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은 빠른 퇴근

19.06.18(화)

by 어깨아빠

아내에게 전화가 올 시간이 아닌데 전화가 왔다. 보통 처치홈스쿨 가는 날은 다 끝나고 5시 언저리에 연락이 온다. 오늘은 점심시간이 지난 이른 오후 무렵에 전화가 울렸다.


"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카톡 봤어?"

"아니, 못 봤는데"

"오늘 얘네 둘 다 낮잠 안 잤어"

"진짜? 왜?"

"몰라. 대폭발이 한 번 있었어"

"둘 다 안 자서?"

"응. 아무튼 덕분에 여보는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거야"


아내의 퇴근은 육아 퇴근을 말하는 거였다. 아내는 저녁에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애들은 낮잠 자는 날이니 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밤바람이라도 쐬러 나갈까 했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뭘 하며 밤을 보내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고 있는데 둘 다 낮잠을 안 잤다니, 마음만 먹으면 아내에게 아이들을 인계받자마자 재울 수도 있었다.


아내에게 '대폭발'은 표현에 비해 실제는 그 정도가 아닐 때가 많다. 워낙 타인을 향해 분노 표출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대폭발의 진짜 의미는 '나의 감정이 그만큼 분노로 가득 찼다'였을 거다. 물론 내면의 분노가 히스테리로 치환되어 나가긴 하지만.


여러 명이 있는데서 소윤이랑 시윤이만 안 자고 뺀질 거리고 장난치는 걸 보고 있으면 열이 받을만하다. 지나고 보면, 나중에 생각해 보면 낮잠 안 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까지 열을 냈나 싶을 때도 많은데, 막상 그 순간에는 그렇지가 않다. '잠을 재우려고 했는데 자지 않는' 상황은 그게 언제든 스트레스 회로를 작동하게 만든다.


퇴근하려고 버스에 탔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나는 이제 버스 타고 가는 길"

"난 얘네 저녁도 먹인다"

"진짜? 어디서?"

"하루애에서. 남옥 언니랑 같이"

"대박이네. 괜찮겠어?"

"괜찮겠지 뭐. 여보는 재우기만 하면 돼"

"그래, 알았어"


시간이 얼추 맞아서 원흥역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났다. 아내는 어둡지는 않았지만 힘들어 보였다. 애들은 괜찮아 보였고. 아내의 말에 의하면 시윤이는 처치홈스쿨에서도 밥도 잘 안 먹고, 그에 따른 후속 조치인 '간식 금지' 때문에도 계속 울고 떼쓰고. 식당에서 저녁 먹을 때도 역시나 잘 안 먹고. 하루 종일 떼쟁이였다. 물론 나를 만났을 때는 자신의 행적을 모두 지운 채 환하게 웃으며 연기를 한다.


집에 가자마자 애들을 씻겼다. 소윤이도, 시윤이도 땀이 많아서 요즘은 가능하면 매일 가볍게라도 샤워를 하고 있다. 아내는 애들 씻기고 있을 때 나갔다. 진작부터 예고를 했던 덕분인지 둘 다 아무렇지 않게 아내를 보내줬다.


"아빠. 씻고 아빠랑 좀 놀다 자는 거지여?"

"그래"


소윤아, 아빠는 원래 오늘 너희랑 불태울 각오가 되어 있었는데 말이야. 너희가 둘 다 낮잠을 안 자는 바람에 아빠는 계획을 수정했단다.


"자, 10분 지났다. 이제 얼른 자자. 책 골라"


소윤이는 자기 나이보다 어린 아이들, 이를테면 시윤이 정도의 아이들이 읽을만한 책을 골라왔다. 이제 소윤이 수준에 맞는 건 내용이 길어서 한 권을 다 소리 내어 읽으려면 10분 정도 걸리기도 한다. 아내와 나는 자기 전에는 소윤이가 긴 걸 골라오면 짤은 걸로 바꿔 오라며 반려한다. 긴 건 나중에 읽어주겠다는 약속은 못 지킬 때가 많고. 누워서 책 읽어주는데 '소윤이가 과연 정말 이걸 재밌어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윤이의 수준을 고려한 독서를 위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사실 아내랑 내가 조금 더 수고하고 부지런하면 된다)


시윤이는 책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눈이 감기고 있었다. 책 읽기가 끝나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소윤이도 거의 연달아서. 낮에 아내가 고난을 겪은 만큼 내가 혜택을 봤다.


아내는 10시쯤 친구와 헤어졌다며 연락이 왔다.


"더 놀다 와"

"이 시간에 어디 가서 놀다 오겠어"


말은 이렇게 해놓고 12시가 넘도록 안 들어왔다.


"여보. 어디 있었어?"

"나, 계속 메가박스에 있었어"


여보, 그러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거 아니야?


[영화관에 와서 영화는 안 보고 뭔가 펴놓기는 하는데 휴대폰만 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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