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29(토)
두통에 시달린 아내는 밤잠도 설쳤는지 일찍부터 일어나서 소란을 피우는 두 녀석의 방해에도 잘 일어나지 못했다.
"소윤아 시윤아 나가자. 아빠랑 나가자"
애들을 대동하고 거실로 나왔다.
"여보. 10분만 더 잘게"
아내가 얘기했다. 10분만 더 잘리도 없었고 깨울 생각도 없었다. 오랜만에 아침 시간을 홀로 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소윤이도 시윤이도 기분이 좋아서 크게 힘들지 않았다. 잘 놀던 소윤이가 또 간식을 달라고 슬슬 시동을 걸길래
"소윤아. 그럼 아예 아침 먹자. 아침 먹고 간식 먹자"
라고 받아치고 아침을 준비했다.
"소윤아. 뭐 먹고 싶어?"
"계란밥"
그냥 계란밥은 너무 아쉬우니 냉동실에 있는 닭가슴살이랑 어제 아내가 쓰고 남은 파를 넣고 볶음밥을 해주기로 했다. 얼린 닭가슴살을 살짝 녹여서 쓸 만큼만 잘라 내려고 낑낑대고 있는데 문득
'밥은 있겠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급히 냉동실을 열어 살폈으나 얼려둔 밥은 없었다. 그렇다면 밥솥. 압력밥솥에는 어제 아내가 만들어 놓은 누룽지가 남아 있었다. 급히 누룽지를 처리하고 후다다닥 설거지를 한 뒤 쌀을 씻어서 밥을 안쳤다. 시윤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무슨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소윤이가 뭔가 서러워서 크게 울었고 그 소리에 아내가 깨서 나왔다. 시윤이는 엄마 없이도 잘 놀더니만 엄마가 등장하자 갑자기 엄마한테 들러붙었다. 하는 김에 아내가 먹을 만큼 만들어서 세 명에게 모두 같은 밥을 대령했다. 시윤이는 엄청 잘 먹었고 소윤이는 그럭저럭 잘 먹었다.
"여보. 좀 짠데?"
간장을 좀 과하게 넣었더니 짠 감이 없잖아 있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밥을 더 넣었고 그만큼이 아내 몫이 되었다. 좀 잦아드는 것 같던 소윤이의 기침이 다시 심해져서 오전에 병원에 다녀와야 했다. 아내가 소윤이에게 물었다.
"소윤아. 병원 누구랑 갈 거야? 엄마랑 갈 거야? 아빠랑 갈 거야?"
"어. 엄마랑"
"엄마랑 갈래?"
"아. 아니아니. 아빠랑 갈게"
"아빠랑 갈래?"
"어어. 아빠랑 갈게. 왜냐하면 내가 엄마랑 가면 시윤이가 엄마 없다고 우니까"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름의 이유를 설명했다. 나간 김에 소윤이랑 데이트도 하고 아내한테 집 정리할 시간도 좀 줄 겸 시간을 보내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윤이는 곧 낮잠 잘 시간이라 가능할 것 같았다. 나갈 준비를 하고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데 시윤이가 자기도 가겠다면서 유모차 밑에 있는 자기 신발을 꺼내서 신겠다고 낑낑거렸다. 신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나한테 신발을 들이밀며 신겨 달라고 했다.
"아니야 시윤아. 시윤이는 안 나가. 집에 있을 거야"
이 쪼그만 녀석이 이제 이런 말을 다 알아듣고는 서럽게 울며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순간 고민했다. 1차 고민은
'과연 애 둘을 데리고 나가도 괜찮을까'
2차 고민은
'소윤이가 섭섭해하지 않을까'
1차 고민은 빠르게 내 안에서 결정하고 2차 고민의 결정자인 소윤이에게 의사를 물었다.
"소윤아. 시윤이도 데리고 갈까?"
"싫어"
"싫어? 그래 알았어. 그냥 둘이 가자"
설마 이 대화도 알아들었나 싶을 정도로 더 서럽게 우는 시윤이가 눈에 밟혔는지 소윤이가 다시 얘기했다.
"아빠. 그냥 시윤이도 같이 가자여"
그리하여 아내가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아내에게는 굳이 병원 갔다가 어딘가 좀 더 있다 올 거라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막상 데리고 나갔는데 너무 힘들면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으니까. 소윤이는 아주 신났고 시윤이는 카시트에 앉으니 자려고 했다. 동요를 크게 틀고 있는 호들갑 없는 호들갑 다 끌어다 떨며 시윤이의 잠을 깨웠다. 그렇게 졸려하더니 병원에 내려놓으니까 좋다고 돌아다녔다. 시윤이 혼자 내복 차림인 게 좀 미안했다. 나는 새로 산 신발도 신고 병원 갔다 어디를 갈지 모르니 거기에 맞춰서 좀 갖춰 입고 나왔고. 소윤이도 그럴싸한 외출복을 입었는데 시윤이만 세상 후줄근한 내복이었다. 아무리 시윤이가 소윤이보다 옷발이 좋다지만 내복은 내복일 뿐이었다. 미안하다 아들아.
다행히 소윤이의 이번 기침은 천식 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하셨다. 코가 많이 부어 있는 걸로 봐서는 콧물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는데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다들 비염에 시달리는 걸 보면 소윤이도 비슷한가 보다. 뭐가 문제일까. 우리 집의 공기가 안 좋은가 아니면 유전이라 어쩔 수 없나.
이제 혼자 앉아서 진료도 받고 울지도 않는 소윤이는 우는 아이 달래기 위한 비타민 사탕을 받을 필요가 없지만 아마 이거 못 받게 하면 울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두 개, 약국에서 두 개. 한동안 비타민 사탕은 잘 안 먹더니니 요즘은 또 즐겨 먹는다.
'어디를 갈까'
병원에서도 약국에서도 계속 생각했다. 소윤이만 있으면 카페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문제는 시윤이었다. 시윤이 때문에 뭔가 탁 트이고 넓은 야외로 가고 싶었다.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시윤이는 차에 태우면 바로 잠들지도 모르는 상태라 너무 멀리 가는 것도 좀 그렇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으나 마땅한 곳을 생각해내지 못했고 그냥 [커피앤수다]에 가기로 했다. 사장님이 애들을 워낙 예뻐하셔서 조금 난장을 피워도 이해해 주신다는 이유로 부담이 덜했다. 역시나 시윤이는 거의 잠든 상태까지 갔는데 내가 막 간지럽히면서 억지로 깨웠다. 시윤이는 싫다고 엄청 짜증냈지만 계속 깨웠다. 어차피 쉬자고 나온 거 아니니까 기왕이면 밖에 있을 때는 놀다가 집에 들어갔을 때 자면 좋을 것 같았다. 카페에 도착해서 내려놨을 때도 언제 졸렸냐는 듯 엄청 잘 놀았다. 매장 안에는 앉아 보지도 못하고 야외 데크에서 계속 시윤이 쫓아다녔다. 자꾸 옆 건물 주차장 입구 쪽으로 가려고 해서 그거 막느라고 고생했다. 아내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여기 커피앤수다"
"갑자기 왜?"
"그냥 나온 김에. 여보 청소 열심히 하라고"
"언제 올 건데?"
"글쎄. 아니면 여보도 나올래?"
"그럴까? 알았어"
아내를 부르길 잘했다. 두 녀석과 함께하는 정신 사나운 시간이 길어지니 슬슬 자아의 분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푸쉬카를 밀며 등장하는 아내에게 내가 가장 먼저 달려가서 안기고 싶었다. 후광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역지사지 백 번 해봐야 직접 그 입장에 한 번 처해보는 게 훨씬 낫다. 나의 퇴근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이 이렇겠지. 아내는 오자마자 시윤이의 똥냄새를 감지하고 바로 뒤처리를 하러 갔다. 시윤이가 똥 싸는 듯한 느낌을 받은 순간은 있었지만 굳이 냄새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알고도 닦아주지 않는 건 나쁜 짓이고 몰라서 닦아주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쁜 짓은 하기 싫으니 힘써 모르는 상태를 유지했다. 아내는 소윤이랑 한살림에도 다녀왔다. 소윤이가 하도 자기 맛있는 거 먹어야 한다고 해서 엄마 오면 갔다 오라고 했다. 포도 주스와 쌀대롱 과자를 사 왔다. 시윤이도 쌀과자를 흡입했다. 소윤이 때는 상상할 수도 없던 염분과 당분의 조기 섭취. 이제는 일상이다.
소윤이는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맨날 잘 먹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짜장면은 찾는지. 근처 짜장면 집으로 갔다. 짜장면 하나와 탕수육 하나를 시켜서 아내와 소윤이, 시윤이가 나눠 먹었다. 시윤이는 탕수육 대여섯 개를 잘게 잘라주니 정신없이 집어 먹었다. 짜장 양념에 비벼준 밥은 안 먹고 흰 밥을 주니 잘 먹었다. 소윤이는 역시나 시원스럽게 먹지는 않았지만 꾸역꾸역 할당량을 다 먹도록 했다.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건 누구 때리는 거랑 똑같이 나쁜 짓이다"
"감사하고 즐겁게 먹지 않을 거면 억지로 먹지 마라"
"배고파서 울고 있는 니 친구들이 엄청 많다"
요즘 소윤이에게 가장 엄하게 가르치고 있다. 먹는 게 즐겁지 않고 감사하지 않은 적 없는 나로서는 가장 떳떳하게 훈육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병원에서 집에 안 들렀기 때문에 차를 가지고 집에 가야 했다. 소윤이는 아내랑 함께 푸쉬카 타고 가기로 했고 시윤이만 차에 태우기로 했다. 5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태우자마자 잠들 것 같았고 예상대로 됐다. 그대로 방에 눕혀서 시윤이는 낮잠. 소윤이도 이때 같이 한 숨 자면 좋으련만 체력이 세져도 너무 세졌다. 전혀 졸린 기색도 없고 지치지도 않고. 그래도 이미 늦은 오후가 임박했을 정도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어디라도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가득했다. 곧 사라질 이 계절을 어떻게든 더 누려야 하니까. 여기저기 후보지는 많았는데 결국 정하지 못했다.
"그냥 놀이터나 가자"
만만한 게 놀이터다. 오후 끝자락쯤 킥보드를 가지고 놀이터에 나갔다. 시윤이도 한 숨 자고 일어나더니 100% 충전 상태라 활력이 가득했다. 소윤이는 낮잠 따위 안 자고도 강철 체력이었고. 이 쪽 놀이터에서 놀다가 저 쪽 놀이터로 옮겨 가서 놀기도 하고 킥보드도 타고. 중간에 하람이도 만나서 하람이랑도 잠깐 같이 놀고. 하여간 둘 다 그대로 뒀다가는 밤이라도 새울 기세라 작전이 필요했다.
"여보. 소윤이 아이스크림 하나 사줘도 되나? 그걸로 설득하려고"
"그러자 그럼"
아내에게 작전 승인을 받고
"소윤아. 우리 이제 들어가야 되는데 그냥 들어가면 아쉽잖아. 그렇지?"
"응"
"그러니까 들어가기 전에 한살림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가지고 먹으면서 갈까?"
"어. 좋아 좋아"
단순한 녀석. 밖에서 밥을 먹을까도 했지만 시윤이 때문에 정신없을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니 숨이 턱 막혔다. 애들은 집에 들어가 고등어 구워서 밥을 먹이기로 했다. 아내랑 나는 애들 재우고 뭘 시켜 먹을까 고민했는데 아내가 오코노미야끼를 제안했다.
"여보. 또 오코노미야키 만들어 먹을까?"
"좋지"
롯데슈퍼에 들러 부족한 재료를 좀 샀다. 자 이제부터는 속도전. 얼른 밥 먹이고 빨리 씻겨서 일찍 재우는 게 아내와 나의 공통된 목표였다. 사실 저 중 하나라도 성공하면 다행인 게 애 둘 육아다. 오늘은 다 성공적이었다. 시윤이가 조금 버티긴 했지만 우리의 목표 시간보다 많이 늦지 않은 때에 육아 퇴근에 성공했다. 낮잠 안 자는 소윤이 때문에 한시라도 쉴 틈이 없는 대신 빠른 육아 퇴근으로 보상받고 있다. 아내는 부지런히 오코노미야키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까 애들이랑 한살림과 롯데슈퍼 갔다 오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도 얘네 재워놓고 나와서 저런 데 갔으면 좋겠다"
'저런 데' 라 함은 [메뉴를 불문하고 그냥 선선한 바람맞으며 음식도 먹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야외 자리가 있는 식당 어디든]을 뜻했다. 그림의 떡이 따로 없다. 선선한 바깥바람이 아쉽긴 했지만 아내가 해준 오코노미야키도 맛있었다. 앉아서 수다 떠는 것도 항상 재밌고. 자정이 다가오자, 즉 내일이 임박하자 머릿속에 축구 생각이 스윽 차기 시작했다. 성급하게 먼저 말하지 않고 꾹 참았다.
"여보. 내일 축구 가야지? 내일 회식한댔나?"
예쓰. 역시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어. 맞아. 내일 가야지. 여보는 내일 별 계획 없어?"
"어. 아직은"
내일은 축구 끝나고 식사도 예정되어 있었다. 목장 모임부터 치면 거의 6-7시간을 아내 혼자 애들을 봐야 했다. 평소에는 하루 종일도 본다지만 주말은 애초에 먹는 마음가짐이 평일과 다르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아하. 내 무의식은 이미 기상할 때부터 내일의 일정을 떠올렸나 보구나. 그래서 아침부터 그렇게도 착한 남편 코스프레를 하려고 했나 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