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근원

19.07.04(목)

by 어깨아빠

아내가 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답장이 없길래 치열한 오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오가 넘어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난 나왔어"

"어디?"

"아, 엄마가 일산으로 나오신대서"

"또 그랜드 백화점?"

"응"

"거기 뭐 숨겨놨어"

"그러니까. 다른 데 만날 곳 없나"


오후쯤에 또 전화가 왔다.


"여보. 난 식당가에 있는 카페에 혼자 있어"

"애들은?"

"아, 강화 아주머니도 갑자기 오셔서 같이 계셨는데. 난 잠깐 엎드려서 잤는데 일어나 보니까 아무도 없더라"


육아에 찌든 딸(이자 친구의 딸)을 위해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셨나 보다. 장모님과 장모님 친구분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됐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음식이 다 나온 뒤였다. 시윤이 옆자리에 앉았는데 시윤이가 더듬더듬 내게 말을 건넸다.


"아빠. 아빠. 어. 뭐 타. 뭐 타고. 타고. 뭐 타고 와쪄여엉?"

"아빠? 빠방. 아빠 차"

"아빠. 나늠 땍찌(택시) 타쪄여엉"

"시윤이는 택시 타고 왔어?"

"네에에"


이 녀석이 요즘 일상 곳곳에 애교를 장착했나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보는 건가.


"시윤아. 계란도 먹을래?"

"이거 뭐에여엉?"

"이거 계란. 계란찜. 먹을래?"

"네에"

"자, 조금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아빠. 떠거여엉(뜨거워여)"

"괜찮아. 이 정도는"

"아니여엉. 떠거여어엉"


기분이 꽤 좋았는지 밥 먹는 내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요즘 짙어진 편식의 기운이 여전히 나타나긴 했지만 그냥 뒀다. 소윤이는 파주 할머니(장모님)와 강화 할머니(장모님 친구) 사이에서 나름 열심히 먹었다.


"소윤이도 얼른 열심히 먹어"

"아빠. 열심히 먹고 있어여"


미안, 아빠가 그냥 습관처럼 말했네.


사실 오늘 일하는 내내 뭔가 놀러 가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막연한 욕망이 있었달까. 어디서,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퇴근하면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떠오르는 것이 다 성에 차지 않았다. 욕망의 본체가 무엇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답을 얻었다.


'내가 놀고 싶은 게 아니라, 애들이 즐겁게 뛰노는 걸 보고 싶은 거구나'


날씨가 너무 더워진 탓에 어디 물놀이라도 가서 즐겁게 놀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시초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이렇게 말하니, 마치 매일매일 우울하게 지낸 것 같네. 그냥 오늘 유독 그랬다는 거다)


밥 다 먹고 차에 올라탔는데 소윤이가 말했다.


"아빠. 우리 오늘 놀이터 가서 조금만 놀고 들어가면 안 돼여?"

"어, 소윤아.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왜여?"

"이미 시간이 좀 늦었잖아. 대신 내일 놀이터 가자"

"그래도 오늘 놀고 싶은데"

"오늘은 안 되고 내일 가자. 알았지?"


사실 난 그럴 용의가 있었는데 아내가 먼저 대답을 했으므로 잠시 고민했다. 아내는 가는 길에 커피를 사 가자고 했다. 소윤이는 나름의 후퇴안을 다시 내놨다.


"아빠. 그러면 집에 가서 아빠랑 조금 노는 건 괜찮져?"

"소윤아. 그럼 우리 그냥 놀이터에서 조금 놀자"

"그래여"


아마 아내는 바로 집에 가서 얼른 하루를 끝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퇴근의 욕망이 가장 강렬할 때는 퇴근 한 시간 전쯤이니까. 사전 논의 없이 이뤄진 놀이터에서의 시간(다르게 말하면 퇴근 지연)에도 아내는 기쁘게 응했다.


"여보. 그럼 난 일단 집에 가서 짐 좀 정리하고 올 게. 애들이랑 놀고 있어"

"그래"


사실 이때 약간 의심했다. 집에 들어갔다가 여차하면 눌러 앉겠구나 싶었다. 소윤이랑 시윤이랑 신나게 놀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이때는 확신했다.


'역시나'


내 아내는 그렇게 야비한(?) 사람이 아니었다. 곧 내려가겠다는 전화였다. 아내는 쓰레기 더미를 잔뜩 안고 내려왔다. 여보, 미안. 잠시 의심했네.


나의 바람대로 소윤이와 시윤이는 깔깔거리며 그네도 타고, 여기저기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네 타는 걸 보고 있는데 아내가 내 반바지를 사러 갈까 했었다며 아쉽다고 했다. 시간상으로는 여전히 갈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갔다 와서 씻기고 재울 생각을 하니 갈 길이 삼만 리였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서 씻겨서 나오자니 그것도 너무 늦고.


"여보. 지금 바로 가면 딱 좋은데"

"그럼 가자"

"갔다 와서 씻기면 너무 늦지 않을까?"

"그럼 내가 집에 가서 갈아입을 옷이랑 칫솔을 챙겨 올 게"

"진짜? 그럴까?"


그리하여 평소 같았으면 자고도 남았을 시간에 온 가족이 스타필드에 갔다.


"소윤아. 소윤이가 가장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그중에 하나 들어줄게"

"음, 레고 장난감이여"

"레고? 그럼 그다음은?"

"음, 찰흙이여"

"아, 소윤아 찰흙은 집에 많잖아"

"다 굳었어여"

"아 그래도 다른 건?"


이럴 거면 뭐 하러 말하라고 했나 싶었겠지?


"그럼 초콜렛이여"

"초콜렛?"

"무슨 초콜렛?"

"킨더 초콜렛"

"그래? 그럼 차라리 킨더 초콜렛 말고 더 맛있는 거 사 줄게. 아니면 아이스크림을 먹든지"

"아, 그럼 아이스크림이여"


엄마, 아빠의 늦은 외출 덕분에 소윤이도 하나 득 봤다.


신속하게 반바지를 산 뒤 편의점에 가서 소윤이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시윤이는 아직 아이스크림까지 욕심내지는 않는다. 한 입 주면 당연히 좋다고 먹긴 하지만 자기가 고를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이다. 그래도 빈손으로 두는 건 너무 미안하니 두유를 쥐여줬다. (시윤이의 선택으로)


아내가 잠시 소윤이 옷을 보러 간 사이,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과 두유를 먹였다. 시윤이는 한두 모금 빨더니 입을 뗐다.


"시윤아. 이거 안 먹어?"

"암 먹어여"

"왜"

"마지 없져져여어엉(맛이 없어서여)"


소윤이는 당연히 앉은 자리에서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시윤이가 남긴 두유까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전 가족 화장실에 들어갔다. 소윤이부터 차례대로 손과 얼굴을 씻기고. 아내는 물티슈로 소윤이의 엉덩이도 닦아주고. 양치도 시키고. 옷도 갈아입히고. 기저귀도 갈고.


"여보"

"응?"

"우리 기생충 같아"

"킄킄킄킄킄킄킄킄"

"스타필드 기생충"


'가영아. 넌 계획이 다 있구나'


말끔한 외출복 차림이던 두 녀석이 갑자기 내복 차림으로, 마치 어디 찜질방에 온 것 마냥 탈바꿈했다.


그러고 집에 왔더니 시간도 늦고 무더운 날씨 덕분에 씻기 전까지는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래도 애들은 놀이터에서도 스타필드에서도, 자러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많이 웃고 기분이 좋았다.


덕분에 하루 종일 근원을 알 수 없던 나의 '놀고 싶은 욕망'도 거의 해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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