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6(목)
아내는 처치홈스쿨 교사(엄마)회의가 있어서 오늘도 모인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내가 자기는 하람이네 차 얻어 타고 가도 되니 좀 더 자고 차를 가지고 가도 된다고 했다. 어제 축구의 여파로 다리가 천근만근이라, 강력한 유혹을 느꼈지만 꾹 참고 아내에게 차를 내어줬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정확히는 소윤이에게.
"아빠"
"어. 소윤아"
"어디에여?"
"아빠. 사무실이지"
"뭐 하고 있어여?"
"일하고 있지"
"아빠, 우리는 리스토어에 왔어여"
"아, 그래? 누구랑"
"어. 그냥 우리 가족끼리여"
"아. 그렇구나. 점심은 뭐 먹었어?"
"어. 맛있는 거여"
"맛있는 거 뭐?"
"그냥 맛있는 거여"
"뭐 먹었어? 아빠한테도 말해 줘"
"싫어여. 그냥 비밀로 할래여"
시윤이는 모임이 끝나고 차에 탐과 동시에 잠들었고, 아내는 그래서 카페를 간 거다.
잠시 후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정확히 하자면, 역시 소윤이에게.
[아빠사랑해요]
[아빠도 사랑해요]
[정말정말 보고 싶어요]
[아빠도 소윤이 보고 싶어. 시윤이도]
아마 소윤이가 이렇게 보내라고 하면 아내가 그대로 옮겼을 거다. 나의 답장을 소윤이에게도 읽어줬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언젠가 소윤이가 자기 손가락으로 자판을 눌러 글씨를 입력할 수 있을 때도, 친구처럼 메시지를 주고받는 아빠와 딸 사이길 바라며, 성심성의껏 답변하고 있다. 어릴 때의 기억은 사라질지라도 습관은 남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내가 퇴근할 무렵에도 아내는 밖에 있다며 원당역쯤으로 데리러 가길 원하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했다.
집에 돌아가서는 늘 그렇듯 똑같다. 밥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지 않은 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날마다 새로운 육아 노동 덕분이기도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 말과 행동을 보여주는 시윤이 때문이기도 하다.(소윤이는 이제 새로운 걸 보여주기에는 너무 많은 걸 터득했다) 올여름이 지나기 전에 구사하는 언어의 80% 이상이 문장의 형태를 갖추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아, 참. 또 하나 달라진 건 똥이다.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시윤이는 오늘 똥쟁이었다. 요즘 자주 그러긴 하는데 똥을 한 번에 부왁 시원하게 싸지 않고, 찔끔찔끔 두세 번에 나눠 싼다. 앞의 두 번은 그야말로 찔끔 지려놓은 정도일 때도 많다. 난 깨달았다. 배설물의 냄새는 그 양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하긴 생각해 보면 동물원에서 코끼리 우리 근처에 갔을 때보다, 시윤이 기저귀 갈아줄 때 냄새가 더 지독하다. 아무튼, 시윤이는 요즘 똥을 싸면 굳이 냄새를 맡지 않아도 표정과 몸짓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뭔가 불편한 얼굴로 움직임이 현저히 둔화되었다면, 틀림없다. 아내 말로는, 똥을 싸면 불편한(찝찝한) 내색을 여과 없이 표현한단다. 한 마디로, 똥 쌌으니 얼른 닦아 달라는 거다. 오늘도 조금만 늦게 처리해 줘도 울음과 짜증을 섞어가며 닦아달라고 난리였다. 아내의 표현이 정확하다.
"이제 시윤이도 뭔가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게 많아졌어"
정말 그렇다. 내 생각에는 소윤이나 시윤이나 아는 건 비슷하다. 다만, 시윤이는 아직 그걸 누나만큼 표현을 못 할 뿐이다. 시윤아, 다 듣고 있지?
운동하러 가기 전, 아내에게 오늘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물어봤다. 아내는 내일 처치홈스쿨에 가져갈 반찬인 강된장을 만드는 것과 미술 활동 시간에 필요한 한지를 오려야 한다고 했다. 강된장은 내가 섣불리 나설 수 없는 반찬이었다. 이름부터가 뭔가 내공이 필요해 보이는 반찬이다. 한지 오리기도 마찬가지다. 아주 세부적으로 지시를 내려줘도 가위질이라면 영 자신 없었다. 평생. 오늘은 아내를 대신해 과업을 완수하기 어려워 보였다. 아내가 일찍 나와서 부지런히 하면 되겠지만 애들 재우다 보면 그게 마음처럼 안 되는 날이 더 많다. 게다가 오늘은 시윤이가 아주 늦게 낮잠을 잤다. 이른 밤잠은 진작에 물 건너갔다는 말이다.
"여보. 소윤이 잠들면 시윤이는 그냥 데리고 나와. 괜히 힘 빼지 말고"
"그러려고"
어차피 안 잘 거 괜히 시간 쓰는 것보다 차라리 데리고 나와서 혼자 놀게 하고, 그동안 할 일을 하는 게 나았다. 아내도 그러겠다고 했다. 운동하러 가면서 아내에게 꼭 그렇게 하라고 일렀다. (그럴 거면 차라리 니가 애들 재우고 아내는 일하면 되지 않느냐는 항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생각을 못 했다. 아니, 아마 그런 생각이 들었더라도 '애들이 엄마랑 자고 싶어 하니까'라며 핑계를 댔을 거다. 소윤이도, 시윤이도 이제 설득이 가능한데 말이다. 실미도에서 설경구 님이 그랬지. "비겁한 변명입니다아아아악")
운동한 지 40분쯤 지났을 때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뭐지. 설마 잠들었나'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강된장은 어떻게 하고, 한지 오리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러고 있는데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왜?]
[나왔어? 잠들었나 하고]
[아직]
[그냥 데리고 나오라니까]
[근데 어쩐 일로 거의 잠든 듯]
[여보도 잠들었나?]
[살짝?]
아내는 시윤이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살짝 잠들었다고 했지만, 아마 푹 잠들었을 거다. 아내가 "나 정말 잠들었어"라고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어쨌든 부지런히 할 일을 하라고 재촉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더니 아내는 열심히 야채를 썰고 있었다. 차마 아내의 수고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강된장은 내가 만들겠고, 한지 오리기를 거들었다. 가위질, 칼질, 풀질, 접기, 만들기 등의 공예와 관련된 일체의 행위에 조금도 재능이 없는지라 두려움과 떨림 속에 가위질을 시작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정상적인 결과물이 나왔다.
여러 명이 먹을 걸 하다 보니 야채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팔이 아프다는 아내를 대신해 야채를 볶았다. 자기 전에 해두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무척 귀찮아 지거나, 오늘의 수고가 헛되이 돌아가는 오늘 꼭 해야 하는 자잘한 일을 내게 전해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내는 자러 들어갔다.
소윤아, 시윤아. 아빠도 나름 열심히 숟가락 얹고 있다. 기억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