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23(목)
주 초반의 맑디 맑은 날씨는 꿈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다시 뿌연 세상이 됐다. 아내와 아이들은 하루 종일 집에서 보냈다. 아침, 점심 챙겨 먹이고 중간에 과일도 먹이고. 그것만으로도 참 고단한데 나머지 시간도 뭔가 하긴 해야 한다. 아내는 물감 놀이를 선택했다.(소윤이의 선택에 아내가 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감놀이와 한 세트로 움직이는 샤워까지. 처치홈스쿨에 가는 날은 오만가지를 준비하고 챙기느라 힘들고, 집에 있는 날은 또 그 나름대로 힘들고.
"내일도 뭐 준비할 거 많아?"
"아니. 그렇게 많지는 않아. 간식 좀 사고 예배 준비만 좀 하면 돼"
"그럼 오늘부터 헬스 할래?"
"오늘부터? 그럴까? 애들은?"
"내가 재우고"
아내는 스피커폰으로 통화 중이었고, 소윤이가 고스란히 통화 내용을 들었다.
"엄마. 안 돼여. 가면 안 돼여. 우리 재우고 가여"
"소윤아. 일단 이따 아빠랑 통화 끊고 얘기해 보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에 진입했더니 아내가 현관문을 열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여보. 대박이야"
"왜?"
"시윤이가 베란다에서 밖을 보고 있었거든?"
"어"
"갑자기 막 [아빠짜. 아빠짜(아빠 차). 아빠 아여(와요). 이러더라고"
"진짜? 대박일세.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시윤이가 부리나케 달려와서 안겼다.
"시윤아. 아빠 오는 거 봤어?"
"네에"
"어떻게 알았어?"
"이기. 이기(여기 - 베란다)"
"아. 여기서 아빠 차 오는 게 보였어?"
"네에. 아빠짜. 아여"
아내에게 소윤이랑은 어떻게 합의를 봤냐고 물었더니, 지하주차장까지 엄마를 데려다주고 와서 아빠랑 자는 걸로 타협을 봤다고 했다.(단지 내 헬스장이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 준 소윤이에게 고마웠다. 문제는 아내였다. 아침부터 미세한 두통과 천식, 몇 주째 이어지는 심한 비염으로 고통을 호소하더니, 퇴근했을 때는 모든 증세가 더 심해졌을뿐더러 체력도 바닥난 상황이었다.
"여보. 나 아무래도 오늘 운동은 못 갈 거 같아. 힘도 없고 할 것도 있고"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등록해"
시윤이가 낮잠을 늦게 자서 아내가 재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운동을 갔다 오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애들 재우는 건 그만큼의 시간과 그보다 더한 체력을 소진하기도 하니까.
"여보. 그럼 오늘은 그냥 애들 내가 재울 게"
"진짜?"
"어. 여보가 재우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내가 재우는 동안 여보는 얼른 할 일 하고 일찍 자"
"알았어"
소윤이한테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소윤이는 엄마하고 지하 주차장에서 작별하느냐, 방에 누워서 작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엄마가 밖에 있다는 걸 알면 자꾸 나가려고 하는 시윤이 때문에 엄마가 잠시 나가는 척할 수도 있으니 모르는 척하라고 했다. 소윤이는 작전의 일원으로 합류시켜도 될 만큼 컸다.
"여보. 아니면 나 진짜 잠깐 나갔다 올 게. 간식도 사야 하니까"
"그래. 그게 좋겠다"
시윤이는 잘 있다가 아내가 막 나가기 직전에 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뭔가 틀어져서 엄마를 부르며 징징거렸다. 그렇게 징징거리면서도 또 오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며 아내를 보내줬다.
소윤이는 바로 잠들었는데 시윤이가 역시 오래 걸렸다. 막 돌아다니고 그런 것도 아니고, 가만히 누워서 자려고 노력하긴 했다. 수면 총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정말 잠이 안 왔나 보다. 이리저리 뒤척이고, 손가락 빨고. 자려고 노력도 하고, 노력했더니 정말 졸려지기도 했지만, 잠은 오지 않는 뭐 그런 상황이었다. 시윤이가 애쓰고 있는 걸 알면서도 1시간 30분이 넘어가자 슬슬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마지막 강수를 띄웠다.
"시윤아. 시윤이 안 잘 거면 아빠 나갈게. 혼자 자"
하고 나왔다. 진짜 혼자 재울 생각도 없었거니와, 시윤이가 혼자 잘 리도 없었다. 압박용 움직임이었다.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시윤이가 따라 나오지 않았다. 좀 기다리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마, 막 잠들려고 할 때쯤이었나 보다. 막상 따라 나오지 않으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는 처치홈스쿨 일지도 쓰고, 간식도 사고 예배 준비도 하고 들어왔다. 씻고 일찍 잘 줄 알았던 아내는 계속 뭔가를 했다. 다 된 빨래도 정리하고, 설거지도 하고, 밥도 옮겨 담고. 괜히 화가 났다. '아프면 열 일 제쳐두고 일단 자라고 그렇게 말해도 내 말을 안 듣고 왜 저러고 있을까', '내가 이러라고 두 시간이나 애들 재우는 고생한 줄 아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헛 일한 거도 아니고 꼭 해야만 하는, 평소에도 보통 자기에게 떠넘겨지는 집안일을 한 거였다. 지금 안 하면 내일도 그대로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큰일들. 그걸 가지고 자꾸 뭐라고 하니 속상했고.
결국 아내와 나는 그 야밤에 말다툼을 했다. 마침 소윤이랑 시윤이가 깨서 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논쟁을 이어갔다. 물론 엄청 길지는 않았다. 소윤이가 서럽게 우는 바람에 오히려 도움이 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