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26(수)
결혼을 2주 앞둔,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해나와 남편분을 만나기로 했다. 광화문에서 12시 30분. 늦어도 11시 출발을 목표로 하고 늦어도 11시 30분에는 나가야 한다고 아내랑 얘기를 나눴다. 당연히 11시 30분에 출발했다. 차가 막히지는 않아서 딱 맞게 도착했다. 광화문 D타워인가 하는 곳에 있는 [닥터 로빈]에서 만났는데, 아주 가끔 광화문에 나와도 애들 데리고 이런 데는 와 본 적도 없고 있는 줄도 몰랐다. 건물 자체가 굉장히 정숙하고 차분한 분위기인데 또 애들이 있다고 해서 크게 방해가 되지도 않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내와 해나는 가장 친한 친구, 해나의 예비 남편과 아내는 초면, 나랑 예비 남편도 당연히 초면. 꽤 어색할만한 자리였는데 어색할 틈이 없었다. 애들 먹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괜히 우리 때문에 식사를 못하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됐다. 아내와 나에게는 또 우리와 자주 만난 누군가에는 굉장히 익숙한 풍경과 분위기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이게 웬 전쟁통인가 싶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전혀 먹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와 속도를 맞추느라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저래 가지고 뭘 먹나 싶지만 사실 잘 먹는다. 특히, 나는. 다만 흡입할 뿐이다. 들고 넣고 씹는 과정을 굉장히 압축해서 단시간 내에 끝낼 뿐 양으로 치자면 결코 적게 먹지 않을 거다. 함께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한 어수선함을 덜 느끼게 하려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기는 하다. 그나마 오늘은 시윤이가 제법 잘 먹은 편에 속하는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화 따위는 시도하기가 힘들었다. 친한 사이였으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막 뱉었을 텐데 그게 아니다 보니 머릿속에서 한 번 정화의 과정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면 시윤이가 보채고 있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애들 데리고도 또 가보고 싶고 아내랑 둘이 오붓하게도 가보고 싶었다.
혼돈의 식사시간을 마치고 근처 테라로사로 자리를 옮겼다. 나랑 시윤이는 먼저 카페에 가 있기로 했고 나머지는 교보문고에 들렀다 오기로 했다. 해나가 소윤이 선물로 QT 책을 사 왔는데 이미 구매를 한 거라 다른 걸로 바꾸러 가는 거였다. 테라로사는 사람이 가득했다 들어가면서 바깥 자리에 앉을만한지 쓱 살펴봤는데 적당하지 않았다. 야외 자리 바로 앞이 주차장 출입구라 수시로 차가 드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이 가득한 안 쪽에 자리를 잡았다. 시윤이는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돌아다녔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딱 내가 앉은자리 주변으로만 왔다 갔다 해서 의자에 엉덩이 붙인 채 주시할 수 있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시윤이를 보다가 살짝 졸기도 했다. 끊임없이 주변을 빙빙 돌며 활발하게 움직이던 시윤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서서 야릇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하아. 하필 지금, 여기서. 야릇한 표정이 사라지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시윤이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시윤이가 지었던 표정만큼이나 야릇하고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티슈도 기저귀도 그 무엇도. 그저 아내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졸려서 그랬는지 퍼질러 놓은 시윤이의 똥을 얼른 처리해야 해서 그랬는지 아무튼 1초가 1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의 독촉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오는 아내가 창 밖으로 보였다. 바로 뒤에 해나와 남편분도 있었다. 과연 아내는 어디서부터 뛴 걸까. 설마 모두 같이 뛰지는 않았을 텐데. 아내에게 물티슈와 기저귀를 받아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질펀한 시윤이의 배설물을 잘 처리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시윤이는 여전히 돌아다녔고 몸이 가벼워져서 더 좋았는지 행동반경을 처음보다 더 넓히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간식으로 유인하며 유모차에 앉혔다. 일단 성공했다. 머스캣(맞나?)과 치즈를 바쳐가며
어떻게든 오래 앉혀 보려고 했는데 오늘도 총알이 부족했다. 시윤이의 식욕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의 간식이었다. 지 먹을 거 다 떨어지니 또 내려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카페 안에는 도저히 있기 힘들 것 같아서 아예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Drop
대학생 때 수강신청 했다가 막상 들어보니 도저히 못 들을 것 같은 과목은 수강포기가 가능했다. 그걸 Drop이라고 했다. 난 오늘 대화에서 Drop 했다.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GG. 포커로 치면 DIe. 밖에 나온 시윤이는
지나다니는 차를 보며
"빠바, 빠바'
이러면서 좋아했다. 이제 조금씩 말을 구별해서 할 줄 안다.
오토바이는
"부우"
자동차는
"빠바, 빠바"
엄마나 아빠를 부르는 건 소윤이가 부른 걸로 착각할 정도로 또렷하게 발음할 때도 많다.
바깥공기를 쐬니 지도 기분이 좋은지 나와서는 나랑 잘 놀았다. 결국 난 이 만남이 파할 때까지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이 먼저 나왔고 우리는 그대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나중에 혹 떼고 한 번 봬요"
인사를 나누고 있을 즈음 (내) 엄마가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어머님이 오늘 율곡습지공원 가셨대"
"그게 어딘데?"
"파주"
"그런데?"
"같이 만나서 저녁이나 먹자시는데?"
"그래?"
"어디서 보지?"
"그러게"
밥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엄마 아빠의 동선과 시간을 맞추려면 일단 저녁부터 먹어야 했다. 얼마 전에 갔던 성석동의 국숫집에서 보기로 했다. 전에 갔을 때는 몰랐는데 꽤 유명한 맛집이었나 보다. 사람이 가득했다. 역시 마찬가지로 강시윤은 틈을 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강시윤을 데리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내) 아빠도 같이 나왔고 곧이어 소윤이도 나왔다. 아내와 엄마가 식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어디 공원이라도 갈까 했는데 제일 가까운 데가 호수공원이었다. 또 공원은 왠지 피곤할 것 같기도 하고. 넓은 마당이 있는 카페로 절충했다. 좋은 선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엉덩이 붙이고 앉은 시간은 5분도 채 안될 테지만. 위험요소가 없어 비교적 자유롭게 풀어놔도 된다는 게 어딘가. 꽤 많이 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헤어졌다. 둘 다 엄청 졸린 상태라 집에 와서 재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아내와 내가 엄청 피곤했다. 우리는 이제 휴식이 필요한데 벌써 마지막 날이라니. 마지막 날이라니. 내년부터는 연휴 말미에 부모님들 집에 방문해야 하나.
하아.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 않다. 내일 출근이라니. 아무리 육아가 힘들어도 출근하는 것보다는 낫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