 얼른 기저귀를 떼던가. 기저귀를 차고 화장실에 가겠다는 건 방귀 뀌겠다고 화장실에 가는 것만큼이나 미련한 짓이라고. 아들아'
먹는 동안에도 시윤이는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감자탕 시켰으면 억울해서 혼날 뻔했다.
"여보. 감자탕 안 시키길 천만다행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애초에 애들 먹이는 건 포기했다. 아내는
"여보. 우리나 맛있게 먹고 가자"
라며 저녁 식사의 목표를 설정했다. 열심히, 감사히 안 먹는다고 꾸지람을 많이 듣기는 해도, 가만히 보면 소윤이는 최소한의 몫은 꼭 먹는다. 언제, 어디서든. 기특한 녀석. 오늘도 동생은 진작에 엉덩이를 떼고 돌아다닐 때도, 소윤이는 자리를 지키며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없는 반찬에도 열심히 숟가락질을 했다.
밥을 먹었으면 힘이 솟아야 하는데 아침부터 쉴 틈 없이 달린 덕분에 슬슬 지쳐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윤이는 막판에 똥까지 쌌다. (사실 오늘 두 번이나 똥을 쌌었다. 아주 극소량으로. 양이 아무리 적다한들, 냄새는 태산이로되 뒤처리는 언제나 괴로운 법이다)
"여보. 그냥 집에 가서 씻겨주자"
"그래"
서둘러 집으로 복귀했다. 시윤이는 바로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씻기려는데 완강히 거부했다.
"엄마가. 엄마가"
으으으으으으. 주먹이 운다.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넘겼다. 기왕 화장실에 들어간 거, 소윤이도 아내가 씻겼다. 그 사이 나는 축구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렇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처음에는 쉬는 날까지 축구하러 가겠다고 설치는 게 좀 죄의식이 느껴졌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은 근로자의 날 아니던가. 근로자를 위한 휴일에 평시 근로보다 더 고된 육아 근로를 했으니 당당해도 되겠다 싶었다. 어린이날도 아니고 말이야.(어린이날은 주일이고, 미리 표시해야 하는 주일 축구 참석/불참석 여부에 난 '불참'을 표했다. 그 정도 양심은 있다. 물론 불참을 표했다고 가면 안 되는 건 아니니까, 상황은 언제나 유동적일 수 있다. 여보. 들으라고 하는 말 아니야)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나와 동일한 지위의 가사근로자인 아내에게 두 녀석을 떠넘긴다는 찝찝함 정도. 그래도 모든 과정을 끝내고 재우기만 하면 되니까 괜찮겠지?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이다.
바닥에, 흙에 뒹군 두 녀석은 샤워를 시켰다. 아내가 샤워를 시켜서 내보내면 내가 옷을 입혔다. 소윤이 머리 말려주는 것이 나의 마지막 과업이었다.
"소윤아, 시윤아. 아빠 이제 간다"
"아빠. 가지마여"
"소윤아. 아빠 늦었어. 갔다 올 게"
얘야. 양심이 있으면 이제 좀 놓아줘라. 아빠도 좀 살자.
"여보. 갔다 올 게. 미안"
세상에. 5월 첫 밤의 공기가 이렇게나 달콤하다니. 이건 진짜 공기가 상쾌한 건지, 아님 오늘 하루가 그만큼 달콤쌉싸름했다는 건지. 엄청난 해방감과 함께 운동장으로 가서 땀을 뻘뻘 흘렸다.
[여보?]
아내는 답이 없었다. 잠든 건가 추측하며 집에 들어섰더니, 아내는 오늘도 통화 중이었다. 오늘은 승아. 아내에게는 Best Friend(이하 '베프'로 통칭)가 여럿 있다. 전통적 의미(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으며, 현재도 깊은 마음을 나누는 사이)의 베프, 학창 시절 베프(중학교 동창, 고등학교 동창 등이 여기에 속한다), (구)베프(예전에는 베프였으나 지금은 실질적인 베프 지위를 유지하기 힘든, 그러나 드문드문 만나는), 생활 베프(505호 사모님이 여기에 속한다. 얼핏 보면 피상적인 관계일 것 같은데 꽤 깊은 속 얘기를 나누니 가히 베프라 칭할 수 있다), 육아 베프, 울산 베프.
마지막 울산 베프, 울산 베프는 명칭만 다르지 사실 같은 집단(?)이다. 집단이라 하기에는 구성원이 적다. 한나, 승아. 오늘의 통화상대는 승아였다.
"오늘은 얼마나 통화한 거야?"
"한 시간 정도 했나?"
대충 생각하면 1년에 두세 번 보는 사이인데, 정밀하게 생각하면 가까이 사는 베프여도 1년에 두세 번 보기 힘든 경우도 많다. 거기에 옆에서 보기에 아내가 가장 깊고 날 것의 얘기를 꺼내는 상대는 울산/육아 베프다. 유소년(국민학생 시절) 친구 = 동네 친구 = 교회 친구 = 중/고등친구 = 성인 친구 = 육아 친구 = 불알 친구 = 베프 인 나에게는 신기하고 부러운 대목이다.
정말 정말 행복했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오늘 하루를 난 축구로, 아내는 속 깊은 수다로 위로받았다.
소윤아, 시윤아. 아빠는 진심으로 오늘 하루가 뭔가 즐겁고 행복했어. 하루 종일 어디 갇혀 있지 않고, 좋은 날씨를 누리며 바람을 맞아서 그렇기도 하고 너희랑 같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만 힘들기는 하다. 보통 일이 아니야. 하루 종일 너희를 데리고 어디를 다닌다는 게.
자, 다음 주 월요일도 휴일이네? 아빠는 또 머리를 굴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