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윤이의 사랑 고백

19.07.18(목)

by 어깨아빠

잠결에 눈을 떠보니 소윤이가 매트리스에 누워 있는 아내 곁에 와서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잘 듣지는 못했는데 아내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 소윤이. 신발 사이즈가 모던 사이즈였나. 뭐였지"


난 아내의 억양과 말투, 내용을 듣자마자 잠꼬대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소윤이는 당황한 듯 되물었다.


"엄마. 누구한테 말하는 거에여?"


아내가 별 반응이 없자 소윤이는 화장실로 갔다. 잠시 후 들려오는 소윤이의 목소리.


"엄마아. 오줌 다 쌌어여어"

"어, 소윤아. 엄마 주무시고 계시니까 그냥 소윤이가 닦고 나와"


내가 대신 대답하자 이번에는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아. 그런데 내가 바지에 쉬를 해서여"

"아, 그랬어? 알았어. 기다려. 아빠가 갈 게"


아마 소윤이가 아내 옆에서 속삭였던 얘기는 자기가 이불에 쉬를 했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 바지랑 팬티를 갈아입히고 이불에도 젖은 부분이 있나 찾아보려고 했는데 느껴지지는 않았다.


"소윤아. 일단 그냥 자. 나중에 엄마한테 말씀드려서 빨아 달라고 하자"

"네"


5시가 조금 넘었을 때라 반드시 다시 자야 했다. 알람 소리에 다시 눈을 떠보니 7시. 소윤이도 자고 있었다. 이제 대화도 잘 통하고, 가끔은 너무 어른처럼 말하고 행동해서 5살이라는 걸 망각할 때도 많은데 이렇게 오줌 실수 한 번에 당황하며 울먹거리는 걸 보니 괜히 기분이 좋다. (뒤처리를 해야 하는 아내는 일단 한숨이 나오겠지만)


아내와 아이들에게 아무 일정이 없으니 부디 오래 자길 바라며 조용히 출근했다. 8시가 조금 넘었을 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어디긴. 출근하고 있지. 버스야"

"아, 난 오늘 여보 차 가지고 가는 줄 알았어"

"아, 그랬어? 버스 타고 왔어"


"아빠아. 왜 뻐찌(버스) 타고 가떠여엉?"

"아빠 출근해야 되니까"

"왜여어엉?"

"회사 가서 일하려고. 시윤이 잘 잤어?"

"네에에"


끝없는 "왜요?" 공세를 막으려면 가끔은 먼저 질문을 날려야 한다.


오후에 시윤이 낮잠 재우려고 다 함께 방에 들어왔다며 영상통화를 했는데, 잠시 후 아내에게 또 전화가 왔다.


"여보. 엄청 감동적인 일이 있어서 전해주려고"

"왜?"

"여보랑 전화 끊고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윤이가 내 목을 끌어당기면서 '엄마. 사랑해여' 이러더라"

"진짜? 갑자기?"

"어. 내가 뭐 먼저 사랑한다고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뜬금없이 배시시 웃으면서"

"오. 대박이네"


처음 있는 일이다. 시윤이가 자발적으로 먼저 사랑을 고백한 건. 그러고 보니 소윤이 때는 소윤이한테 뜬금없이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했고 덕분에 소윤이 말이 트이고 나서는 많이 되돌려 받기도 했다. 그에 비해 시윤이는 누나의 감시망을 피한다는 이유로 아무래도 덜했던 것 같은데, 역시 사랑은 온도구나. 다 전해졌나 보다. 함께 있기에 누릴 수 있는 복이다. 같이 살을 부대끼고 호흡을 나누는 만큼 힘들고 버겁지만, 그걸 상회하고도 남을 무언가가 있으니까 버티는 거다. 이건 말로 설명이 안 된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소윤이, 시윤이의 매 순간을 두 눈(비록 아내의 눈일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에 담고,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아내와 함께 마음껏 주고받고 할 수 있다는걸. (탐난다. 시윤이의 사랑고백.)


오늘은 어디 나갈 계획 없냐고 물어보니 그냥 집에 있을 거라고 했다.


"나가면 다 돈이지 뭐"


다르게 해석하면 나가고 싶긴 하다는 말이었다. 어제 아내가 소윤이의 말을 전해줬었다. 소윤이가 뜬금없이


"아. 맑음케이크 가고 싶다. 거기 케잌이 진짜 맛있는데"


이랬다나. 그 얘기를 듣고 왠지 오늘 퇴근시간에 맞춰 아내랑 아이들이 사무실 쪽으로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일단 그건 아니었다. 짐작건대 무수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퇴근 시간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이제 나가려고"

"아니, 저녁에 애들 저녁은 집에서 싸 가고, 우리 먹을 것도 간단히 싸서 어디 카페 같은 데라도 갈까 해서"

"그럴까? 그래 그럼"

"그럼 어디로 가지?"

"글쎄"

"리스토어가 제일 만만하긴 한데"

"거기 말고. 큐커피 갈까?"

"아, 그럴까?"


원흥역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 카페로 갔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된장국에 버무린 밥, 아내와 나는 고구마, 계란, 감자 등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아내는 밥 말고도 애들 간식을 엄청 준비해 왔다. (어떻게든 좀 편히 앉아 있어 보고자 하는 아내의 의지였다.) 블루베리, 옥수수, 팝콘, 귤 말랭이, 체리, 거기에 커피랑 함께 산 스콘까지. 이 정도 되면 질려서 스스로 그만 먹을 만도 한데 둘 다 끝을 봤다.


"자, 스콘은 이만큼씩만 먹고 나머지는 엄마 드시라고 드릴 거야"

"왜여?"

"엄마도 드셔야지. 너네만 먹어?"

"아빠 그럼 조금만 더 주세여"

"알았어. 자 이게 마지막이야. 나머지는 엄마 몫이니까 너네는 끝"


한 3분의 1 정도 남겨줬나. 조각 케이크라도 하나 더 사려다가 그래봐야 또 어차피 애들 입으로 들어갈 것 같아서 관뒀다. 그래도 간식 덕분에 편히 앉아 있다가 왔다.


시윤이는 한 번씩 안아달라고 엉겨 붙었는데, 걷다가 힘들어서 안아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서 있을 때, 아양 부리듯이 허벅지를 잡고 매달렸다. 하여간 정말 자기 복을 찾아 먹을 줄 아는 아이다.


집에 돌아와서 모든 걸 끝내고, 자려고 방에 눕혔는데 시윤이가 먼저 얘기했다.


"아빠. 나가 안 돼여(나가면 안 돼여). 나가지 마여"


소윤이도 덩달아서


"아빠. 가지 마여. 여기 같이 누워서 자여"


라며 붙잡았다.


"소윤아. 어차피 아빠는 매트리스 위에 혼자 누워 있잖아. 너네 엄마 옆에서 잘 거잖아"

"아, 그래도여. 그냥 같이 자여"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둘 다 그러길래 매트리스에 누웠다. 시윤이에게는 미리 충분히 얘기했다.


"시윤아. 오늘은 자면서 손가락 안 빨 거지?"

"네에"

"손가락 빨지 말고, 울지 말고 자자? 알았지?"

"네. 아빠. 안 빠여(안 빨아여)"

"그래. 잘했어"


둘 다 금방 잠들었다. 시윤이는 약속대로 손가락을 넣지 않았다.


애들이 자는 걸 확인한 아내는 서둘러 거실로 나오더니 휴대폰으로 드라마를 켰다.


"뭐야? 검블유?"

"어. 벌써 10분이나 지났어. 이어폰 끼고 볼까?"

"아니, 그냥 봐. 괜찮아"


아내 옆에 앉아서 슬쩍 슬쩍 훔쳐봤는데, 역시나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난 아무런 감흥이 없는 장면에서 아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따라 하며 아내를 놀렸다.


"킁킁. 우리 아빠 냄새나는데?"

"아, 하지 말라고. 나 그냥 이어폰 끼고 볼 거야"


아내는 이어폰을 끼고 나의 방해 없이 시청을 마쳤다. 드라마가 끝난 것 같은데도 아무 소리가 없길래 뭐하나 하고 나가서 봤더니 또 뭔가를 보고 있었다.


"여보. 드라마 안 끝났어?"

"끝났지"

"또 뭐 봐?"

"어? 하이라이트"

"오늘 본 거?"

"응"


이건 뭐지. 내가 엘지트윈스 경기 하이라이트 보는 거랑 비슷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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