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풀 대란

19.06.24(월)

by 어깨아빠

아내가 어젯밤에 머리가 살살 아프다더니 아침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잠깐이었지만 아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류가(아이들을 향한 말투와 행동이) 영 살갑지 못하다는 걸 느꼈다. 몸이 곤하면 마음도 따라가는 법이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당부를 남기며 출근했다.


"소윤아. 엄마 아프시다고 하니까 오늘은 특별히 말 더 잘 듣고. 알았지?"

"네"


"시윤이도. 엄마 말 잘 들어?"

"네"


물론 아이들이 나의 당부를 철석같이 마음에 새기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윤이는 조금이나마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은 품었지만.


오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여보. 나 너무 짜증 나"

"왜. 왜 그래?"

"너무 짜증 나서 못 참겠어"

"왜. 왜. 왜 그러는데"

"아니, 애들 아침 차려주고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들어왔거든. 그런데 나가보니까 얘네가 밥풀을 온 사방에 다 뿌려 놓은 거야. 온 거실에 다 뿌려놨어"

"소윤이랑 시윤이랑 같이?"

"몰라. 이거 치우는데 너무 짜증이 나서 여보한테 전화했어"

"애들은 어떻게 하고 있어?"

"내가 안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어"

"그걸 어떻게 뿌렸지? 앉아서 숟가락으로 막 뿌렸나?"

"소윤이는 아기의자에서 일어나서 식탁으로 넘어가서 내려왔더라고"

"어? 진짜?"

"어. 시윤이도 소윤이 따라서 내려가려다가 떨어지고"

"어디서?"

"아기의자에서. 엄청 심하게 떨어진 건 아니고"

"큰일 날 뻔했네"


아내와 내가 통화를 하는 동안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기들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모르는 듯, 격리된 안방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아내는 머리도 아프고 속도 울렁거린다고 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5살, 3살에게 '알아서 기라'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겠지. 아내는 안 되겠다며 통화를 끊었다. 어제 배도라지즙 대란에 이은 밥풀 대란이었다.


점심때쯤에 소윤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응, 소윤아"

"아빠. 뭐 해여?"

"아빠. 일하고 있지"

"무슨 일하고 있어여?"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고 있어. 소윤이는 뭐하고 있어?"

"저는 그냥 있어여"

"엄마는?"

"엄마는 누워 있어여"

"아, 그래?"

"아빠. 지금 사무실이에여?"

"응. 사무실이지"

"그럼 영상통화 잠깐 할까여?"

"그럴까?"


소윤이는 핏기 없는 얼굴로 누워있는 아내의 모습도 보여줬다. 아내는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몸살기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머리가 아프고 속이 좀 안 좋은 건데, 머리 아픈 게 꽤 심한 듯했다.


"소윤아. 소윤이가 엄마 기도도 해주고 그래. 알았지?"

"네, 아빠"


늦은 오후쯤에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계속 비슷해?]

[계속 누워 있었더니 조금 나아짐. 애들한테 미안하네. 아무것도 못 줬어. 배고플 텐데]


이때가 4시가 넘었을 때니까 아침 겸 점심 먹고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은 셈이다. 아내 말대로 애들도 불쌍하고, 아내도 불쌍하다.


아내는 저녁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난 계속 오늘은 좀 쉬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아내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 같다며 외출을 감행했다.(탁월한 선택이었다)


밥풀 대란의 장본인들이긴 해도, 하루 종일 집에 갇혀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은 소윤이, 시윤이를 생각하니 짠했다. 저녁 먹고 놀이터라도 데리고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윤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오늘 저녁 먹고 놀이터 잠깐 갔다 오면 안 돼여?"


그러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면서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아, 그냥 일찍 재울까' 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일단 밥을 열심히 먹어야지"


괜히 밥을 끌고 들어와서 대답을 미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애들이 불쌍했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밥 먹고 놀이터 잠깐 갔다 오자. 밥 먹고 샤워하고 난 다음에"

"좋아여"


"아빠. 나두 가치?"

"그럼. 시윤이도 같이"


이건 뭐 놀이터 간다니까 일사천리였다. 씻는 것도 재깍재깍, 옷 입는 것도 재깍재깍, 신발 신는 것도 재깍재깍.


"소윤아, 시윤아. 아빠가 이제 들어가자고 하면 바로 '네' 하고 들어오는 거야?"

"네"


아내는 아직 준비 중이어서 우리가 먼저 집을 나섰다. 그래도 요즘은 밤공기가 굉장히 상쾌해서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이것도 곧 끝나겠지만. 거기에 둘이 어찌나 알콩달콩 잘 노는지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아빠 미소가 절로 짓게 된다. 물론 몸은 매우 힘들다. 요즘 소윤이는 구름다리(팔로 매달려서 팔의 힘으로 건너가는)에 맛 들였다. 문제는 자기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으니 항상 내게 받쳐줘야 한다는 거다. 오늘도 열심히 보조를 하고 있는데 한 7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소윤이한테 말을 걸었다.


"야. 이거 혼자 하는 거야"

"아, 그런데 나는 아빠가 거의 힘 안 주고 밑에서 살짝 받쳐주기만 해"

"나는 이거 이렇게 혼자 해"

"나는 아직 힘이 없어서 혼자는 못 해. 아빠가 도와줘야 돼"


시윤이도 누나를 따라 구름다리를 좋아한다. 자기도 해달라며 오르는 시윤이를 보며 그 여자아이가 또 말을 걸었다.


"아가야. 너는 이거 위험해서 안 돼"

"아니야아아아"

"이거 너 혼자 못 할 텐데"

"아빠가아아아"


시윤이는 보란 듯이 나에게 안겨 반대편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놀이터에서 같이 노는 게 어쩌면 그냥 노는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인생의 믿을 구석, 평생의 믿을 구석이 되려면 놀이터에서부터 믿을 구석이 되어야겠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애들 키우는 건 참 열심히 쌓아 나가야 하는 것 같다. 참 묘하게도 소윤이, 시윤이가 아빠를 들먹일 때 내가 뭐라도 된 듯, 기분이 좋았다.


놀이터에서 그렇게 오래 놀지는 않았다. 시간이 길지는 않았어도 애들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는 충분히 풀린 듯 보였다. 집에 돌아와 손과 발은 다시 간단히 씻겼다. 누워서 책 읽어주는데 자꾸 멍해졌다. 눈 감고 존 건 아닌데 눈 뜨고도 갑자기 입이 멈춘달까.


"아빠아. 왜 암 이거(왜 안 읽어)?"

"어. 아니야"


"아빠. 아빠. 졸지 마여"

"아니야. 안 졸았어"


시윤이가 꽤 걸렸다. 재우고 나왔더니 거실이 어느새 난장판이었다. (분명 아내가 토요일에 싹 치웠는데 말이야)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치웠다. 아내가 시각의 자극으로 스트레스가 가중되지 않도록.


다행히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아내는 거의 정상인(?) 이었다.


"여보. 나 멀쩡해져서 돌아왔지?"

"그러게. 다행이네"


아내가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줬다. 시윤이 재우고 나서 아내는 여전히 거실에 환자처럼 누워 있을 때.


"엄마. 안 추워여? 내가 이불 갖다 줄까여?"

"아니야. 시윤이 자잖아. 괜찮아"

"아, 조용 조용히 갔다 올게여"


소윤이는 기어코 이불을 가지고 왔고, 베개도 가지고 왔다.


"엄마. 이제 안 춥져?"

"응. 고마워"


역시, 이래서 딸은 있어야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