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15(토)
애들이 몇 시에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내랑 나는 거의 마지노선까지 잤다. 부모교육이 있어서 일찍 알람도 맞춰 놨는데 내가 끈 건지 애들이 끈 건지. 아내는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감으러 들어가고, 난 애들 옷을 갈아입혔다.
"아빠 밥은여?"
"아빠. 맘마 왜 암 줘여어?"
"어.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아빠가 늦게 일어나서 시간이 없어. 그래서 그냥 주먹밥 싸서 교회 가서 먹자"
일어난 시간에 비하면 그렇게 늦게 출발하지는 않았다.
"아, 여보. 커피 한 잔만 사서 가자. 도저히 안 되겠다"
애들 아침은 거르고(싸가긴 했지만) 내 카페인은 챙기는 참된 아빠의 모습. 아내는 커피와 함께 스콘도 사 왔다. 아이들에게 빵 산 걸 들키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가리면서 차에 탔다.
"엄마. 그건 무슨 빵이에여?"
이제 소윤이는 그 정도 술수로는 어림도 없다. 다 함께 스콘을 나눠 먹으며 교회로 갔다.
부모교육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3시 정도까지다. 어른인 나도 힘든데 애들이야 오죽하랴. 거기에 날은 더워졌는데 아직 에어컨은 틀지 못해서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런 와중에도 시윤이는 다행히(?) 적당한 시간에 낮잠도 잤다.
소윤이는 친구랑 잘 놀고, 시윤이는 자고 있어서 잠시 몸이 자유로울 때. 다른 아기(한 6개월쯤 된?)한 명을 내가 안았다. 소윤이, 시윤이에 비하면 깃털 같이 가벼워서 얕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팔이 뻐근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 서서 안고 있었더니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역시 애 둘을 키운 아빠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이런 것이군'
어제 아내에게 이런 제안을 했었다.
"내일 부모교육 마치면 내가 애들 데리고 놀이터에서 놀 테니까 그동안 여보가 집 치울래?"
며칠간 집을 못 치웠더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설거지도 한가득이었고. 아내가 원한다면, 집안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두 녀석을 데리고 밖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막상 부모교육을 마치고 나니 몸이 녹초가 되어서 아내랑 떨어지기 싫었다. 그냥 애들 재우고 같이 치우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여보. 우리 이제 뭐 하지?"
"여보. 우리 애들 엄마, 아빠한테 맡기고 데이트할까?"
부모교육 내용이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관한 거였고, 숙제가 여러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애들 맡기고 데이트하기'였다. 이런 고마운 숙제라니. 아내가 장모님, 장인어른에게 전화를 했지만 모두 받지 않으셨다. 일단 집에 가서 1박을 위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 장모님, 장인어른과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았음에도 1박을 준비하는 아내의 놀라운 믿음이랄까.
아내가 집에 들어가 짐을 챙기는 동안 난 소윤이, 시윤이를 데리고 편의점에 갔다. 바람이 너무 선선했다.
"소윤아, 시윤아. 시원한 거 하나씩 마시자"
"시원한 거 뭐여?"
"글쎄. 가서 보자"
난 탄산수를 골랐고, 애들은 뽀로로 보리차, 오렌지 주스, 자그마한 쿠키 한 개를 사줬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준비를 마친 아내가 편의점 근처로 차를 옮겨 놓는 게 보였다.
"어, 엄마 오셨다"
"어디이? 아빠. 엄마 왜 벌써 와여?"
소윤이가 아니라 시윤이가 이렇게 말했다. 깜짝 놀랐다. [주어+동사]로만 이뤄진 문장을 구사하던 시윤이가 '벌써'라는 꾸밈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기 누나가 워낙 말이 빠르고 유려해서 그렇지 시윤이도 말이나 표현이 둔한 편은 아닌 것 같다.
"여보. 엄마랑 통화했어. 애들 맡기래"
서둘러 파주로 갔다. 장인어른, 장모님은 집에 안 계셨다. 아내는 장인어른께 전화해서 귀가를 독촉했다. 잠시 후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돌아오셨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넘겨졌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 아빠 갔다 올 게.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네. 엄마. 데이트 잘하고 와여"
"엄마. 안넝"
소윤이는 낮잠을 자지 않았지만, 할머니 집에 왔으니 일찍 잘 리 없었다. 짜증 많이 내고 떼쓰지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그냥 거기까지였다. 걱정은 그저 걱정으로 머물 뿐, 어떤 조치나 행동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맡겼으니까.
그렇게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가 내렸다. 소윤이가 공원에 가서 킥보드를 타고 싶댔는데, 안타까웠다. 마찬가지로 안타까웠지만 거기까지였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비가 오는데 뭐. 괜히 그걸 구실 삼아 또 짜증 내고 떼쓰는 거 아닌가 걱정이었지만,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맡겼으니까.
"여보. 가 보고 싶은 데가 엄청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가려니까 생각이 안 나네"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판다는 식당으로 갔다.(물론 아내가 찾았다) 파스타 두 개를 시켰는데 정말 맛있긴 했다. 소윤이랑 시윤이 데리고 와서 혼이 쏙 빠지는 어수선함 속에서 먹어도 맛있을 정도로, 참된 맛이었다.
영화는 볼 것도 없고 왠지 영화 보는데 시간을 쓰는 게 싫기도 했다. 뭔가 색다른 거 없을까 고민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카페라도 새로운 곳(야경이 멋있는 곳, 엄청 분위기가 좋은 곳 등)으로 가 볼까 했지만, 결국 [오늘]에 갔다.(카페는 모름지기 커피가 맛있는 게 제일이라는 게 아내와 나의 공통된 지론이다. 그러다 보니 구관이 명관이라고 여기만 한 선택지가 없었다)
커피를 마시며 진지한 대화도 나누고, 그다음에는 뭘 할까도 고민했다. 여러 안이 있었는데, 최종 선택은 볼링이었다. 볼링 쳐 본 지도 오래됐지만 아내랑 둘이 친 건 연애할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근력과 근지구력을 소유한 아내에게는 볼링도 매우 격한 운동이 될지도 몰랐다. 걱정스럽긴 했지만 일단 입장. 역시나 아내는 세 프레임 정도 공을 던지고 나니 어깨와 팔이 후들거린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도 한 게임만 치고 가기에는 너무 아쉬우니 한 게임 더 쳤는데, 오히려 두 번째 게임에서는 아내가 적응이 좀 됐는지 덜 힘들어했다.
"여보. 재밌네"
"그러게. 나중에 애들 크면 다 같이 와도 좋겠다"
"진짜. 좋겠다"
소윤이, 시윤이가 중학생(혹은 초등학생)쯤 되었을 때 저녁 외식하고 다 함께 볼링도 치고. 어떤 날은 탁구도 치고. 배드민턴도 치고. 얼마나 좋을까. 화목한 가정은 거저 얻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아내와 내가 이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 거다. 소윤아, 시윤아 그래서 아빠가 일기를 쓰는 거라고 누누이 말했지. 너네는 기억 못 할 테니까 기록된 문서로 입증하려고. 엄마, 아빠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희도 노력하거라.
볼링까지 쳤는데도 많이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다른 때는 그 시간에 나와서 영화관에 가기도 했다. 그냥 가기는 아쉬웠지만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아내의 체력도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여보. 안 졸리고 싶다"
아내가 이 얘기를 한다는 건 방전됐다는 거다. 볼링장 주변 동네를 잠깐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장모님은 깜짝 놀라셨다.
"왜 벌써 왔어?"
애들은 잠든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셨다. 장인어른은 안 보이시길래 어디 가셨나 했더니 애들 재우다 잠드신 것 같다고 하셨다. 잠시 후 장인어른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오셨다.
"아이고. 힘들다, 힘들어"
장인어른이 꽤 고생하신 듯했다. 아이들과 함께 밖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갔는데 시윤이가 똥을 싸서 장인어른과 시윤이만 먼저 집에 돌아왔다. 그때까지 멀쩡하던 시윤이가 갑자기 돌변해서는 엄마가 닦아줘야 한다며 버티고 울기 시작했다. 시윤이는 기저귀만 입은 채 엄마를 기다리겠다며 작은방에 들어가 한참을 있었다. 겨우겨우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씻겼더니(장인어른은 처음으로 시윤이의 똥 묻은 엉덩이를 닦으신 거였다. 아마 소윤이 때도 없었을 거다) 이번에는 또 옷을 안 입겠다고 생떼를 피우고. 재우러 들어갔더니 또 둘이 한참을 장난치면서 뺀질거리고.
장인어른은 나오신 지 10분도 안 되어 다시 방에 들어가셨다.
"난 먼저 자야겠다. 피곤하다"
들어가시는 장인어른에게 장모님이 급히 말을 얹으셨다.
"여보. 내일 아침에 내가 못 일어나면 반찬 해놨으니까 당신이 애들 아침 좀 먹여요"
"몰라"
소윤아, 시윤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콤비가 되었어. 너희들은.
장모님도 먼저 들어가셨다. 그다음 아내도. 난 홀로 거실에 남아 U-20 월드컵 경기를 시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