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모 은혜

19.07.13(토)

by 어깨아빠

눈을 뜬 소윤이와 시윤이가 나와 아내가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행복한 아침. 어쩌면 이것 때문에 엄마 집에 오는 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는 한 번 깨면 다시 이어 붙이기가 그렇게도 힘들던 잠이, 여기서는 어찌나 부드러운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오히려 잠시 깨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놀고 있는 아이들의 소리가 엔돌핀을 막 생성하는 느낌이다.


아내는 10시 넘어서 일어났다. 애들은 아내가 일어나기 직전에 아침을 (할머니와) 먹었다. 엄마는 애들 먹은 걸 정리하고 어른들의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는 잠시 소파에 앉아서 남은 잠을 정리하다가(멍 때리고 TV 보다가) 아차 싶었는지 벌떡 일어나 아침상 준비를 거들었다.


(내) 아빠가 소윤이, 시윤이를 본 건 거의 한 달 만이었다.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구사하는 언어와 문장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시윤이인데, 한 달 만에 만났으니 시윤이의 폭풍 성장에 아빠는 놀라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셨다.


"하부지. 이기 와여. 아치(같이) 해여"


이러면서 팔을 잡아 끄는 손주를 보는 느낌은 어떨까. 내 느낌이지만 할머니들은 아무리 시윤이가 날고 기어도 소윤이가 영원한 최대주주인 것 같고, 할아버지들은 미세하게나마 시윤이가 조금 더 많은 지분을 갖고 있지 않나 싶다. (예전에 할아버지들이 그래도 소윤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시윤이는 요즘, 가뜩이나 짧아져 아쉬운 대한민국의 봄처럼 여차하면 아련한 과거가 되어 있을 '어눌한 말투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시윤이가 하면 놀랍고 신기한 말과 행동이지만, 소윤이에게서 나오면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 당연히 반응이 달리 나가게 된다. 아내도 나도 항상 신경 쓰려고 하는데 잘 되는지 모르겠다. 소윤아. 아빠가 일기에 잘 적지는 않지만 니가 말씀을 암송하거나, 찬양을 목청껏 부르거나, 그림을 그럴싸하게 그리거나, 아빠랑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거나. 그럴 때마다 아빠는 똑같은 감격을 누리고 있다. 언젠가 니가 두발자전거를 홀로 타는 걸 보게 되면, 그때도 마찬가지겠지. 니가 "아빠"를 처음 불렀을 때와 같이 감격할 거야. 생각해 보니까 끝나지 않겠네. 늘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 테니.


원래 물놀이를 갈까 했었는데 수족구가 너무 유행이라고 해서 가지 않았다. 잘했다. 물놀이 가는 생각만 해도 발톱 끝에 피로가 차기 시작하는 느낌인데, 집에 있으니 엄마, 아빠가 애들이랑 놀아주고 간식도 챙겨주고. 탁월한 선택이었다. 올여름 물놀이는 짧고 굵게 하자 얘들아.


오후에는 소윤이 자전거 사러 마트에 갔다. 원래 내년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생각해놨는데 어쩌다 올해, 엄마가 스폰서가 되어 사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소윤이는 어제부터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아빠. 내일 자전거도 사러 가는거져?"


아내는 미리 다 알아봤다. 어떤 자전거 브랜드가 인기가 많은지, 뭐가 좋은지. 막상 매장 앞에 가니 자기는 아는 게 없다며 나한테 소윤이하고 함께 가서 고르라며 나를 떠밀었다. 나도 정말 자전거에 대해 잘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찾아본 그대가 들어가라고 해도 한사코 나를 밀어 넣었다.


여러 브랜드가 있었다. 소윤이가 마음에 들어하는 건 핑크핑크하고 캐릭터가 턱 턱 박혀 있는 그런 것들. 심지어 싸지도 않고.


"소윤아. 이리 와 봐. 이건 어때? 아빠는 이게 예쁜 것 같은데?"

"뭐여?"

"이리 와 봐. 이거 봐 봐"

"이거여?"

"응"


아내가 전에 얼핏 얘기했던 브랜드의 자전거 쪽으로 유인했다. 실제로 그게 가장 내 취향이기도 했다. 또 고급라인이 아니라 가격도 제법 저렴했고. 소윤이는 자기가 원하는 자전거를 하나씩 타보는 중이었다.


"소윤아. 어때? 마음에 들지?"

"아빠. 이것도 괜찮은 것 같아여"

"그렇지? 아빠도 그게 제일 낫다 야"


소윤이가 고른 것들은 정말 내 취향도 아니었을뿐더러 시윤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누나의 자전거 획득과 동시에 자기 첫 자전거는 누나가 타던 자전거라는 게 확정될 시윤이에게 최소한 핑크와 캐릭터는 면하게 해주고 싶었다. 다행히 소윤이도 마음에 들었는지 기쁘게 선택을 마무리했다.


아침에 소윤이가 (내) 엄마에게


"할머니. 이따가 자전거 사러 갈 거지여?"


라고 물었더니 엄마가 그러자고 대답하고는 덧붙여서 말했다.


"아. 소윤이가 그래서 할머니 집에 왔구나. 자전거 사려고"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그걸 노리고 온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게 없었어도 오긴 했을 거다. 정해진 기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손주 보신지 한참 됐나'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오는 거니까.(그렇다고 하기에는 아내와 내가 누리는 게 너무 많구나) 괜히 소윤이에게 진심의 감사 표현을 종용했다.


"소윤아. 너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렇게 사주시는 거 정말 감사한 거야. 당연한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드려 얼른"


시윤이는 자고 있었다. 본인에게는 억울한 일인지 몰라도 우리는 모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지도 못 할 거 괜히 눈 뜨고 보는 것보다는 속 편히 자는 게 나으니까. 소윤이의 자전거 구매가 다 끝나고 집에 가려고 할 때 시윤이는 눈을 떴다.


"아빠. 저거 뭐에여엉? 저거 뭐야앙?"

"아, 저거? 누나 자전거야"

"나두우. 나두 아전거. 아전거어엉"

"시윤이는 아직 너무 작아서 자전거를 못 타. 조금 더 크면 타자. 알았지?"

"이따가?"

"어. 나중에 시윤이도 같이 타자?"

"아빠. 이따가 아전거 사져여어엉?"


시윤이의 '이따가'는 멀든 가깝든 다가올 미래를 통칭한다.


엄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윤이가 물었다.


"아빠. 내일은 할머니 교회 가여? 홍익교회 가여?"

"내일? 홍익교회 가지. 우리 오늘 집에 갈 거야"

"왜여?"

"왜긴. 어제 잤잖아"

"아니에여. 아까 할머니가 하룻밤 더 자고 간다고 했어여"

"할머니가? 아까?"

"네"

"그래?"

"네"


아내가 나에게 슬쩍 얘기했다.


"진짜 그럴까?"

"그러든가"


엄마 집 근처 학교에 가서 자전거를 좀 태워주려고 했는데 마침 운동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냥 집 앞 골목에서 조금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소윤이는 발을 제법 잘 굴렀다. 꽤 힘들었을 텐데 꽤 오랫동안 앉아서 페달질을 하기도 했고. 누나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시윤이에게도 기회를 줬다. 당연히 발은 페달에 닿지 않았지만, 앉혀 놓고 손으로 끌어주니 그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해가 뜨겁지는 않았는데 습도가 높아서 푹푹 찌는 날씨였다. 어쩌면 운동장에서 타지 못한 게 더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조금 맛보기로만 타고 금방 들어왔으니.


"저녁 일찍 먹고, 너네는 나갔다 와"


오늘도 엄마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아내나 나나 각자의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저녁 먹고 나갈까' 하는 생각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을지 몰라도, 입 밖으로 나와 공론화되지는 않았는데 엄마가 친히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어르신의 뜻을 받드는 의미로 그리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너무 끊임없이 간식을 먹어서 간식 제한 조치를 당하는 상태였던 소윤이도 반색을 했다.


"소윤아. 왜? 엄마, 아빠 나가면 간식 많이 먹으려고?"

"아니여어. 많이 안 먹을 거에여"

"아예 안 먹을 거야?"

"아예는 아니고. 조금?"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시윤이는 내내 할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갔다. 소윤이 때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할아버지 손을 그렇게 오랫동안 잡고 있는 것도, 한 번도 쉼 없이 걷는 것도. 식당에 가서도 시윤이는 쉴 새 없이 갈비를 집어먹었다. 시윤이의 일거수 일투족은 특히 (내) 아빠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밥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는 누나 덕분에 시윤이도 아이스크림을 하나 손에 쥐었다. 어느 아이스크림이든 몸에 안 좋은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나마 낫지 않을까 싶은 '서주아이스바'를 골라줬다. 시윤이가 한 개의 아이스크림을 온전히 소유하고 먹는 일은 거의 없다. 시윤이는 준비된 자였다. 깔끔하게 아이스크림 한 개를 먹어치웠다. 아직 금지된 게 많아서 그렇지 봉인만 해제되면 무서운 아이가 될 것 같다. 오히려 소윤이는 자기가 먹는 게 얼마 안 남았어도 아내나 내가 달라고 그러면 기꺼이 내주는데 시윤이는 안 그런다. 오히려 자기 몫은 엄청 빨리 먹고 느리게 먹고 있는 누나가 안 나눠 준다고 막 운다. 난 내가 오빠라서 그랬는 줄 알았는데 동생이어도 똑같다는 걸 시윤이 보며 느끼고 있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 아빠 나갔다 올 게"

"엄마, 아빠. 잘 갔다 와여"

"안넝"


아내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아, 오늘 늦게 일어났는데도 왜 이렇게 피곤하지"

"만성이지 만성"

"그런가. 우리 뭐 하지?"

"그러게"


시간이 이르고, 날이 춥지 않아서 아내는 일단 좀 걷자고 했다. 토요일 밤의 신림역 주변은 산책할만한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현실판을 찾는다면 1순위로 유력한 곳이다. 쇼핑몰 건물에 들어갔다가 올리브영을 발견한 아내는 거기를 구경하자고 했다. 그 좁은 매장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꾹 참고 동행한 덕분에 싸구려 바디워시를 하나 얻었다. 원래 쓰던 바디워시가 다 떨어져서 애들 바디워시 중에 안 쓰고 있는 걸 내가 쓰고 있었다. 애들 거라 그런지 거품이 너무 안 나서 속이 터졌었다. 이제 풍성한 거품과 함께 샤워할 수 있게 됐다.


저번에 갔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봤다. 막 엄청 구미가 당기는 영화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스파이더맨]을 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재밌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아내와 나도 얼른 누웠다.


"여보. 난 오늘 샤워 안 할래. 귀찮다. 내일 아침에 할래"

"나도"


왜냐하면 우리의 아침도 자유로울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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