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만들어서 쐬나 보다

19.06.16(주일)

by 어깨아빠

처음 눈을 떴을 때는 다 있었고, 그다음 눈을 떠 보니 시윤이가 없었고, 그다음은 소윤이가 없었고, 마지막으로는 아내도 없었다.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났다. 나중에 아내에게 아침의 풍경을 전해 들었는데, 어젯밤에 이어서 오늘 아침에도 장인어른의 고군분투가 계속됐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소윤이, 시윤이 아침 먹이는 동안 여러 차례 장인어른의 한숨 소리가 들렸으며, 날카롭지는 않지만 깊은 지침이 서린


"소윤아"

"시윤아"


소리가 많이 들렸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작작 좀 해라'라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오지 않았을까.


오늘은 목장 모임이 없어서 12시 10분 예배를 드렸다.(목장 모임이 있으면 10시 30분 예배를 드린다.) 시윤이는 예배 중간쯤 잠들었다. 예배가 끝난 후 아내는 소윤이 데리러 올라가고 난 시윤이 좀 더 자라고 의자에 눕혀 놓고 곁을 지켰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시윤이는 거의 안 먹었지만) 굳이 밥은 안 먹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소윤이가 먹고 가잔다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전히 자고 있는 시윤이를 들어 어깨에 걸쳤는데 깨지 않았다.


"얘가 밥을 거의 안 먹었다며"

"응"

"시윤이가 밥을 먹어야 되는데. 어떻게 하지"

"할 수 없지 뭐"


시윤이는 소윤이랑 아내가 밥을 다 먹었을 때쯤 눈을 떴다. 잠을 푹 잤는지 조금 징징거렸다.


"시윤아, 밥 먹을까? 맘마?"

"맘마? 어디여어?"


밥 얘기를 듣더니 바로 짜증을 그치고 밥을 찾았다. 그러고는 한 10여분 빠른 속도로 밥을 먹었다.


"여보. 일단 가면 내가 설거지를 할 게. 여보는 집을 좀 치우고 있어. 나도 설거지 끝나면 합류할 테니까"

"아니야, 뭘 설거지를 해. 그냥 나가"

"아직 시간이 좀 남아"


난 집에 그야말로 전쟁통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어? 여보. 집이 생각보다 깨끗하네"

"그러게"


아내는 컨디션이 썩 좋지 못했다.


"얘들아. 우리 놀기 전에 먼저 집부터 치우자. 아빠는 설거지 할 테니까 소윤이랑 시윤이가 어질러진 것 좀 치워. 장난감이랑 책 같은 거"

"아빠, 엄마는여?"

"엄마는 오늘 좀 피곤하니까 소파에 앉아서 쉬시라고 하고. 아빠가 설거지하다 봤는데 정리 열심히 안 하고 있으면 정리 안 된 장난감은 다 버리는 거야. 알지?"

"네, 아빠"


소윤이는 열심히도 할뿐더러 꽤 도움이 된다. 아니, 정말 거실이 깨끗해졌다. 시윤이는 뺀질뺀질 돌아다니면서 자기 장난감만 챙기고. 소윤이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달래 주기 위해서 일부러 시윤이한테 큰소리로 말한다.


"강시윤. 너도 얼른 누나랑 같이 치워야지. 같이 놀았잖아"


처음에만 좀 하는 척하다가 이내 자리를 이탈했다.


"아빠. 이제 다 했어여. 봐 봐여. 엄청 깨끗해졌져?"

"오, 진짜. 소윤이가 엄청 열심히 했네"


"엄마, 이리 와서 봐 봐여"

"우와, 소윤이가 정말 이렇게 깨끗하게 정리를 했어?"

"네에"


나도 설거지를 다 끝냈다. 주일 오후에 축구하러 가는 자의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랄까.


"아빠. 어디 가아?"

"아빠. 어디 가는 거 같아?"

"빠앙. 이케?"

"응. 아빠 축구하러 가"


"여보. 갔다 올 게"

"잘 하고 와"


아내는 별다른 약속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뭐 다른 주일에 비하면 독박 육아의 시간이 (보통 6-7시간인데) 오늘은 세 시간 정도니까 좀 낫지 않을까 싶었다.


세 시간 동안 열심히 공을 차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집에 하람이가 와 있다고 했다. 함께 저녁을 먹는다길래 그럼 아파트 앞에서 좀 기다릴 테니, 다 먹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 가지고 아파트에 들어섰는데, 10층 베란다에 시윤이로 추정되는 아이의 형상이 보였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 봤더니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시윤아아"

"네에"

"안녀엉"

"안녀엉"


505호 사모님(하람이 엄마)이 내가 왔다는 걸 알면 괜히 식사를 서두를까 봐 조용히 기다리려고 한 건데, 시윤이 때문에 틀어졌다. 얼른 시윤이 시야에서 사라지려고 했는데 시윤이가 날 또 불렀다.


"아빠아"

"어, 시윤아아"

"안녀엉"

"그래애"


벤치가 있는 곳은 시윤이가 볼 수 있어서 건물 입구 계단에 쪼그리고 앉았다. 땀으로 잔뜩 젖은 옷에 저녁 바람이 스치니 좀 추웠다. 지하주차장에 있는 차로 갔다. 열쇠가 없었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죽어라 뛰고 와서 피곤한데 따뜻한 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스르륵 눈이 감겼다.


"여보. 어디야?"

"어? 나? 어. 어. 차"

"하람이랑 남옥 언니 갔어"

"그래. 그래. 올라갈게"


아내는 많이 지쳐 보였다.


"여보. 내가 애들 씻길 게"

"아니야. 여보는 얼른 저녁 먹어. 불고기 볶아 놓은 거랑"

"내가 씻겨도 되는데"

"괜찮다니까. 내가 씻길게"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차례대로 씻겼고 난 후다닥 밥을 먹고 씻고 나온 애들 옷을 입혔다.


"소윤아. 오늘 엄마가 힘드시니까 아빠랑 잘까?"

"아니여"


씨알도 안 먹혔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소윤이, 시윤이 모두 금방 잠들었고 아내도 잠들지 않고 바로 나왔다.


"여보, 고생했어"

"어. 힘들다"

"여보.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와"

"지금?"

"어. 그냥 바람이라도 쐬고 와"


잠시 고민하던 아내는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고민은 잠시였지만 외출은 한참이었다.


"여보. 여보랑 같이 나오고 싶다"

"어딘데?"

"여기? 그냥 롯데슈퍼 앞에. 그런데 사람들이 엄청 많이 나와 있어"

"날이 시원해서 그런가 보다"

"그러니까. 같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애들 깨워서 같이 나갈까?"

"안녕"


아내는 꽤 오래(한 시간 훌쩍 넘게) 있다 왔다. 뭐 특별히 한 건 없고 정말 산책하면서 바람 쐬다가. 그래도 아까 방에서 나왔을 때랑은 완전히 다른 얼굴, 다른 숨결이었다. 그거면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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