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20(월)
예보에서는 비가 온다더니 날씨가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았다'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을 정도의 기가 막힌 날씨였다. 마치 하와이 같았다. 일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어디든 놀러 가야만 하는 그런. 당연히 꾹 참았지만. 아내는 505호 사모님이랑 [북한산 제빵소]에 간다고 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런 날은 산과 바다 가까이 있는 게 무조건 이득이다.
나가기 전, 소윤이와 시윤이는 열심히 콩 껍질을 깠다. 아내 말로는 둘 다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임했단다.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산 제빵소에 간다던 아내가 원흥의 어느 카페라며 전화를 했다. 북한산 제빵소는 정기 휴무였다. 대안으로 찾은 카페도 훌륭했다. 2층에 야외 자리가 있는데 그냥 조그만 테라스나 옥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무에 둘러싸인 잔디밭이 있었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봐도 좋아 보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소윤이의 양 볼이, 곧 여름이라는 걸 말해줬다.
중간에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여보. 나는 6시에 떠날게요. 밥만 해놓고. 여보가 소고기 볶음밥 해서 먹여줘요]
[오킹]
집에 갔더니 하람이도 와 있었다. 방금 막 들어왔는지 화장실에 옹기종기 모여 손을 씻고 있었다. 내가 등장하자 하람이도, 소윤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빠(삼촌)의 등장 = 노는 시간 끝]이기 때문이겠지. 505호 사모님은 잠시 집에 들르느라 없었다.
이제 엄마 오실 거니까 집에 가자는 아내의 말에, 하람이는 살짝 저항했다. 아내는 그런 하람이를 보더니 내게 말했다.
"여보. 그러면 여보가 언니 올 동안 하람이도 좀 데리고 있을래요? 난 나가고"
"어? 그럴까?"
너무 갑작스러워서 수긍하는 듯 되어버렸지만, 이상한 제안이었다. 아니, 나야 상관없다고 해도 하람이가 어떻겠나. 이모야 하루가 멀다 하고 보는 사람이지만, 난 아니잖나. 하람이야 뭐 소윤이랑 노느라 정신없을 거라고 해도, 505호 사모님은 또 어떻겠나. 친한 동생한테야 잠깐 맡겨 놓는 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지만, 친한 동생의 '남편'은 또 이야기가 다르잖나. 아마, 6시에 나가야만 한다는 일념이 판단력을 흐린 것 같다. 다행히 505호 사모님이 바로 오셨다.
소윤이는 어느새 귀가를 거부하는 하람이를 설득하고 있었다.
"하람아. 우리 내일 또 만나니까 괜찮지?"
하람이가 가고 난 열심히 저녁 준비를 했다. 아내 말대로 소고기 볶음밥을 만들었고, 아내는 나갈 준비를 했다. 아 참. 시윤이는 낮잠을 생략했다. 아내는 낮에 통화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대해"
무지막지하게 빠른 육아 퇴근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아내가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시윤이가 뒤집어졌다.
"엄마. 안대(안 돼). 가면 안대"
이 말을 하면서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소윤이가 나서서 시윤이를 달랠 정도였다. 시윤이의 울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아내가 시윤이한테는 미리 충분히 설명을 못해줬다. 일종의 방심이랄까. 시윤이는 정말, 많이 서럽게 울었다. 아내가 떠나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현관 앞에 앉아서 목소리를 더 크게 냈다.
"아빠아아아아아. 엄마아아아아아. 안대애애애애애애"
졸린 것도 한몫했다. 겨우겨우 달래서 내 품에 안긴 했는데 밥은 먹지 않겠다며 끝내 마다했다. 그러고는 꾸벅꾸벅 졸았다. 밥 먹던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나도 엄마 보고 싶은데 참는 거에여"
"왜? 시윤이가 너무 울어서?"
"네"
기특한 녀석. 시윤이는 막 잠드는 걸 억지로 깨웠다.
"시윤아. 누나 밥 다 먹으면 씻고 자야지"
소윤이에게 평소보다 조금 서둘러서 밥 먹을 걸 부탁했다. 소윤이는 최선을 다했다. 시윤이는 씻겨서 기저귀 갈아주고, 누나 씻을 동안만 좀 누워 있으라고 거실에 눕혔다. 시윤이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소윤이의 취침 준비까지 서둘러 마친 후, 방에 들어가 시윤이를 눕히고(깨지 않고 자는 중) 소윤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기도를 했다.
엄마 보고 싶다느니 엄마 오면 자기 옆에 누워야 한다느니, 엄마 오면 꽃이불 덮으라고 얘기하라느니. 아내가 없을 때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쭉 듣고 나서 소윤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빠. 왜여?"
"그냥"
"왜여? 왜 쳐다봐여?"
"소윤아"
"네"
"소윤이도 아빠 좋아?"
"네. 좋지여"
"아빠도 소윤이 이렇게 좋은데 나중에 언젠가 못 보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하지"
"왜 못 봐여?"
"음, 그냥. 언젠가 아빠도 죽으니까. 그럼 소윤이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해?"
내심 뭔가 감동적인 장면, 이를테면 소윤이가 울먹이면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던가 이런 걸 기대했는데. 잠시 생각하던 소윤이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 천국에서 만나면 되잖아여"
"그러게. 그러면 되겠네"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내게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이 자녀는 없었어도, 육아에 통달하셨던 건 분명하다.
소윤이도 금방 잠들었다. 아내는 결혼하기 전 다니던 교회의 동생을 만나러 갔다. 난 아내가 옛 지인들을 만나는 게 좋다. 옛사람(?) 만나면서 옛날이야기도 하고, 또 요즘 사는 이야기도 하고. 멈추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것 같은 치열한 현실에서 그렇게나마 잠시 이탈하는 게 좋아 보인다. 혼자 카페 가 봐야 맨날 답 없는(혹은 답이 정해진) 가계부나 들여다보고, 애들 사진 보고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사람들 만나고 그러면 내가 다 좋다. 허구한 날 엄마, 여보 소리만 듣다가 언니, 가영아 소리 듣는 것도 좋고. 그래서 내가 나서서 누구라도 좀 만나라고 그러긴 하지만, 또 평일 밤에 만날 사람 찾기가 쉽지 않기도 하다.
"오늘도 재밌었어?"
"어. 얘기도 잘 하고 그랬어"
자려고 누워서 구글 포토를 켰더니 아내가 찍은 사진이 공유됐다. 맨날 애들 사진, 아내가 먹은 음식 사진(다이어트한다고 열심히 찍고 있다) 뿐이었는데, 아내의 독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남편보다 낫구만. 예쁜 얼굴 사진도 찍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