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25(화)
지난밤 늦은 취침의 여파로 아침에 가장 늦게 일어났다. 아침도 거르고 늦잠을 잤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아내 할머니 뵈러 성남으로 가셔야 해서 아침부터 분주하셨다. 장인어른은 차 막히기 전에 얼른 출발해서 일찍 가야 하는데 자꾸 늦어지니 바쁘시고. 장모님은 손주 챙기고 딸 챙기고 사위 챙기는 게 더 중요하니 이것저것 할 게 많으시고. 얼른 준비하자는 장인어른의 채근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내일 장인어른하고 장모님 몇 시에 출발하신대?"
라고 어제 아내에게 묻자
"아빠는 10시에 가자고 하시고 엄마는 11시에 가자고 하시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11시에 가시겠네"
예상은 적중했다. 아직 준비를 못 마친 우리 가족은 집에 남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먼저 떠나셨다. 아내는 딸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고 양심을 지키고자 떠나기 전 청소기를 한 번 돌렸다. 장모님이 싸 주신 여러 가지 반찬과 음식, 과일을 계속 들고 다닐 수는 없어서 잠시 집에 들르기로 했다.
좋은 날씨에 갈만한 야외 나들이 장소 몇 군데를 후보지로 고려하다가 동선상 가장 효율이 높은 한강공원 망원지구에 가기로 했다. 소윤이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할아버지랑 놀이터도 갔다 오고 그랬다더니 피곤했는지 집에 가는 길에 차에서 잠들었다. 시윤이는 원래 잘 시간이었고 아내만 잠깐 올라가서 짐을 정리하고 왔다. 한강공원에 도착할 때까지도 둘 다 깨지 않다가 주차 자리를 찾아서 주차를 마무리하고 기어봉을 P에 드르륵 놓는 순간 둘 다 번쩍 눈을 떴다. 올해 이보다 더 좋은 날씨가 없겠구나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힌 날씨였다.
"아빠, 우리도 텐트 칠 거에여?"
"글쎄"
"아빠 우리도 텐트 치자여 텐트"
고민하다가 그늘막 텐트 치고 좀 오래 머물기로 했다. 아내랑 함께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그늘막 텐트라 크게 어렵지는 않지만 원터치는 아니라서 일일이 폴대도 끼우고 세워야 하는 꽤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했다. 다행인 건 아내가 나보다 이런 걸 훨씬 잘한다. 내가 헤매고 있으면 아내가 척척척척 빠르게 진행했다. 전통적인 남녀 성역할을 타파하고 있는 나는 선구자인가..는 개뿔 그냥 손재주가 없는 거다. 아무튼 무사히 텐트를 치고 아내가 싸 온 밥을 애들한테 먹였다. 그러고 나서는 공놀이도 하다가 킥보드도 타다가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여유로운 듯하면서도 여유롭지 않은 묘한 시간이었다. 순간만 놓고 보면 날씨며 상황이며 굉장히 여유로웠지만 소윤이고 시윤이고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있게 해주지는 않았다. 소윤이는 계속 날 호출해서 함께 놀기를 희망했고 시윤이는 자꾸 남의 텐트에 기웃거리고 남의 돗자리 밟고 그래서 따라다니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넓은 곳이라 훨씬 손이 덜 가긴 했다. 즐거웠다. 소윤이는 기분도 좋고 아빠에 대한 애정도도 높아서 나랑 케미가 좋았다. 소윤이가 잠시 나를 멀리하거나 떨어지면 틈틈이 시윤이랑도 놀고.
마침 [미아논나]가 팝업 스토어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연다길래 기다렸다. 벌써 한 세 시간째 놀고 있어서 아내랑 나는 조금 지쳐가고 있었다. 미아논나의 장소 공지만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마침내 상세 장소 공지가 떴고 아내가 소윤이를 데리고 가서 샌드위치와 오니기리를 사 왔다. 애들한테는 오니기리를 조금씩 먹였다. 샌드위치도 좀 줄까 했지만 한 입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소윤아. 이거 매워"
라고 뻥을 쳤다. 가지, 바질페스토 조합인데 맵기는 무슨. 바나나 누텔라 샌드위치는 차마 아이들한테 먹일 수 없었고.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서 텐트를 접었다. 역시 펼 때처럼 아내가 나보다 훨씬 잘했다. 그래 잘 하는 사람이 하면 되는 거다. 무식하게 힘쓰는 거 말고는 웬만한 건 아내가 더 잘 하니까 아내가 계속 다 하면 되겠다.
놀이터에서 애들 좀 놀게 한 뒤에 떠나려고 놀이터로 갔다. 우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소윤이야 이제 웬만한 건 혼자 힘으로 다 타고 놀 수 있지만 시윤이는 아니었다. 바람같이 날아다니는 누나 형들 사이에서 시윤이를 지키느라 꽤 애를 먹었다. 심지어 시원하게 똥까지 퍼질러 놓은 데다가 꾹꾹 뭉개 놓기까지 해서 처리하느라 고생 좀 했다. 소윤이는 딱 두 개뿐인 그네를 기다려서라도 타겠다고 했다. 한쪽 편에 서서 기다리는데 소윤이 쪽 말고 반대편 그네에 자리가 났다. 그 순간 소윤이가 그네의 가동 범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차마 막을 새도 없이. 몸의 반응은 이미 늦었고 소리라도 질러서 막아 보려고
"소윤아!! 안돼!!"
라고 외쳤지만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타고 있는 그네가 소윤이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말았다. 소윤이는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지고 정말 깜짝 놀라서 바로 소윤이를 안아서 한쪽 의자로 데리고 갔다. 소윤이는 크게 울며
"아빠 미워 아빠 미워"
를 외치길래
"소윤아, 아빠가 뭐라고 한 거 아니야 소윤이 다치지 말라고 그런 거야"
라고 설명해주고 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오빠 미워"
였다. 소윤이도 많이 놀랐을 거다. 한참 동안 안고 있었다. 다행히 상처가 나거나 다치지는 않았다. 얼굴 쪽으로 부딪혔으면 어디라도 찢어졌을 텐데 오히려 뒤통수에 맞은 게 다행이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품에 안긴 소윤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태연스럽게 연기했지만 아주 많이 놀랐다. 다시 한번 지금 얼마나 위험했는지 상황을 설명해주고 다음부터는 절대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면 안된다고 얘기해줬다. 금방 기운을 차린 소윤이는 다시 그네 앞에 가서 줄을 섰다.
"아빠, 저렇게 오래 타는 건 나쁜 행동이야?"
"아니. 나쁜 행동은 아니야. 그런데 나중에 소윤이가 타게 되면 뒤에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서 조금만 타고 양보하는 게 더 좋은 행동이긴 해"
길게 늘어선 줄을 외면한 채 양껏, 실컷 타는 아이를 보면 참 얄밉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또 잘못된 행동은 아니니까. 어떤 게 더 바람직한 행동인지 더 나은 행동인지 알려줄 수 있는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소윤이에게 배려와 양보의 삶을 가르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고 운전대에 앉아서는 매너 없는 끼어들기에 분노를 서슴지 않고 얌체 운전자들에게는 양보를 허용치 않는 나 스스로를 발견하곤 하지만.
시윤이는 이미 졸음이 가득 차 있었다. 졸음이 아니라 깊은 수면으로 언제든 빠져들 수 있는 상태였다. 그대로 집으로 가자니 시윤이가 바로 잠들 것 같았고. 그렇다고 밤잠으로 이어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고 조금 더 버텨야 했다. 아내와 나는 이미 거의 방전 상태였다. 망원시장 쪽으로 가서 간단하게라도 애들 저녁을 먹이기로 했다. 10분도 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시윤이는 몇 번이나 오늘과 작별하고 꿈나라로 가려고 했지만 아내의 피나는 노력으로 막아냈다. 꼬마김밥과 어묵을 먹였다. 소윤이는 여전히 쌩쌩했다. 밥 다 먹고 아이스크림도 한 개 먹고 어제 사 오기로 약속해놓고 까먹은 초콜렛 대신 마이쭈도 사고. 시윤이는 역시 앉자마자 잠들었고 집에 도착해서도 그대로 눕혔다. 하루 종일 밖에서 뒹굴었으니 좀 씻겨야 했는데 차마 깨우지는 못했다. (사실 아내와 나는 이런 상황에서 애들을 깨운 적이 거의 없지만)
소윤이도 재우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아내와 소파에 앉았다.
"하아, 힘들다"
"그러게"
"며칠 동안 육아에서 손 놓고 있어서 그런가 더 힘드네"
"그러니까"
쉴 틈 가득했던 명절 육아에서 한시도 쉴 틈 없는 일상 육아로의 복귀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다른 의미로 명절 증후군이 찾아왔다. 더 힘든 건 오늘이 벌써 화요일이라는 사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가 버렸지.
"여보, 그래도 오늘이 꼭 연휴 마지막 날 같은데 내일 하루 더 있잖아"
최소한의 위안이었다. 내일 하루가 남았다는 게. 물론 내일도 종일 힘든 육아가 함께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