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출

19.09.11(수)

by 어깨아빠

아내가 산전 검사를 받으러 11시까지 보건소에 가야 했다. 원래 계획은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준비하고, 명절 짐을 다 챙겨서 다 함께 나가는 거였다. 소윤이가 어제 만들어 놓은 오줌 이불이 문제였다. 두꺼운 매트리스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나머지 이불은 빨아서 건조기에 돌려놓고 가야 했다. 당연히 그러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여보. 여보 상태는 어때?"

"그래도 좀 괜찮아"

"그래? 그럼 차라리 여보 혼자 갔다 올래? 그동안 내가 이불 빨아서 건조기에 넣을 테니까"

"그럴까?"


아내가 나가고 참 많은 일을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기들끼리 놀게 하고. 폭설이 내리는 군부대의 연병장처럼 돌아서면 어지럽혀지는 거실도 치우고, 나 몰래 누가 그릇을 놓고 가는 건 아닌가 싶은 설거지도 하고, 돈이 이렇게 쌓이면 참 좋을 텐데 싶은 재활용 쓰레기도 정리하고, 좁은 집이 감사하기 그지없어지는 청소도 하고, 아내가 추려 놓은 짐도 챙기고. 앉아서 쉴 틈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아빠. 얼음 주세여"

"아빠. 저거 먹어도 돼여?"

"아빠. 과자 없어여?"

"아빠. 자두 주세여"


소윤이와 시윤이는 쉴 틈 없는 나에게 쉴 새 없이 뭔가를 요구했다. 바빠서 좀 기다리라고 하면 집요하게 물어봤다.


"아빠. 얼음은 언제 먹어여?"

"아빠. 과자는 언제 줄 거에여?"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마아아아아아아아안.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다가 딱 한 번 소윤이에게 짜증을 냈다.


"소윤아. 얼음 얘기 좀 그만해. 아빠가 준다고 했잖아"


아내는 보건소에 갔다가 병원까지 들렀다 왔다. 혹시 천식 증세가 갑자기 더 심해지면 먹을 약을 처방받으러 갔는데, 결국 임산부에게는 너무 센 약이라 처방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고 돌아왔다. 산전 검사도 못하고 왔다. 8시간의 공복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전혀 몰랐다.


아내에게 돌아오는 길에 햄버거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애들은 주먹밥을 만들어줬다. 아침 먹은 지가 언제라고 벌써 점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뭘 또 차려주기는 힘들어서 그냥 간단히 주먹밥을 때웠다. 다행히 애들은 더 잘 먹었다.


소윤이도 시윤이도 햄버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시윤이는 먹어본 적도 거의 없을 거다) 아무런 방해 없이 집중하며 맛을 즐겼다. 아내는 담즙토를 올린 이후로 아주 미세하게나마 좋아지는 느낌이다. 아내는 나의 바람이 많이 반영된 평가라고 얘기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 햄버거를 먹었다. 중요한 건 먹고 나서도 크게 불편하거나 그러지 않았다는 거다.


"여보. 이제 우리 얼른 좀 나가자. 빨리 집을 떠나고 싶어. 하아"


적어도 집에 돌아왔을 때 '깨끗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상태를 만들어 놓고 드디어 집을 나섰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도대체 할머니 집에는 언제 가는 거냐며 보챘다. 운전대를 잡고 앉았는데 졸음이 막 쏟아졌다. 너무 피곤했다.


"여보 졸려?"

"어. 졸리네"

"내가 운전할까?"

"여보가? 괜찮아? 안 힘들겠어?"

"운전이야 뭐 괜찮지"

"그래. 그럼 여보가 좀 해 줘. 나 졸 거 같아서 안 되겠다"


아내에게 운전대를 넘기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아내랑 짧은 수다를 떨었고, 그러면 잠이 깼다. 또 자유로 위에서 어디 멈추고 바꿀 데도 없었다. 몇 번을 아내에게 넘기려다가 결국 끝까지 내가 했다.


(내) 엄마, 아빠는 일하러 나가시고 없었다. 그래도 문을 딱 열었는데 너무나 깨끗하게 정돈된 집이 마음에 평안을 선사했다.


'아, 이곳은 천국이야. 내가 할 일이 없는 곳이야. 그게 천국이야'


심지어 좀 더러워져도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이 맛에 엄마, 아빠 집에 오는 거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눕고 싶어서 누운 게 아니라 내 뇌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고, 다리는 그 명령에 순종했을 뿐이다.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아내 말로는 1시간 넘게 잤다고 했다. 잘 잤는지, 머리끝까지 찼던 피로가 배꼽 정도까지는 내려간 느낌이었다. 다행히 아내도 여전히 조금 나은 상태를 유지했다.


(내)엄마, 동생을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중국 음식점에 갔는데 영업이 끝났다고 해서 갈비를 먹으러 갔다. 안 그래도 소윤이는 갈빗집 앞을 지나며 갈비가 먹고 싶다고 했었다. 놀라운 건 아내도 멀쩡히 있었다는 거다. 상황에 따라서는 입덧이 없을 때도 역하다고 느꼈을 돼지 냄새가 아무렇지 않았을뿐더러 잘 먹기까지 했다. 물론 먹고 나서도 괜찮았다. 아내도 최근의 입덧 지수를 고려했을 때, 그 강도가 중간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라고 얘기했다.


엄마, 아빠 집에 온 지 2주쯤 되었는데, 특히 시윤이는 그 짧은 기간에도 새로운 걸 많이 습득하고 장착했는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연신 놀라움을 선사했다. 소윤이의 가장 큰 변화는 능숙하게 한글을 읽게 된 것과 삐뚤빼뚤하지만 자기 머리에 있는 문장을 글씨로 옮길 수 있게 된 거다. 오늘도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고모, 고모부에게 [00 사랑해요] 라고 손 편지를 써서 줬다. 다른 건 다 잘 썼는데 할아버지에게 쓴 편지에만


[하라버지 사랑해요]


라고 오타를 냈다. 또 새로운, 그리고 놀라운 능력을 습득하며 한 단계 성장하는 소윤이에게서 이런 구멍을 발견하는 건 큰 즐거움이다.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을 옛사람(?)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것에 대한 반가움이랄까.


소윤이와 시윤이는 원 없이 놀았다. 10시가 넘도록 놀고 나서야 자러 들어갔다. 아내는 울렁거림은 좀 덜 할지언정 체력은 많이 떨어져서 진작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내와 (내)엄마가 들어가서 애들을 재우려고 했는데 시윤이가 기어코 나도 들어오라고 했다. 강아지처럼 매달려서 진심인 듯


"아빠도 와여어. 아빠도 있는 게 좋아여어어"


이러는데 외면하기 힘들었다. 둘 다 금방 잠들고, 아내는 가장 먼저 잠들었다.


앞으로 3일 동안은 집 더러워질 걱정 안 해도 돼서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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