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05(월)
생일이다. 서른다섯 번째. 아내는 미역국을 끓여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어제 11시가 넘어서 집에 왔는데 미역국은 무슨. 전혀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소에 연락 잘 안 하던 사람들로부터 조금 더 연락이 오는 정도의 날일 뿐이다. 나중에 소윤이, 시윤이가 커서 챙겨주면 조금 특별하게 느껴질까.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오늘부터 휴가였다. 강원도로 떠나시는 길에 집에 들러 아내와 아이들과 점심을 드셨다. 아내는 계속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아내랑 둘이 가서 먹는 거면 모를까 애들 데리고 가는 건데 막 연기 자욱한 숯불 돼지갈비 먹으러 갈 수는 없었다.
"글쎄. 뭐 아무거나 먹지 뭐. 여보는 먹고 싶은 거 없어?"
"나? 오늘은 여보 생일이잖아. 여보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순댓국, 족발 이런 거 얘기할 걸 그랬나. 퇴근할 때까지 별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다.
"여보. 그럼 송스키친 갈까?"
"그래, 그러자"
집에서 가깝고, 애들하고 가기에도 무리가 없고. 모두(특히 아내)가 좋아하는 메뉴고. 어떤 날이건 가장 무난한 선택이 되는 곳이었다.
아내랑 아이들은 엄청 늦은 오후에 다같이 낮잠을 잤다. 아내가 너무 졸려서 거실에 이불을 펴고 누웠는데 소윤이, 시윤이도 함께 잠들었다. 모두 푹 자고 일어났다.
집에 갔더니 소윤이가 책상에 앉아 뭘 열심히 쓰고 있었다.
"소윤이 뭐해?"
아내가 눈짓으로 눈치를 줬다. 소윤이는 생일 축하 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진작에 쓸 생각이었는데 예정에 없던 긴 낮잠을 자면서 늦어졌다. 모르는 척했다.
"아빠. 보지 말고 다른 거 하고 있어여?"
"그래, 알았어"
소윤이의 몸짓에서 정성과 노력이 느껴졌다. 아내가 시켜서 억지로 쓰는 건 아니었다. 소윤이는 자기 나름대로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을 주는 거다. 아내가 써 준 글씨를 보고 그대로 따라 적는 거지만, 적잖은 끈기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아마 내가 생전 처음 보는 한자를 보고 따라 적는(그리는) 느낌과 비슷하겠지.
잠시 후 소윤이가 나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아빠. 자여. 이제 다 됐어여"
"오잉? 뭐야? 편지 썼어?"
"네. 지금 열어봐도 되여"
"우와. 엄청 기대되는데?"
"뭐라고 썼는지 알아여?"
"그럼.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많이 많이 사랑해요"
"그리고 이거는 꽃이랑 케잌이에여. 초는 너무 많으면 안 되니까 세 개만 그렸어여"
"우와. 열심히 그렸네. 고마워 소윤아"
아내가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휴가 가시고 빈 집이 된 파주에 가서 며칠 자자고 했다. 내일 누구 만날 약속도 있고 해서. 내일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함께 가서 하루나 이틀 자고 오려고 했다. 생각하다 보니 그냥 오늘 가서 자는 건 어떨까 싶었다.
"여보. 그냥 오늘도 파주에서 잘까?"
"아, 그럴까?"
"응. 어차피 내일 아침에 갈 건데. 오늘 애들도 늦게 잘 텐데"
"하긴. 그게 낫겠다"
어제 휴가에서 복귀해서 아직 짐도 채 못 풀었는데, 아내는 다시 짐을 챙겼다.
"소윤아. 파주 할머니 집에서 자는 거 좋아?"
"그럼여"
"할머니 안 계시는 건 알지?"
"알져. 그래도 좋아여"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오늘은 피자를 잘 먹었다. 볶음밥도 잘 먹고, 파스타도 잘 먹고. 메뉴 네 개는 과하고 세 개는 그날 그날 다르고. 오늘 같이 잘 먹는 날은 세 개가 살짝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내와 나는 초연했다. 근처 카페를 갈까 하다가 파주에 있는 카페에 가기로 했다. 어차피 애들은 잠들지 않을 테니.
카페에 도착해서 주문을 하는데 케이크가 다 팔리고 없었다.
"헉. 케이크는 없어요?"
"네, 오늘은 다 팔려서"
"여보. 어떻게 하지? 이럴 수가"
"저거 있네. 저거라도 사지 뭐"
"초도 하나 사자"
"됐어. 뭘 초를 사. 그냥 하면 되지"
"애들이 하고 싶을걸"
"아, 애들 때문에"
까놀레인지 꺄놀레인지 하는 게 세 개가 남아 있었다. 그거 두 개랑 아이스아메리카노, 아이스라떼, (생)딸기 우유를 시켰다. 카페에 가도 아직은 아이들을 위한 음료는 따리 시켜주지 않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기쁨을 선사했다.
"자, 우리 초 켜고 다 같이 아빠 생신 축하 노래 부르자"
"엄마, 이건 뭐에여?"
"아, 이거 딸기 우유야. 생일 축하하고 나눠 먹자"
"지금 딱 한 번만 먹어보면 안 돼여?"
"이따가. 아빠 생신 축하하고"
"알았어여"
카페니까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촛불도 끄고.
"엄마. 이제 먹어도 돼여?"
"소윤아. 아빠한테 생신 축하드린다고 얘기도 하고 그래야지"
"생신 축하드려여. 엄마 이제 먹어도 돼여?"
"엄마. 머거 대여엉?"
시윤이까지 가세했다.
"얘들아. 아빠 얼굴 보고 생신 축하드린다고 해야지"
"아빠. 쟁쟁 쭈카여(생신 축하드려여)"
"엄마. 난 아까 했어여"
아빠 생신이고 뭐고 딸기 우유에 정신이 팔렸다. 고작 딸기 우유 한 컵에 모든 관심을 빼앗기다니. 분발해야겠다.
"여보의 생일이 뭔가 너무 훅 지나가는 것 같네"
"다 그렇지 뭐"
글쎄 뭐. 엄청 극도로 흥분되거나 기쁘지는 않아도 그냥 애들하고 앉아서 웃고 떠드는 것도 나름 큰 행복이었다. (이렇게만 적어 놓으면 너무 작위적이라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순간에도 훈육은 계속됐다)
집(처가댁)에 돌아와서 날이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일 축하를 한 번 더 받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랑 함께 뛰고 춤추면서.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날, 미역국도 없이, 빈 처가댁에서 맞은 야릇하게 행복한 생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