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27(목)
잠결에 아내와 소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윤이는 일찍 일어난 것 같았는데, 오늘따라 아내와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고 혼자 놀았다.
"소윤아, 몇 시에 일어났어?"
"어. 긴 바늘이 4에 갔을 때여"
"그래? 그런데 왜 엄마, 아빠 안 깨웠어?"
"그냥 혼자 놀았어여"
"뭐 하고?"
"그냥 혼자 아기도 보고, 병원놀이도 하고여"
"그래? 소윤아, 아빠 핸드폰은 어디 있어?"
"저기, 드럼 뒤에여"
"소윤이 아빠 핸드폰 했어?"
"네"
"그런데 왜 엄마한테 그냥 놀았다고 했어?"
"그냥이여"
소윤이가 아내와 나를 깨우지 않고 30분이나 조용히 있었던 건, 다 휴대폰 덕이었다. 기껏 휴대폰 가지고 가서 한다는 게 자기랑 동생 사진이나 동영상 보고, 메모장이나 문자 창에 이것저것 써보고 그 정도다. 또래 아이들이 능숙하게 유튜브 실행시켜서 원하는 동영상 찾아보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뭐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다. [엄마, 아빠의 허락 없이 휴대폰을 가지고 가지 말아라]는 지침에 어긋나긴 해도.
"아빠. 아빠는 비밀번호 바꾸면 안 된다여. 알았져?"
출근할 때 아내와 아이들도 함께 나왔다. 난 사무실에서 내리고, 아내와 아이들은 장모님의 친한 친구분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파주(처갓댁)로 갔다. 오후에는 지난번에 형님(아내 오빠)이 부탁한 일을 다시 처리하기 위해 면허시험장, 동사무소 등을 방문해 이것저것 해야 했다. 애들은 장모님과 장모님 친구에게 맡기고. 아내는 일 끝내고 시간에 맞춰 사무실로 오겠다고 했다.
퇴근 30분 전쯤 아내가 등장했다.
"하아. 힘들다"
"덥지?"
"어, 오늘 엄청 덥다"
"맞아. 나도 덥더라"
"아, 은근히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
"면허시험장이랑 동사무소는 가까웠어?"
"가깝긴 한데 차 탔다 내렸다 해야 되고, 주차도 해야 하니까"
"그렇긴 하지"
"원래 일찍 끝내고 혼자 여유롭게 커피도 좀 마시려고 했는데. 다 날아갔네"
밤 자유야 일주일에 한 번씩 보장되고 일이 있으면 월요일이 아니더라도 누릴 때가 있지만, 낮 자유는 흔한 일이 아니기에 아내는 내심 아쉬웠을 거다. 초등학교 다닐 때 문방구에서 50원짜리, 100원짜리 종이 뽑기를 하면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
[꽝!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아쉬운 대로 커피만 한 잔씩 사 가지고 처가 댁에 돌아갔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목욕하고 나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저녁은 집에 가서 먹기로 했다. 장모님이 각종 밑반찬을 잔뜩 싸 주셨다.
"여보. 너무 든든하다"
가득 찬 반찬통은 두툼한 지갑 못지않은 안도감을 선사한다. 장모님이 싸 주신 멸치볶음, 장모님이 싸 주신 호박볶음, 한살림에서 산 두부가 아이들 반찬이었다. 시윤이는 누나가 젓가락으로 먹는 걸 보더니 자기도 젓가락으로 먹겠다며 젓가락을 잡았다. 당연히 흘리는 게 반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포크를 쥐여주고 싶었지만 시윤이가 납득할 리도 없었거니와 언젠가는 거쳐야 할 과정이다. 3살의 식사는 꼭 배만 채우기 위한 시간은 아니니까.
밥 다 먹고 소윤이를 씻기면서 슬쩍 얘기했다.
"소윤아"
"네"
"오늘은 아빠랑 자고 엄마 운동 갔다 오시라고 할까?"
"왜여?"
"아, 엄마 오늘 운동도 가셔야 되고, 운동 갔다 오면 내일 처치홈스쿨 반찬도 만들어야 한대. 그러니까 오늘은 아빠랑 자고 엄마 운동 가라고 하면 어때?"
"좋아여"
"그럼 소윤이가 나가서 엄마한테 얘기해"
"엄마아"
"어, 소윤아"
"오늘 아빠랑 잘 테니까 엄마는 운동 갔다 와여"
"진짜?"
"네. 대신 이따 내 옆에 누워여?"
"그래, 알았어"
"시윤아"
"응"
"오늘 엄마 운동 가셔야 돼서 아빠랑 잘 거야. 알았지?"
"누나 아치(같이)? 아빠 아치?"
"응. 아빠랑 누나랑 자자?"
"응"
기특한 녀석들. 당연히 거부할 줄 알고 설득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받아주다니.
소윤이가 고른 책 두 권, 시윤이가 고른 책 한 권을 들고 방에 들어갔다. 두 녀석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어느 때보다 열과 성을 다해 책을 읽었다. 마지막 책은 일종의 '유아용 교리책' 이었는데, 하필 오늘 읽은 부분이 '삼위일체'에 관한 부분이었다.
"아빠. 하나님은 한 분이에여?"
"그렇지"
"그런데 왜 세 분이라고 해여?"
"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사실 같은 분이야"
"어떻게여?"
"어, 그건 소윤이가 아직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 죄를 없애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건데 사실 그게 하나님이고, 또 우리를 돕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셨는데 그게 예수님이고 하나님이야. 어렵지? 아빠가 나중에 시간 좀 더 많을 때 자세히 설명해 줄 게. 이건 사실 어른들도 어려운 거거든"
"네"
그래. 아빠도 어렵단다. 나중에 삼촌 돌아오면 삼촌한테 물어봐.
소윤이한테 열심히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을 때, 시윤이는 반대편을 보고 엎드린 채 움직임이 없었다. 자나 싶어서 봤더니 자기 딴에는 몰래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시윤아. 손가락 빨지 말고"
"아빠. 빼(뺐어여)"
"옳지. 잘 자"
시윤이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그래, 작년 여름에도 그랬다. 거실에 있는 벽걸이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안방까지 가려면 문을 열어놔야 하는데, 그럼 아내와 나의 밤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 아내와 나는 그냥 문을 닫았었다. 선풍기 두 대를 돌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아내와 내가 자러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문을 열고 에어컨 바람을 허락(?)했다.
소윤아, 시윤아. 벌써 더워지네. 올해도 작년과 같은 방침을 유지할 생각이야. 미안하다. 너희가 잠깐 더위를 무릅쓰는 그 시간이 엄마, 아빠에게는 너무 소중하거든. 더위에 강한 아이로 자라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