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불가침영역

19.05.02(목)

by 어깨아빠

소윤이의 어린이날 선물은 주니어 카시트로 정했다. 원래는 내년 정도에 사 줄까 했는데, 소윤이가 너무 갖고 싶어 하고(제주도 여행 갔을 때 타 보더니 엄청 편했는지 계속 얘기했다) 어차피 필요한 거면 1년 빨리 사 줘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어제 배송이 됐다. 소윤이에게 약속했다.


"소윤아. 아빠가 내일 회사에 가서 설치해 놓을 게. 알았지?"


이게 뭐라고 소윤이는 함박웃음과 함께 잔뜩 기대를 머금었다. 낡디 낡은 소윤이의 카시트를 떼고 새 카시트를 장착했다. 시윤이가 지금 쓰고 있는 건 보험 가입하면서 받은 사은품인데, 싼 게 비지떡이라고 소윤이가 쓰던 거보다 미세하게 불편하고 조악하다. 그걸 떼고 소윤이가 쓰던 걸 줄 생각이다. 문제는 너무 헐었다. 소윤이가 막 쥐어뜯는 바람에 천도 다 벗겨지고. 아내는 천이라도 갈아 주자는데, 어차피 카시트는 안전을 위한 거고, 천 벗겨졌다고 그만큼 위험해지는 것도 아니니 그냥 써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카시트를 떼기 전까지는. 막상 떼서 보니 낡아도 너무 낡아서 괜히 시윤이한테 미안하다. 시윤아, 진짜 천이라도 바꿔 줄까?


카시트를 설치하긴 했는데, 오늘은 소윤이가 탈 일이 없었다. 퇴근하고 어디 가까운데라도 잠깐 다녀오자고 할까 생각하는 와중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좀 어때?"

"계속 비슷하지 뭐.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더니 답답하다"

"그럼 퇴근하고 커피라도 마시러 갈까?"

"그럴까?"

"아니. 소윤이 카시트도 태워줄 겸"

"아. 그렇구나. 그러자 그럼"

"아예 밥도 밖에서 먹던가"

"집에 쌀 씻어놓긴 했는데"

"너무 늦어질까 봐. 여보가 알아서 해"


아내와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요즘 놀이터는 아주 북적북적하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그 틈바구니에서 나름 잘 논다. 특히 시윤이는 대부분 자기보다 형이거나 누나인데,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자기 갈 길을 간다. 각종 놀이 기구를 오르고 내리는 것도 소윤이 이맘때보다 훨씬 잘한다. 그래도 혼자 두기에는 불안하다. 높은 데서 떨어질만한 요소가 많아서.


집 근처 분식집에서 주먹밥과 김밥을 샀다. 카페에 가서 먹일 생각이었다.


"소윤아. 우리 리스토어 가자"

"왜여?"

"엄마가 오늘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셔서. 소윤이 카시트 샀으니까 타기도 하고"


소윤이는 정말 좋은가 보다. 연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소윤아. 좋아? 편해?"

"네. 엄청 편해여"


편한 게 좋은 건지, 어른 벨트를 하는 게 좋은 건지. 아무튼 주니어 카시트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아직 시윤이가 이 정도까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게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왜 자기는 없냐고 서운하다고 했겠지?


카페에 가긴 했는데 실내에서 밥을 먹이는 게 조금 눈치가 보였다. 실외 자리로 나갔다. 해질녘인데도 공기가 많이 차지 않았다.


"소윤아. 이렇게 밖에서 먹으니까 또 소풍 온 것 같고 그러네?"

"맞아여. 아빠"


사소한 일에도 크게 의미 부여하는 게 습관이 되고 있다.


밥을 다 먹이고 난 뒤에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팝콘과 쑥떡으로 시윤이의 엉덩이를 붙여놨다. 어차피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돌아갈 때도 소윤이는 싱글벙글.


집에 가자마자 아주 신속하게 두 녀석을 차례로 씻겼다. 아내의 알레르기(로 의심되는)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밤이 되면 더 심해졌다. 아내는 매우 괴로워 보였다. 아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애들한테 툭 던졌다.


"오늘은 아빠랑 잘래?"


나도 이때다 싶어 거들었다.


"그래. 오늘은 아빠랑 자자"

"아. 싫어여. 엄마랑"

"소윤아. 오늘 엄마가 너무 힘드시대. 봐봐. 엄마 눈 빨개지고 코도 나오잖아"

"아. 그래도여. 엄마랑"

"오늘은 아빠랑 자자. 내일 엄마랑 자니까"

"싫어여"

"소윤아. 엄마, 아빠가 소윤이를 재워주는 것도 소윤이 배려해서 그러는 거야"

"왜여?"

"소윤이가 엄마랑 자고 싶어 하니까 엄마가 고생하는 거지. 그러니까 소윤이도 이럴 때는 엄마 배려해 줘야지. 안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소윤이랑 시윤이가 알아서 자게 할 수도 있어"


협박의 모양새를 가졌지만, 협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소윤이 정도 됐으면 알아서 혼자 자도록 훈련시킬 수도 있는데, 아내가 기꺼이 수고하는 거다. 배려받았으면 더 큰 배려로 보답하는 게 가장 완벽한 정답이고.


소윤이는 '흔쾌히'까지는 아니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소윤아. 고마워. 내일은 엄마가 재워 줄 게"


그렇다고 아내가 쉬는 건 아니었다. 내일 처치홈스쿨에 반찬으로 가지고 갈 무나물을 만들어야 했다.


소윤이는 금방 잠들었다. 거의 눕자마자. 시윤이는 자려고 폼 잡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매트리스 위로 올라갔다. 그다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이 가능했다. 역시나. 시윤이는 매트리스를 거쳐 방문으로 가더니 벌컥 문을 열었다.


"엄마. 엄마"

"시윤아. 들어와"

"아냐아. 엄마랑"

"엄마는 오늘 시윤이 못 재워줘"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터진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시윤이는 더 목청껏 울었다. 어쩔 수 없이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시윤이는 내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보통은 바로 울음을 그친다. 그리고 고분고분해진다.


"시윤아"

"데에"

"짜증 내지 말고 소리 지르지 말고 예쁘게 얘기해요"

"데에"

"시윤이 울지 않고 예쁘게 말할 거지?"

"데에"

"오늘은 엄마랑 못 자. 알았지?"

"이이이잉"

"아니야. 오늘은 아빠가 재워주기로 했잖아. 아빠랑 누워서 자"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다시 원점으로. 처음부터. 한참 울고 나서 다시 차분해졌다.


"시윤아"

"데에"

"오늘은 엄마가 못 재워줘. 알았지?"

"데에"

"나가서 엄마한테 인사하고 아빠랑 들어가서 자자?"

"데에. 안고. 안고"

"알았어. 엄마한테 안고 인사하라고 할 게"


엄마와 재회한 시윤이는 약속대로 인사만 나누고 품에서 떨어졌다. 다시 나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한 3분이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날더러 나가랜다.


"아빠. 나가. 나가"

"아빠 나가라고? 시윤이 혼자 잘 거야?"

"데에"

"알았어. 아빠 나갈게. 시윤이는 나오면 안 돼. 눈 감고 코 자"

"데에"


내가 나온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서 시윤이는 문을 열고 나왔다.


"시윤아. 누가 나오라고 했어"

"이이이이잉. 엄마랑"

"아빠가 안 된다고 했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시 원점으로. 처음부터.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아까보다 나의 인내가 많이 고갈된 상태였다는 거. 꾹 참고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물었다.


"시윤이 혼자 들어가서 잘 거야? 아빠랑 들어가서 잘 거야?"

"....."

"아빠랑 들어갈까?"

"아녀어"

"그럼 혼자 들어갈 거야?"

"데에"


문을 열어줬더니 정말 자기 혼자 들어가서 누웠다. 한 2-3분 뒤에 시윤이의 절규가 들렸다.


"아빠. 와. 아빠. 와여어어어"


다시 방에 들어가서 시윤이 옆에 누웠다. 이번에는 시윤이도 완전히 포기한 게 느껴졌다. 시윤아, 미안하다. 엄마가 노는 게 아니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막 잠들려고 하던 시윤이가 힘겹게 입을 뗐다.


"아빠"

"응"

"엄마. 빼. 엄마. 빼"

"그래. 알았어. 엄마 이따 오시면 시윤이 옆에 누우라고 할 게"

"데에"


결국 2시간이나 걸렸다. 시윤이가 잠든 걸 확인하고 나오는데 어찌나 화딱지가 나던지. 증기 기관차처럼 씩씩대며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분을 삭였다.


분이 식자, 또 야릇하게 안쓰러운 마음이 찾아왔다. 너무 울리고 재운 거 같아서 좀 미안하고. 그냥 놀게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보통은 그렇게 인사하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자던 시윤이었는데, 오늘은 밖에서 소리도 들리고 불빛도 새어 들어오니까 그랬나 보다.


얘들아, 아빠가 뭐 괴수도 아니고 그냥 아빠랑 자자고 하면 막 환호하고 박수 치고 그러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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