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육아의 서막

19.06.22(토)

by 어깨아빠

'이야, 집이 또 언제 이 지경이 되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집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새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 최고의 질이라는 공기 상태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우리 집의 꼬라지를 한 시라도 빨리 개선하고 싶었다. 아내는 남아서 집 치우기와 각종 집안일을 맡고, 난 애들을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어젯밤부터 아내와 나는 여기저기 찾아봤다.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돈이 들지 않는 곳으로. 찾다 보니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 어딘가에 자그마한 공원이 있는데, 바닥분수가 얼마 전부터 가동됐다는 걸 알아냈다.


"여보. 여긴 어때?"

"괜찮대?"

"그냥 뭐, 애들 데리고 가서 놀기 좋다는데? 모래 놀이터도 있고"

"그래, 그럼 거기 가지 뭐"


아침 먹고, 예배드리고 바로 출발했다. 가벼운 외출 치고는 짐이 좀 많긴 했다. 물에 젖을 예정이니 갈아입을 옷도 있어야 하고, 닦아줄 수건도 필요하고. 킥보드, 헬멧, 공, 캐치볼. 이게 정말 다 필요한가 싶었지만 막사 없으면 아쉬울 테니 바리바리 챙겼다. 짐도 짐이었지만 (제대로 된 물놀이는 아닐지언정) 나 홀로 물에 젖은 아이들을 상대할 일이 더 걱정이었다.


"여보, 괜찮겠어?"

"뭐, 괜찮아. 물놀이하는 것도 아닌데 뭐. 여보는 그쪽으로 올 건가?"

"글쎄. 일이 좀 빨리 끝나면 그럴 생각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알았어"


날씨가 정말 좋긴 했는데 볕도 뜨거웠다.


말이 공원이지 그냥 동네 하천 따라 만든 산책로 중간에 있는 쉼터에 가까웠다. 멀리서 찾아올만한 곳은 당연히 아니고, 걸어서 올 거리에 사는 사람이나 올 법한 그런 곳이었다.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빠. 여기가 공원이에여?"

"응, 좀 작네? 그치?"


한강공원, 호수공원, 운정건강공원 = 공원인 소윤이에게도 좀 낯설었을 거다. 그래도 바닥분수는 힘차게 뿜어지고 있었다.


"아빠. 다 젖어도 돼여?"

"응, 갈아입을 옷 가지고 왔으니까 막 들어가서 놀아도 돼"


"아빠아. 젖어 돼여?(젖어도 돼여?)"

"응, 시윤이도 누나 따라서 들어가 봐"


한 2-3분 우물쭈물하며 간을 보다가 한 번 물을 맞고 난 뒤부터는 제대로 놀기 시작했다. 특히 시윤이는 '얘가 물을 이렇게 좋아했나' 싶을 정도로 웃고 뛰어다니며 놀았다. 난 밖에서 사진이랑 동영상만 열심히 찍고 같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애들도 굳이 나를 찾지 않았다. 자기들끼리도 충분히 재밌으니까. 역시 둘 낳길 잘했다.


한 30분 넘게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뛰어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분수가 멈췄길래 안내판을 살펴봤더니, 30분 동안 가동이 중단되는 시간이었다.


"아빠. 이제 저기 놀이터에 가서 놀자여"

"그래, 먼저 옷 좀 갈아입고"


애들 옷을 다 벗겨서 갈아입혔다. 날이 뜨겁긴 해도 바람이 많이 불어서 젖은 옷 입고 놀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젖은 옷들은 일일이 짜서 볕 좋은 곳에 널어놨다. 분수가 다시 가동되면 분명히 또 들어간다고 할 테니까.


30분이 지나고 다시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다시 옷을 벗기고 젖은 옷을 입혔다.


"아빠아. 차거. 차거(차가워여)"

"어, 차갑지. 저기 분수에 들어가면 괜찮아질 거야"


분수에서 정신없이 뛰노는 애들을 보고 있으니, 더 물놀이 다운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물놀이터나 수영장에 데리고 가고 싶었다. 애들은 원 없이 뛰고 소리 지르고, 난 그냥 그거 보면서 웃기만 했다. 똑같이 힘들어도 이렇게 힘든 건 기분도 좋고, 보람도 가득하고 그렇다.


아마 애들은 더 뒀으면 계속 놀았을 텐데 시윤이 낮잠 시간이 다 돼서, 내가 먼저 이제 그만하자고 제안했다. 감사하게도 둘 다 순순히 받아줬다. 다시 옷을 갈아입혔다. 여러 번 옷을 갈아입히고, 젖은 건 말리고. 뭔가 착착착착 해내는 모습에 스스로 감명받았다.


'난 정말 능숙한 육아인인가 봐'


"시윤아. 시윤이는 이제 유모차에서 한숨 코 자자?"

"네에"


그래도 아직 시윤이는 잘 시간 되고, 자기가 졸리면 낮잠 권유를 받아들인다. 아내에게 전화했더니 아직 일이 덜 끝났다고 했다. 아내가 먼저 이실직고했다.


"여보. 난 사실 좀 빈둥빈둥했어"

"또 카톡이랑 통화했지"

"뭐 승아랑 통화도 좀 하고. 그냥 빈둥거렸어"

"그래, 알았어. 그럼 여보는 여기로 올 수 있는 건가?"

"그러지 뭐. 이제 어디 갈 건데?"

"글쎄. 시윤이 잠들면 카페나 갈까 하고. 점심은 뭐 먹이지?"

"거기 대만샌드위치 있는데 간단하게 그거 먹이던가"

"그래야겠다"


집안일도 아내가 자원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한 거지, 애초에 좀 쉬라고 둘을 데리고 나온 거였다. 쉬든 일을 하든 애들 없이 내 속도, 내 호흡에 맞춰서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는 풀리니까.


시윤이는 유모차에 눕히자마자 잠들었다.


"소윤아. 아빠랑 저기 가서 샌드위치 먹고 카페 갈까?"

"좋아여"


소윤이랑 햄치즈 샌드위치를 하나씩 사서 먹었다. 바로 앞에 있는 이디야에 가려다가 조금만 더 걸으면 아내랑 내가 자주 갔던(함께 갔던 적은 거의 없다. 각자 자유 시간에 자주 가던) 카페에 갈 수 있길래 거기로 갔다.


"소윤아. 아이스크림 사줄까?"

"엥? 왜여?"

"그냥 너무 덥고 아빠랑 데이트하는 거니까 특별히"

"좋아여"


소윤이는 더블비안코를 골랐다. 시윤이는 여전히 잘 자고, 소윤이랑 둘이 앉아서 소윤이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난 커피를 마셨다. 가끔씩 둘 다 아무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가 있었는데, 소윤이가 참 심심해 보였다. 그나마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 때는 먹느라 정신없어서 괜찮았는데, 다 먹고 나니 그래 보였다. 애써 소윤이한테 말도 걸고, 질문도 하고 그러다 문득 나중에 소윤이가 많이 커서 아빠랑 있는 걸 어색해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열심히 연습해야지. 딸이랑 둘이 있어도 어색해지지 않을 수 있는 비법 천 가지 정도는 쥐고 있어야지.


소윤이랑 마주 앉았는데 자꾸 눈이 감겼다.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소윤이가 앞에 있는데 자꾸 졸았다.


"아빠"

"어, 소윤아"

"아빠 졸았어여?"

"어? 아니, 뭐"

"그냥 눈만 감은 거에여?"

"어. 어"


"아빠"

"어, 소윤아"

"졸은 거 맞져?"

"어. 그런가 봐. 졸리다"

"자면 안 되여. 나 혼자만 눈 뜨고 있잖아여. 그럼"

"맞아. 안 잘게"


아내도 카페로 왔다. 천군만마의 등장이 따로 없구나. 시윤이는 아내가 왔을 무렵 깼다. 유모차에서도 나름 푹 잤는지 기분이 좋았다. 소윤이랑 캐치볼도 하기로 약속했던 터라, 소윤이는 놀이터에도 가야 한다고 졸랐지만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물론 나를 위해.


"소윤아. 우리 하나로 마트 가서 장 보고 집에서 저녁 먹고, 밤에 잠깐 나갔다 올까?"

"놀이터도 가고?"

"응, 놀이터도 가고. 캐치볼도 하고"

"그러자여"


소윤이한테 저녁에 뭐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소세지를 얘기했다. 하나로 마트에 가서 시식도 하고, 소세지도 사고. 아내와 나는 집에 있는 봉지 냉면을 먹기로 했다. 내가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아내는 애들을 씻겼다.


"여보. 소세지는 한 번 데쳐서 구워줘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

"오, 대박. 여보 진짜"


아빠 육아 5년이면 안 시켜도 소세지를 데친다.


저녁 먹이고 나서 밤 외출을 감행했다. 소윤이가 낮잠을 안 잔 날에는 밤에 잘 나가지 않지만 선선한 밤바람을 너무 느껴보고 싶었다. 애들이랑 같이. 말이 밤이지 해가 떨어지지 않아서 아주 환했다.(아내가 말하길 오늘이 하지 라더라)


소윤이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캐치볼을 하긴 했는데, 너무 싸구려를 사서 그런지 공이 한 번 붙으면 잘 떼어지지 않았다. 던지고, 받고, 착 떼어서 다시 던지고, 받고. 이렇게 돼야 하는데 떼는 게 너무 어려웠다. 애들은 물론이고 나에게도. 좀 더 좋은 걸로 다시 사야 할 것 같다.


밤마실이 즐겁긴 했는데 쓸 수 있는 육아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간단히 씻겨서 아내가 재우러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소파에 철푸덕 주저앉는데 "하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루 종일 고되긴 했는지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축구하고 온 날도 거뜬했는데. 축구보다 힘든 육아구나. 물놀이의 계절이 기다려지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하다.


아내가 한참 동안 안 나오길래 잠들었나 싶어서 들어가 봤더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여보 뭐 해? 드라마 봤어?"

"어"

"안 나올 거야?"

"어, 나가야지"


아내는 그러고도 한참 더 있다가 나왔다. 검블유인지 떠블유인지 하는 드라마를 2회 밀렸다더니 그거 보고 나온 모양이었다.


아내가 아까 그랬다.


"그래도 난 여보 덕분에 오늘 좀 한가로운 느낌이네?"


그래, 여보 그거야. 그거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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