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휴가의 탈을 쓴 울산 육아 3일 차

19.08.02(금)

by 어깨아빠

늦잠을 잤다. 10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아침에 애들이 깨서 소란을 피울 때 살짝 깼다가 좀 더 잔다는 게 그리되었다. 일어났을 때는 모두 아침까지 먹고 난 뒤였다.


"여보. 아침보다 잠을 더 원할 거 같아서 안 깨웠어"

"그래, 고마워"


잠을 푹 잤더니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다.


소윤이는 오늘도 낮잠을 자지 않았다. 제법 늦게(라고 해봐야 8시지만)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어제처럼 눕혀 놓기는 했는데 그렇게 두 시간을 보냈다. 소윤아, 너도 참 대단하다. 자지는 않았어도 두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체력이 좀 찼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나도 두 시간 동안 안 자고 휴대폰하고 게임하고 그랬더니 머리가 아팠다. 에어컨 바람을 많이 쐐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시윤이랑 아내는 잤는데 아내도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아내야 두통이 일상이지만 난 두통이 흔치 않은데, 간만에 괴로웠다.


한나가 점심으로 김치찜을 해줬다. 가자미와 고등어도 구워줬는데 김치찜은 다 먹고 생선은 남겼다. 김치찜이 한 솥이었는데 그걸 다 먹었다. 아침을 안 먹어서 배고프겠다는 한나의 말에 괜찮다고 대답했었는데, 오늘도 언행불일치였구나.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여전히 여기저기서 갈등을 일으키고 훈육을 유발했다. 집에 있을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밖에 나오니까 더 심해진 건가. 아니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그 와중에 정말 신기하게도 소윤이도 시윤이도 시온이에게는 매우 부드러웠다. 시온이가 와서 만지고, 잘못해서 꼬집고, 성가시게 해도 온화한 미소와 함께 시온이를 바라보며 나름대로 아기를 대하는 예를 갖췄다.


"시온아. 그랬어어? 오고 싶었어어?"

"아빠아. 아가아"


점심 먹고 어제처럼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사 왔다. 아내랑 두통약도 한 알씩 나눠 먹었다.


"여보, 우리 텃밭 괜찮겠지?"

"그러게. 머리가 아파가지고"


소윤이는 텃밭에 대한 기대도 잔뜩이었다. 시윤이는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았고. 예전에 어린이집 다닐 때도 텃밭에 가서 뭘 심고, 뭘 땄는지 신나서 얘기해주곤 했다.


오늘부터는 승아네 집에 신세를 지기로 해서 짐을 모두 챙겨 나왔다. 역시나 날씨는 뜨거웠다. 텃밭은 차로 한 20분 갔는데 정말 산속에 있는 텃밭이라 참 좋긴 했다. 공기도 맑고 푸르르고. 울산 처치홈스쿨에서 경작하는 텃밭인데 스무 평쯤 된다고 했다. 여기도 남자 어른은 세 명뿐이었다. 농사의 고수처럼 보이는 어떤 분과 대성 씨(승아 남편), 그리고 나. 엄마들은 많으니 애들을 볼 일은 별로 없었던 대신 열심히 밭을 갈았다. 농사 고수처럼 보이는 분의 지시를 따라 삽으로 흙을 갈아엎고 쟁기로 고르게 갈았다. 대성 씨는 계속 가을이를 안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가을이는 엄마가 아닌 아빠 품을 그렇게 찾는다고 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일세.


애들도 나름대로 호미를 들고 땅을 파서 이것저것 심고 그랬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흙이 싫지 않은 듯했다. 중학생 때였나, 교회 수련회 갔다가 밭에서 잡초 뽑은 거 말고는 농사(?) 비스름한 경험이 처음이었다. 두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땀이 비 오듯 흐르고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덥긴 무지 더웠다. 그래도 재밌었다. 애들한테 가르쳐 줄 것도 많고. 노동의 원리를 가장 노골적이고 꾸밈없이 배울 수 있달까. 땀 흘린 만큼 거둘 수 있으되, 때로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우리도 텃밭을 하나 분양받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머리 아픈 게 싹 나았다. 쉴 새 없이 땀을 흘리며 독소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물론 약발일지도 모르지만.


하준이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퇴근 후 곧장 그리로 왔다. 오늘도 정장차림이었다. 한나가 한 손에 작업복을 쥐고 흔들며 반갑게 남편을 맞았다. 하준아, 환영해.


"소윤아. 텃밭 어때? 힘들지 않아?"

"힘들긴 한데 재밌어여"

"그래? 우리도 텃밭 하면 좋겠지?"

"네"


지속 반복의 고통을 느끼기 전이라 그리 쉽게 대답하는 것이겠지.


짧은 노동을 마치고 물로 간단히 흙만 씻어냈다. 오늘은 승아네 집으로. 애들부터 차례대로 씻기고 어른들도 씻었다. 아내들(가영, 승아, 한나)은 오늘 밤 출가 회동을 갖기로 했다. 저녁 식사가 늦어졌지만 모두 남편에게 애들 재우는 걸 맡길 수 있어서 저녁만 먹고 부지런히 준비를 했다.


소윤이는 낮잠도 안 잤고 하루 종일 열심히 땀도 흘렸고, 취침시간도 늦어져서 야간 짜증이 폭발했다. 그러다 선을 넘고 말았다. 하던 걸 그만하고 이제 자자고 했나 그랬는데,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걸 던지고 소리를 빽하고 질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소윤이는 나에게 처음으로 회초리를 맞았다. "아이 씨"라는 말을 실수라도 하게 되면 회초리를 맞는 거라고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어제 그 말을 했고 한 대를 맞았다. 처음이었다. 서럽게 울었고.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이라니. 오늘은 아내도 함께 들어오라고 했다. 아주 따끔하게 한 대를 맞았고 어제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더 아프게 맞았으니까. 소윤이를 안고 다시 한 번 설명하고, 함께 기도하고 상황을 마쳤다. 아내는 곧바로 승아와 함께 집을 나갔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거실에 누워 잠을 청했다. 소윤이는 여전히 서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납득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대화가 되니 소윤이의 마음을 읽을 때 조금이나마 정확도가 높아져서 좋다. 소윤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소윤이가 서러웠던 것의 몇 배만큼이나 내 속도 상하고 가슴이 아팠는지, 나중에 소윤이가 자식 낳아서 길러 볼 때쯤에나 알겠지? (내 반드시 이 일기들을 유산으로 남겨주리라)


은율이를 재우고 나온 대성 씨가 에어컨 쪽으로 다가갔다. 에어컨이 고장 나서 물이 샌다고 하더니 에어컨 주변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대성 씨가 마른 수건을 가지고 바닥을 열심히 훔쳤지만 한계가 있었다. 에어컨 바로 옆 책장 밑으로도 물이 스며들었다. 책장을 꾹꾹 누를 때마다 물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책을 좀 빼고 책장을 옮겨볼까요?"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소윤이와 시윤이가 잠귀가 밝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바로 옆에 자는 애들을 두고 책장의 책을 모두 뺐다. 책장도 옮겼다. 역시나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대성 씨는 바닥의 물을 연신 닦아냈고 난 책장에 묻은 물을 닦아냈다. 내 이마에 흐르는 땀도 닦아내고. 정말 다행인 건 대성 씨가 물이 새는 원인을 찾아냈다는 거다. 배수 호스를 아예 분리시켜서 자그마한 통을 받쳐놨다. 어렸을 때 쓰던 기차 모양 연필깎이 찌꺼기 받는 통보다 조금 큰 크기였다.


격한 움직임을 멈춰서인지 아니면 물이 잘 빠져서인지 에어컨도 한결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땀도 점차 식어갔다. 대성 씨랑 식탁에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눴다. 늘 그렇듯 대성 씨는 커피 한 잔을 줘도 멋들어진 잔에 기분이 나도록 담아줬다.


사실 대성 씨랑 둘이는 그렇게 친하지 않다. 안 친한 건 아니지만 친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처치홈스쿨 얘기, 자녀 양육 얘기, 앞으로의 계획 얘기 등등 매우 건설적인 이야기였다. 대성 씨는 대화 중간중간 에어컨 물이 찬 통을 비우러 자리를 떴다. 아 참. 대성 씨가 대화 중에 날 지칭할 때 '형님'이라고 했다. 이제 지구상에 날 PD라고 부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내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내가 예상한 시간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난 1시 30분을 예상했다. 대화의 소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실에서 자고 있는 애들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먼저 눕기로 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그럼 이제 책장을 다시 옮길까요?"

"아, 그래요"


책장을 다시 원래 자리에 갖다 놓고 빼놨던 책을 다시 꽂았다.


'그래도 오늘 하루 밥 값은 했다'


아무래도 물받이 통이 너무 작아 보였다. 에어컨을 끄기에는 너무 더웠고 그대로 자기에는 분명히 물이 넘칠 것 같았다. 그럼 내일 또 책을 빼고 책장을 옮겨야 한다.


"통을 좀 큰 걸로 바꿀까요?"

"아 그게 좋겠네요"


싱크대에 놓여 있었을 법한 스테인리스 통을 가지고 왔다. 훨씬 컸다. 그 정도면 충분해 보였다. 가을이가 6시도 안 돼서 깬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넘칠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두시 쯤 돼서 아내와 승아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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