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가족과 함께

18.09.24(월)

by 어깨아빠

소윤이의 나에 대한 애정도가 좀 많이 높아진 상태다. 며칠 동안 하루 종일 붙어 있기도 했거니와 짜증내고 화내는 건 물론이고 별로 혼내지도 않은 덕분에 부쩍 애교와 붙임이 많아졌다. 애석하지만 아침에도.


"아빠, 이제 그만 일어나여"


라고 말하며 애정이 듬뿍 담긴 뽀뽀 세례를 받는 기분이야 당연히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더 자고 싶은 본능은 어쩔 수 없다.


"소윤아, 아빠 조금만 더 자고"


라는 나의 애원에 짜증 하나 없이 애교와 투정으로 일관하는 소윤이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기상했다. 아내도 곧이어 일어났다. 소윤이 시윤이도 단 며칠 사이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삶에 완전히 적응한 듯 엄마 아빠 없이도 내내 즐거운 기분을 유지했다. 애들 입장에서는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잔소리 꾼 두 명이 사라지고 무한 수용자 두 명이 나타난 셈이니. 평소 같았으면 철두철미하게 지켰을 시윤이의 낮잠 시간이지만 아내는 수많은 주 양육자 수준의 보조 양육자가 공존하는 환경이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시윤이는 낮잠 시간이 한참 지나자 이유 없는 떼를 부리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재우기를 시도했고 10분도 채 안 걸렸다. 2호 clear. 소윤이를 재우기에는 이른 시간이기도 했고 아내랑 앞으로 소윤이 낮잠은 굳이 재우지 않기로 얘기를 마쳤지만 이때 재우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오후에 차에서 잠들 것이고 그럼 아내랑 나의 육아 퇴근이 매우 늦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반 억지로 소윤이를 눕혔다.


"소윤아. 지금 낮잠 자야 돼. 안 그러면 우리 지금 집에 가야 돼. 소윤이가 지금 낮잠을 자야 자고 일어나서 조금 더 놀고 갈 수 있는 거야"

"싫어 낮잠 자기 싫어"

"아. 그러면 지금 집에 가야겠다"

"아니야 아니야 지금 안 가"

"그래. 그러면 지금 자야 한다니까. 그래야 자고 일어나서도 조금 놀다 간다니까"

"지금 잘게여"

"소윤아 그런데 지금 잔다고 하고 들어가서 딴짓하고 장난하고 그러면 안 돼. 들어가면 바로 눈 감고 자야 돼. 안 그러면 집에 갈 거야"

"바로 잘 거예여"


내가 생각해도 억지가 억지가 세상에 이런 억지가 없었지만 조기 퇴근을 위해서, 아니 너무 늦은 퇴근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소윤이는 아내와 함께 시윤이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아내는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나왔다


"자?"

"어. 금방 자네"


두 녀석이 동시에 잠든 평화로운 오후. 아내와 나는 둘 다 잠들어 있으니 덜 죄송스럽다는 해괴망측한 이유로 또 외출을 감행했다. 물론 집 근처 카페로 잠깐 바람 쐬는 정도였지만.


나가면서 아내에게 급 제안을 했다.


"여보, 오늘 하루 더 자고 싶으면 하루 더 자고 가도 돼"

"엥? 갑자기? 됐어"

"왜. 하루 더 자고 싶으면 자"

"갑자기 왜? 오늘은 집에 가야지"

"싫으면 됐고. 괜히 내 눈치 보느라 그럴까 봐"

"아니야. 오늘은 집에 가야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치킨을 대하는 나처럼.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손주들과의 시간이 아쉬울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위해. 또 육아 해방이라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은 아내를 위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지만 아내는 일단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내랑 둘이 풍성한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둘 다 잠에서 깨 있었다. 소윤이 기분이 별로였다.


"소윤아, 기분이 왜 안 좋아?"

"........"

"말 안 하고 싶어?"

"........."

"아빠가 억지로 재워서 기분이 안 좋아?"

".... 응"


아우. 섬세한 딸 같으니라고. 감정선의 연장이 참 길기도 길다


"소윤아, 대신 더 놀고 가면 되잖아"


이런 건 괜한 투정이라 굳이 상대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시간이 상대하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애들은 잠에서 깼는데 아내랑 나는 잠이 쏟아졌다. 차라리 방에 들어가서 단 몇 분이라도 누워서 자다 나왔으면 될 걸 아내도 나도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졸았다고 하기에는 꽤 푹 잤다. 난 나름 피로가 풀릴 정도였으니 제법 달콤한 시간이었다.


원래 어제 파주 오는 길에 애들 한복을 입혀 올 생각이었는데 애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오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해서 오후에 한복을 입히기로 했다. 한복으로 환복 후 집(처갓댁) 근처 공원에 바람 쐬러 나갔다. 공원으로 가는 길에 아내가 장모님께 얘기하는 걸 들었다.


"엄마. 우리 오늘도 자고 갈까?"


못 들은 척했다. 장모님의 대답이야 당연히 OK 였다. 아마 악마의 유혹처럼 느끼시지 않을까. 너무 좋지만, 너무 힘든. 날이 갈수록 우리 부모님이든 처가 부모님이든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굉장히 피곤해하시는 게 보이니까 애들 맡기기가 죄송스럽고 부담스럽지만 또 뭐 한 번씩 그렇게 해야 우리도 사니까. 오늘은 아예 맡기고 떠나는 것도 아니고.


"여보. 내가 엄마한테 말했어. 자고 간다고"

"여보 싫다며. 뭘 자고 가. 오늘 가야지"

"아이. 뭐야"

"왜. 싫다며. 나 오늘 갈 건데?"


아내는 놀려먹는 재미가 있다. 이걸로 한참을 우려먹었다.


"아, 진짜 그만 하라고오오오"


아내의 특성상 급우울, 급마음상함으로 변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선을 잘 지켜야 한다. 본디 나의 성향은 끝을 볼 때까지 장난치는 것이지만 언제 급변할지 모르는 아내를 위해 적당히 장난치고 멈췄다. 공원에서 꽤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어제 남은 돼지 수육과 김치찜을 비롯한 푸짐한 밑반찬이 있었음에도 장모님은 제대로 된 식사가 없었다며 아쉬워하셨다. (점심에는 아내의 뜻에 따라 라면을 끓여 먹었다) 저녁때 거나한 외식 및 만찬을 원하셨지만 다들 점심이 늦어서 배가 불렀다. (연휴 내내 배가 꺼질 틈이 없었다. 배고프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다음 끼니를 맞이하는 느낌이랄까) 거기에 추석 당일이라 영업하는 식당이 없기도 했다. 결국 분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떡볶이

순대

튀김

어묵


"먹은 것 같지도 않게 먹었네"


저녁 식사를 향한 장모님의 한 줄 평.


제주산 흑돼지 수육

김치찜

잡채


를 비롯한 갖가지 반찬들을 이미 수도 없이 먹었다는 걸 다시 밝혀둔다.


처갓댁에서 1박을 더 하기로 결정한 후 파주에 처가를 두고 있는 친구들과 밤에 만나기로 했다. (아내와 나의 소개로 [내 친구 - 아내 교회 언니] 가 결혼으로 이어졌고 아내 교회 언니의 [아는 여동생 - 내 친구 2]가 역시 결혼으로 이어졌다. 고로, 내 친구 1, 2는 파주에 처가를 뒀다)


저녁을 먹고 나가려는데 소윤이가 붙잡았다.


"아빠. 가지마아아아"


굉장히 생소한 상황이다. 소윤이가 외출하는 나를 붙잡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빠. 가지 말고 나랑 놀아아아아아"

"아빠. 나랑 같이 자아아아아아"


이미 약속 시간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이런 애원을 계속 듣고 싶은 건 모든 아빠의 마음이던가. 정말 약속을 취소하고 '소윤이랑 더 놀다가 같이 잘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했지만 순간의 충동적인 판단은 행복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경험을 떠올리며 겨우겨우 소윤이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거듭되는 설명에도 나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딸에게 최후의 보루로 초콜렛 카드를 들이밀었다.


"소윤아. 그럼 아빠가 초콜랫 사올게. 내일 눈 뜨자마자 먹어. 어때?"


오늘은 플스. 금릉역에서 만나 위닝을 즐겼다. 한창 게임하고 있는데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고


[여보, 11시 20분 영화 볼 수 있음?]


가능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아내랑 급약속이 이뤄진 이상 너무 늦지 않도록 게임 시간을 조절했다. 게임 끝내고 다시 처갓댁에 가서 아내를 태우고 출판단지에 있는 메가박스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느긋하게 앉아 광고부터 시청한 적이 거의 없다. 언제나 딱 맞게 최대한 시간을 쥐어짜서.


영화는 안시성이었고 러닝타임은 2시간이 넘었다. 졸리고 지루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다 보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내가 나가고 아내랑 자러 들어가서도


"엄마는 옆에 눕지 말고 아빠 오면 아빠가 옆에 누우라고 해"


라는 소윤이의 유언에 따라 소윤이 옆에 누웠다. 정작 새벽에 깨면 기겁을 하며 날 밀어내고 엄마를 찾을 테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소윤이 시윤이 사이에 누워서 한 손은 소윤이 손을 또 다른 한 손은 시윤이 손을 잡고 잠을 청하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역시 사람은 좀 떨어졌다 만나야 한다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