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23(주일)
애들의 아침 식사만 누가 준비해줘도 한결 여유롭고 시간이 꽤 확보된다는 당연한 얘기를 몸소 체험하는 아침이었다. 일찌감치 일어난 아이들은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맡았고 아내와 나도 평소보다는 일찍이었지만 애들보다는 한참 뒤에 일어났다.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짧은 명절 만남을 마무리했다.
"할머니, 우리 시간 되면 또 만나자여"
상대가 누구든 소윤이가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다. 오늘도 내가 드럼을 치는 동안 아내 홀로 두 아이를 맡아야 하는데 시윤이가 순순히 자 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꽤 힘들어진다. 소윤이에게 미리 제안했다
"소윤아. 오늘도 아빠 드럼 치러 가면 소윤이랑 시윤이가 엄마랑 있어야 되는데 만약에 시윤이가 계속 울면 엄마가 또 밖에 나가야 되잖아? 그럼 소윤이는 혼자 앉아 있어야 하고. 그러니까 오늘은 아예 아빠랑 같이 맨 앞에 아빠 드럼 치는 거 보이는 자리에 혼자 앉아 있을래?"
소윤이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것도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언제 이렇게 컸는지. 드럼 치러 올라가면서 소윤이를 맨 앞자리에 앉혀 놨다. 나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거나 눈으로 인사를 건네는 소윤이에게 잘 반응해주며 무사히 반주를 마쳤다. 소윤이는 전혀 초조한 기색 없이 잘 앉아 있었다. 오히려 내가 내려오니까 안심이 됐는지 조금 산만해지고 말을 안 들었다.
추석 연휴라 교회 식당도 쉬었다. 따로 애들 점심을 먹이지는 않았다. 아침을 워낙 든든히 먹기도 했고 장인어른 장모님을 만나서 밥을 먹을 예정이기도 했고. 예배 마치고 잠깐 집에 들렀다. 나랑 소윤이, 시윤이는 차에 남아 기다리고 아내만 올라가서 갔다 놓을 건 갔다 놓고 챙겨 올 건 챙겨 왔다. 장인어른 장모님과는 식당에서 바로 만나기로 했는데 연휴라 문 연 식당이 많지 않았다. 운정 카페거리의 어느 브런치 카페에서 만났다. 요즘 외식의 질은 전적으로 시윤이에게 달려 있다. 시윤이가 제법 오래 앉아서 먹어 준 덕분에 오늘 점심 식사도 인간다운 식사가 가능했다.
식사를 마치고 처갓댁에 입성하자마자 장인어른이 말씀하셨다.
"애들은 두고 너네끼리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라"
넙죽 받았다. 아내는 영화라도 볼까 했지만 나는 일기를 비롯해 밀려있는 여러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 카페에 가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내는 카페에 가면 할 게 없었다. 결국 각자 흩어지기로 했다. 아내는 니를 출판단지에 있는 어느 카페에 내려주고 떠났다. 뭘 할지는 정하지 않은 채로.
[미메시스]라고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카페인데 넓은 잔디 마당이 있는 데다가 날씨도 청량해서 머리 굴리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애들 데리고 온 집이 많았다. 소윤이가 막 걸음마 시작했을 때 우리도 와 본 적이 있다. 신나게 걸어 다니는 애들을 보며
'우리 애들도 데리고 오면 좋아하겠다'
는 생각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커피는 마시지도 못하고 애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아빠,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아이 쫓아다니느라 등짝, 가슴팍, 겨드랑이가 짙게 물든 아빠를 보니 '내가 승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자유하니까. 한 두시간 집중해서 쓰고 아내에게 연락했다.
"어디야?"
"나? 알라딘"
"정발산?"
"응"
"뭐했어?"
"그냥 책 사고 구경하고"
아내도 특별히 뭔가를 하지는 않고 그냥 여유를 충분히 즐겼나 보다. 롯데아울렛에 가 있을 테니 그리로 오라고 했다. 바람막이가 하나 필요해서 대강 구경했는데 참 신기한 게 괜찮네 싶은 건 그중 비싸다. 개발자가 누구길래 어쩜 이렇게 소비자의 눈을 잘 알고 있는지.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비쌌던 옷을 뒤로하고 떠날 즈음 아내에게 도착해다며 연락이 왔다.
"뭐 좀 봤어?"
"그냥, 뭐 별로 없더라"(내 돈이 없더라)
"여보. 저 쪽에 아디다스 할인하던데 거기도 봤어?"
"어디?"
"저 쪽에 행사장 있던데 가볼래?"
"그럴까"
가매장 펴서 매대에 옷 잔뜩 쌓아 놓고 파는 전형적인 바자회식 할인 매장이었다. 열심히 매대에 손을 넣고 옷을 뒤지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자기 일행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이런 데서 괜찮은 거 찾는 건...."
뒷 말은 듣지 못했지만 예상할 수 있었다. 한참을 살펴보고 뒤적거렸지만 결국 마음에 드는 건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소윤이 시윤이 신발을 한 켤레씩 샀다. 시윤이에게 아주 잘 어울릴만한 예쁜 신발을 발견해서 사려고 했는데 시윤이 것만 사다 주자니 소윤이가 서운해할까 봐 약간 억지스럽게 가장 싼 것 중에 그나마 괜찮은 걸로 소윤이 것도 골랐다. 그래도 소윤이가 좋아하는 핑크색이 들어가 있어서 소윤이도 마음에 들어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 소윤이에게 보여주니 엄청 좋아했다. 막상 신겨 놓고 보니 그냥 눈으로 볼 때보다 더 낫기도 하고. 우리 엄마는 아내와 나에게 자주 얘기한다. 다만 얼마씩이라도 저금하라고.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나는 마음으로 엄마에게 얘기한다.
'엄마, 쓰는 재미가 더 큰걸요'
부자 되긴 글렀나 보다. 저녁에는 장모님이 제주산 흑돼지 수육과 김치찜을 해주셨다. 수육의 양이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거의 내가 다 먹었다. 점심이 많이 늦어서 분명히 배가 안 고팠는데 도대체 어디로 다 들어간 걸까. 다른 반찬도 엄청 많았는데 손댈 생각도 없이 씻은 묵은지 - 수육 - 마늘 - 쌈장의 과정을 산업혁명 시대 제조 공장의 노동자처럼 정확히 반복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외가든 친가든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만 오면 식사 예절 따위 안중에도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비호 아래 돌아다니고 장난치고 하며 물 만난 고기처럼 악행을 일삼지만 아내도 나도 통제할 의지는 진작에 상실한다. 나는 수육을 아내는 김치찜을 정신없이 먹었다. 배 불러서 밥은 안 먹고 고기만 조금 먹겠다고 했는데 이럴 거면 차라리 밥을 먹는 게 나을 정도로 끊임없이 수육을 섭취한 뒤 식사를 마쳤다. 아내랑 나만 나가서 커피를 사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소윤이도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시윤이는 오지 말고 나만 갈 거야"
라고 말하는 걸로 봐서 시윤이 없는 시간을 원했던 듯하다. 어쩌다 보니 장모님 장인어른 시윤이까지 함께 가기로 했고 소윤이는 반대했다.
"싫어, 싫어 시윤이는 혼자 집에 있으라고 해"
"소윤아, 그러다 나쁜 사람이 와서 시윤이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해"
"그래도 싫어, 같이 가는 거 싫어"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지만 소윤이 입장에서는 나름 이유가 있는 이런 떼의 경우 적절한 절충안이 필요하다. 끝없는 설득에 소윤이는 아내와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할아버지가 시윤이 데리고 멀리 떨어져서 와여"
할아버지는 무슨 죄니. 어제도 양 손을 잡고 공중으로 띄워주는 일명 [하나 둘 셋] 놀이를 할 때만 고모부 손을 잡고 자기 필요가 다 채워지면 가차 없이 고모부 손을 내팽개쳤다. 할아버지한테 이것저것 요구하고 같이 놀 땐 언제고 시윤이 처리반이라니. 그래도 막상 같이 나가면 까맣게 잊고 아무렇지 않긴 하다. 짧은 밤마실을 마치고 돌아와서 취침 준비에 돌입했다. 할머니랑 자겠다는 소윤이 덕분에 함께 들어가셨던 장모님이 가장 먼저 탈출하셨다. 아직 시윤이가 자지 않는다는 장모님의 증언에 따라 십여분 더 기다렸는데 조용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시윤이는 여전히 뒤척이고 있었다. 아내는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는 몽롱한 상태였다. 함께 누워서 시윤이 재우기에 동참했다. 졸리긴 졸린데 늦은 오후에 낮잠을 한 번 자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듯했다. 끝없는 미간 쓸기와 곤히 자는 척 끝에 겨우 시윤이를 재우고 나왔다. 결과적으로 시윤이 재우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아내는 TV로 영화를 보자며 [신과 함께 2]를 제안했다. 이제 영화관에서 보기는 늦은 것 같고 집에서나 봐야 하는데 노트북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깝고 최소한 커다란 TV 화면으로는 봐야 하지 않겠냐며 부모님들 집에 갔을 때 보기 위해 미뤄두고 있었다. 오늘이 그 기회였다. 밀린 글들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여보, 오늘은 다른 거 여보가 보고 싶은 거 볼래?"
아내는 [허스토리]를 선택했다. 그동안 나는 방에 들어가서 밀린 일기를 썼다. 노트북 충전기를 집에 두고 와서서 배터리가 방전되는 바람에 많이 쓰지는 못했고 딱 영화 한 편의 시간만큼이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껌딱지 모드였다. 시윤이가 아니라 아내랑 내가. 소파 껌딱지 모드. 우리는 거들뿐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다 했다. 말만 보조 양육자지 정작 주 양육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장인어른과 장모님만 바쁘셨다. 주객전도가 따로 없군. 누워서 아내랑 내일의 일정을 의논했다.
"여보, 내일은 어디 가지?"
"그러게"
딱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고 보조 양육자 없이 두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시달릴 아내와 나의 모습만 자꾸 떠올랐다. 벌써 이렇게 끝이라니. 연휴는 아직 더 남았지만 연휴다운 연휴는 오늘로 끝인 이 느낌적인 느낌.
뭘 해야 재미도 있으면서 힘들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을까. 그런 건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