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3(월)
퇴근했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다. 느껴지는 분위기로 보아 잠깐 하람이네 놀러 갔거나, 장 보러 간 것 같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길래 바로 소파에 누웠다. 잠시 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어. 여보, 어디야?"
"아. 여기 앞에 놀이터. 한살림 갔다 온 건데 안 들어가려고 하네"
"아. 그렇군. 저녁 뭐 먹을 거야? 뭐 해 놓을까?"
"어, 그럼 냉동실에 있는 생선 한 마리만 좀 구워 줘"
"오키"
아내와 아이들은 통화를 끊고 나서도 바로 오지는 않았다. 소윤이는 흐느끼며 들어왔다. 대충 상황은 짐작이 갔다. 시윤이에게 물었다.
"시윤아. 누나 왜 울어?"
"음........."
요즘은 뭐 물어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추임새를 넣는다.
"시윤아. 누나 왜 우는 거야?"
"음....."
"왜 울어?"
"으나(누나)?"
"응. 누나 왜 우냐고"
"엄마가. 잉잉잉"
시윤이도 다 알고 있었다. 다만 표현을 못 할 뿐. 소윤이에게도 살짝 위로의 손길을 건넸으나 잡지 않길래 일단 뒀다. 소윤이의 울음과 징징거리는 소리가 목적을 상실한 채 기계적인 반복으로 바뀌었다.
"소윤아. 왜 울어? 이유가 있어서 우는 거면 일단 이유를 얘기하고, 아니면 이제 그만 울어. 그 소리 듣기가 힘들어"
요즘 열심히 애쓰고 있다.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하기. 얼굴 붉히지 않으면서 단호하게 말하기. 따뜻하지만 단호하게 말하기. 소윤이는 금방 울음을 그치고 정상인으로 돌아왔다.
내일 아내가 만들어 가야 하는 처치홈스쿨 반찬이 어묵볶음이라고 했다. 아내가 주방에서 어묵볶음 만들려고 폼을 잡길래 얘기했다.
"여보. 내가 할 게. 얼른 나가"
"이거 언제 하고 애들 재워. 내가 하고 나갈 게"
"여보는 그럼. 언제 하고 나가려고. 얼른 나가"
"알았어 그럼"
아내에게 들어갈 재료를 물어본 뒤 어묵볶음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까의 슬픈 기운이 조금 남아 있기도 하고, 진심으로 엄마가 나가는 게 싫기도 한 소윤이는 아내더러 나가지 말라며 덧없는 바람을 몇 차례 표현했다. 그러다 갑자기 태세를 전환했다.
"엄마. 빨리 나가여"
"엄마. 언제 나가여. 얼른 나가라니까여"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아내도 나도 무슨 꿍꿍이인가 궁금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아내가 나갈 때까지 계속 그랬다.
"소윤아. 그런데 왜 엄마 빨리 나가라고 한 거야?"
"아니. 나 밥 먹으려고 아기의자에 앉아서 안아주는 건 싫고, 서서 안고 나가라고"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다니. 자기가 아기의자에 먼저 앉으면 제대로 안을 수 없으니, 그전에 온전한(?) 배웅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소윤이의 바람대로 현관에 서서 뽀뽀와 포옹으로 아내를 보내줬다.
부지런히 하다 보니 애들 밥 차려 주기 전에 어묵볶음을 완성했다. 알게 모르게 주부 능력치가 상승하고 있다. 밥은 둘 다 잘 먹었다. 원래 간단히(세수, 손과 발) 씻기려고 했는데, 소윤이랑 대화하다가 이런 얘기가 나왔다.
"아빠. 아까 낮에 머리를 묶는데 모래가 후두두둑 떨어지는 거에여"
"진짜?"
"네. 그래서 원래 오늘 감으려고 했는데 낮에 너무 시간이 없어서 못 감았져"
"소윤아, 그럼 오늘 아빠랑 머리 감고 자자"
"아, 싫어여"
"모래 후두둑 떨어졌다며"
"내일 아침에 감을래여"
"내일 아침에는 엄마가 시간 없을 거야. 오늘 아빠랑 감자. 알았지?"
시윤이는 계획대로 간편하게, 소윤이는 머리 감기를 포함한 샤워를 감행했다. 내가 속이 다 시원했다.
"소윤이도 머리 감았더니 개운하지?"
"네"
사실 머리 감기는 건 하나도 안 어렵다. 말리는 게 문제지. 정말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딸이어서 행복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즐겁게 머리 말리기까지 마치고 자러 들어갔다. 엄마를 너무도 그리워하는 소윤이를 위해 아내와 통화를 시켜줬다.
"엄마. 나 아빠랑 머리도 감았어여"
"어, 정말? 잘했네"
"엄마는 어디에여?"
"어, 이제 운동하고 밥 먹으러 왔어"
"엄마, 이따 들어오면 내 옆에 누워여?"
"그럼, 당연하지. 소윤아 이제 얼른 자"
"엄마. 안녕"
"시윤이도 엄마랑 인사해"
"엄마"
"어, 시윤아. 시윤이도 잘 자"
"네. 엄마"
통화도 끝내고, 기도도 하고, 책도 읽고. 시윤이가 좀 걸리긴 했지만 양호한 수준이었다.
아내는 오늘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친구랑 규칙도 정하고 먹은 걸 공유하며, 동기부여를 하겠단다. 사실, 아내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는다. '많이'라는 수사는 나 정도는 먹어야 붙일 수 있는 거고. 밀가루 군것질만 끊어도 아마 좀 빠질 거다. 난 또 고민에 빠졌다. 아내가 흔들릴 때, 냉철한 조언자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따뜻한 토닥이가 되어야 하는지. 냉철한 조언자가 되면 돌연 삐진 아내와 마주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따뜻한 토닥이가 되면 지지부진한 아내의 다이어트를 영혼 없이 응원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할 테고. 아내는 그때그때 다르니까 상황에 맞게 변모하라고 하겠지.
어쨌든, 부디 성공하길 바란다. 내가 안 되면 아내라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