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08(수)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계속 생각하고,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큐티 말씀도 계속 보고, 되뇌고. 새삼 무게가 느껴졌다. 아이를 기른다는 건 단지 키와 몸무게가 잘 자라도록 그저 잘 먹이는 데서 끝나지 않으니까. 내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의 인생을 그리는 재료가 된다고 생각하니, (몰랐던 것도 아닌데) 문득 겁도 나고. 과연 잘 그려지고 있기는 한 건지, 잘못 그려온 건 지울 수 있을지. 나와 똑 닮은 성격과 행동을 볼 때 괜히 흐뭇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험하지 못한 책임과 부담이 떠밀려 온다. 모든 버그를 수정한 완전히 다른 '최신형 개정판'이었으면 좋겠는데, 소름 돋을 만큼 똑같은 복제품 같은 모습을 마주할 때의 허탈함이란. 하루 내내 요동치는 마음을 잡느라 힘을 많이 쏟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특별한 일 없이 집에 있다가, 시윤이 낮잠 시간 때쯤 나갔다. 유모차에 앉은 시윤이는 기대와는 다르게 한참을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시윤이를 재우기 위해 동네를 돌고 또 돌던 아내와 소윤이는 지쳐갔다.
"아, 엄마. 너무 힘들어여"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서 그랬는지, 시윤이는 아내와 소윤이를 꽤나 애 먹이고 잠들었다. 요즘은 시윤이랑 죽이 잘 맞아서 오히려 시윤이가 자면 싫어할 때도 종종 있지만, 그래도 시윤이가 낮잠 자는 시간은 소윤이에게 소중한 시간이다. 엄마랑 온전히 둘이 꽁냥거릴 수 있는 시간이니까. 아내와 아이들은 카페에 갔다. 소윤이는 엄마랑 과자도 먹고, 한글 공부도 했다.
아내도 나도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아니다. 연애할 때 가벼운 지갑 사정 덕분에 서울 시내의 여러 도서관에서 자주 만났는데, 난 그때 알아봤다.
'아, 가영이도 나와 같은 부류구나'
공부에 아예 담을 쌓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스카이캐슬'에 입성하기는 힘든 선천적 질병(?)이 있었다. '의자거부증후군 및 착석시수면증후군'이라는 어마 무시한. 간단히 말해서 잘 앉지도 않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돌아다닐뿐더러 앉으면 그렇게도 졸았다.
"가영아. 가서 밥이나 먹을까?"
"그래요. 오빠"
역시 우린 천생연분이었다. 천생연분의 첫 열매인 소윤이도 어쩜 우리를 그렇게 쏙 빼닮았는지. 뭐 이런 걸 닮은 건 아무렇지 않다. 공부는 공부일 뿐이니까. 그냥 재밌다.
아내가 찍은 동영상 속 소윤이는 그래도 꿋꿋하게 연필을 꽉 쥐고 자음을 눌러썼다. 그래, 소윤아. 그거야. 잘하든 못하든 참고 버틴 과정이 중요한 거지. 딸아, 응원한다. 너의 과정을.
시윤이도 깨고 나서 아내는 한살림에서 장 본 것들을 집에 갖다 놓고 다시 나갔다. 이번에는 놀이터. 내가 퇴근할 때까지도 밖에 있을지 모르니 주차하면 전화를 하라고 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쯤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우린 집]
소윤이와 시윤이는 목욕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가서 두 녀석에게 얼굴을 비췄다.
"아빠. 다녀오셨어여"
"그래. 소윤아. 안녕"
소윤이와 인사를 나누자, 옆에 있던 시윤이가 끼어들었다.
"아빠. 안넝. 안넝"
"그래. 시윤이 안녕"
"아빠. 모고. 모고"
"모고? 뭘 먹어?"
"보고 싶었다고"
"아. 보고 싶었다고?"
"네에"
하아. 강시윤의 이 치명적인 애교란.
갓난아기 때도 쓰던 욕조에 여전히 들어가 놀고 있는 걸 보면 커다란 욕조라도 사주고 싶지만, 그 또한 둘 데가 없다. 아내는 저녁 준비를 하고 난 잠시 소파에 앉아서 쉬었다. 물론 소윤이가 쉴 새 없이 불러대며 이것저것 해 달라고 하긴 했지만. 이제 소윤이, 시윤이만 욕실에 두고 나와도 크게 위험하지 않은 정도가 됐다. 사실, 그 좁은 욕조에서 물에 빠질 리는 없고 미끄러지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
둘이 잘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윤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 봤더니 시윤이의 머리와 얼굴이 젖어 있었다. 아마 물을 맞은 듯했다.
"소윤아. 무슨 일이야?"
"아니. 시윤이가"
"소윤아. 시윤이가 어떻게 했는지 말고, 소윤이가 어떻게 했는지부터 얘기해 줘"
"아니. 제가 시윤이가 가지고 있던 거, 이거(장난감)를 시윤이한테 가지고 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시윤이가 응이라고 해서 가지고 갔는데 시윤이가 우는 거에여"
"소윤아. 정말이야?"
"네"
"그런데 아빠는 소윤이가 시윤이한테 물어보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물어봤어여"
"소윤아. 아빠가 잘못하고 나서 거짓말하는 게 더 나쁜 거라고 했지? 솔직하게 얘기해야 돼. 진짜야?"
"아니여"
"그러면?"
"제가 시윤이한테 물을 뿌렸어여"
"장난감 가지고 있다가 뺏고 그런 일은 아예 없었고?"
"네"
"소윤아. 거짓말은 정말 나쁜 행동이야. 목욕 다 하고 나와서 아빠랑 다시 얘기하자?"
"네"
이건 또 새로운 국면의 거짓말이다. 그동안은 아주 소소한, 부분적인 거짓말이었다. 이렇게 판을 새로 짜는(?) 거짓말은 처음이다. 정말 매일매일 새롭구나. 저녁 준비가 끝나고 애들을 차례로 씻겨 식탁에 앉혔다. 그러고 보니 정신없어서 소윤이랑 다시 얘기하는 걸 깜빡했다.
애들이 목욕하는 사이, 옷을 갈아입고 대기 중이었다.
"여보. 이제 가"
"그래"
주방에 선 아내를 안아주며 얘기했다.
"여보. 다녀올 게. 화이팅"
"축구하는 날만 다정한 것 같네?"
"무슨"
"축구하러 나갈 때만 이러는 것 같은데?"
"아니야. 나가니까 그렇지"
축구할 때 유독 더 언행을 신경 쓴다고 하는 게 맞지.
"가서 스트레스 좀 풀고 와"
"그래"
소윤이도 거들었다.
"아빠 영화도 보고 와여"
축구하고 돌아오며 아내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냥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렸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어. 나 이제 10층 내렸어"
"아. 진짜"
"왜?"
"뭐 먹고 싶어서"
"뭐? 사 올 게"
"됐어. 들어와"
아내는 안방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보. 왜?"
"시윤이 두 시간 걸렸어"
"진짜? 대박이네"
"하아"
"뭐 먹으려고 그랬는데?"
"떡볶이나 먹을까 했는데 됐어"
"먹어. 사다 줄 게"
아내는 고민을 거듭하다 내가 10,000원을 지원하겠다는 말에 바로 주문을 했다. 두 시간 걸리긴 했어도 아내가 막 무너져 내린 건 아니었다. 야식으로 스트레스는 날리고 지방은 적립한 뒤, 함께 빨래를 걷고, 널고, 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