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일어나는 새가 애들을 떠넘긴다

18.09.22(토)

by 어깨아빠

아내와 나의 계획은 애들이 눈 뜨자마자 신림동(아내의 시댁)으로 출발하는 거였다. 내일도 드럼을 쳐야 해서 아침 일찍 교회로 출발해야 하니 손주들을 볼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건 핑계고 그냥 한시라도 빨리 애들을 우리 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손으로 떠나보내고 싶었다. 혼자 살 때(고작 1년이지만)는 며칠 집을 비우게 되면 음식 쓰레기며 재활용 쓰레기를 그대로 두고 갔다.


'어차피 사람도 없는데 뭐 갔다 와서 치우면 되지'


결혼하고 나서 아내를 보니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다.


'며칠 집을 비우니 꼭 치우고 가야 한다'


가 아내의 마음이다. 더 바람직해 보이고 갔다 와서 날파리가 창궐하지 않는 걸 보면 결과도 더 좋은 것 같고.


아내와 함께하는 외박(?)의 첫 행동은 역시 음식 및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다. 나의 본성이 남아 있어 외면하고 떠나려 하면 아내는 꼭 두 손에 쓰레기를 들고 문을 나선다. 난 또 이게 싫다.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아무튼 놀러 나갈 때는 흥을 깨는 것 같고 바쁠 때는 이것 때문에 더 늦는 것 같고. 제발 외출하면서 쓰레기를 들고 나오지 말라는 사유로 몇 번 투닥거리기도 했는데 그럼 내가 미리미리 말끔하게 버려주면 되지만 또 그러지도 않는다. 오늘은 아내 준비하는 동안 내가 미리 가서 버리고 왔다. 서로 이렇게 적응해 가는 거다.


애들은 한복을 입혔다. 소윤이 시윤이 모두 아내의 목장 집사님들에게 빌린 한복이었다. 1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인데 사기는 아깝다. 기분만 내면 되지 뭐. 명절이라 그런 건지 일찍 출발해서 그런 건지 안 막히고 금방 도착했다.


'얘들아 안녕, 잘가라아하아하아'


나에게는 친가, 아내에게는 시댁에 입성과 동시에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소윤이 시윤이, 특히 소윤이도 자유를 얻었다. 어떤 불량한 식품이나 평소에 허락되지 않는 군것질 거리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비호 아래 자유롭게 섭취했다.


"추석이니까 특별히 허락해 주는 거야"


아내와 나는 씨알도 안 먹힐 엄포를 놓았다. 마냥 귀찮았다. 늘어지고만 싶었고 그렇게 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명절 연휴라는 타이틀이 주는 특유의 느낌이 있어서 그런가 유독 소파가 편안했다. 도착하자마자 아침 겸 점심을 대령받고(온 가족이) 나는 바로 소파로 직행. 아내도 바닥에 엉덩이 고정. 어떠한 필수 상황(배변, 기저귀 교체 등)이나 돌발 상황(부상 방지, 부상 후 처리 등)이 발생해도 아내와 나는 망부석이었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준다 해도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너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


엄마 아빠가 소윤이, 시윤이를 데리고 놀러 나갈 때도 아내와 나는 그대로 집에 남아서 휴식을 즐겼다. 저녁 먹기 전 소윤이 고모(내 동생)네도 왔다. 덕분에 밥 먹으러 가서도 소윤이는 할머니 손에 시윤이는 고모 손에 위탁했다. 저녁 먹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랑 마트에 간 엄마가 청포도처럼 생긴 머스캣인지 뭔지를 사 왔다. 시윤이가 신림동에 도착하자마자 한복도 안 벗고 식탁 의자에 앉더니 그 위에 놓인 머스캣을 허겁지겁 집어 먹는 모습을 본 엄마의 반응이었다. 전기 아깝다고 틈만 나면 불 끄고 멀티탭 끄고 와이파이도 끄고 보일러도 끄고 그러면서 꽤 비싼, 평소에는 손도 안 댈 그런 것들을 손주들을 위해 척척 사 오는 모습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저녁 먹고 나서 잠깐 친구들하고 만나기로 했다.


"여보, 갔다 올게"


시월드에 아내를 홀로 두고 외출을 감행하는 부도덕한 남편이지만 아내의 시댁 거부감은 대한민국 며느리들의 평균보다 한참 낮다고 믿고 있다. 그래 봐야 한 명은 이제 돌을 코 앞에 둔 아이를 아내에게 떠넘기고 온 육아인, 또 한 명은 출산이 100일도 안 남은 임산부를 홀로 두고 온 예비 육아인이라 오래 있지도 못 했다. 당구 한 게임치고 치킨 한 마리 먹고 그걸로 끝이었다. 애들은 나 나가고 난 뒤 금방 잠들었다. 원래 아내랑 영화라도 볼까 했었다.


"여보, 지금 뭐해?"

"어, 고스톱 쳐"

"고스톱?"

"응"

"여보 못 치잖아"

"그냥 배우면서 치고 있어"

"나올 거야? 지연이네한테는 물어봤어?"

"아직 안 물어봤는데"

"나올 거야? 어떻게 할래?"

"그럼 그냥 들어와"

"그래 알았어"


짧은 회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니 다들 거실에 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아빠 : 고수

엄마 : 고수

동생 : 하수

매제 : 중수

나 : 하수

아내 : 입문자


아내는 거의 짝 맞추기 수준이었고 근근이 옆 사람의 도움을 받아가며 야금야금 잃고 있었다. 내가 투입됐다. 역시 잃었다. 서로 따먹겠다고 혈안이 돼서 친 것도 아닌데 무려 1시 30분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쳤다. 아내는 약 5,000원 정도를 잃고 시아버지에게 10,000원을 개평으로 받았다. 남는 장사네.


내일이면 신림동을 떠나야 하지만 괜찮다. 우리의 연휴는 아직 끝이 아니니까 아내의 나의 육아 해방도 끝이 아니니까.


평화와 자유의 땅, 파주로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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