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2(목)
눈을 떴을 때 당연히 아이들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로 짐작했다. 누가 일어났는지. 소윤이, 시윤이, 그리고 (내) 엄마. 나머지 식구(아빠, 나, 아내, 동생, 매제)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소윤이와 시윤이의 아침 식사까지 끝난 상황이었다. 덕분에 어른들의 아침 식사는 매우 평화롭고 차분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한순간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뭔가를 먹거나, 뭔가를 했다. 시윤이는 아침부터 시원하게 똥도 선물했다. 아침 먹고 앉아 있다가 내가 당구를 제안했다.
"아빠. 당구 치고 올까요?"
나와 아빠, 매제는 집에서 나왔다. 아내의 입덧은 놀랍도록 증세가 사라졌다. 여전히 속은 불편하다고 했지만 확실히 먹을 때도, 먹고 나서도 달라졌다. 다행이었다. 아무리 엄마와 동생이 있더라도 아내 상태가 영 말이 아니면 나오기가 좀 미안했을 텐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무려 세 시간이나 당구를 쳤다. 집에 가 보니 시윤이는 이미 두 시간이나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였다. 소윤이는 당연히 자지 않았고. 소윤이는 비염이 심해서 코도 막히고 무엇보다 눈이 많이 가려운지 하도 비벼서 퉁퉁 부었다. 아무래도 소윤이도 한숨 재워야 할 것 같았다.
"소윤아. 소윤이도 낮잠 자자"
"아, 싫어여"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지금 비염도 심하고 너무 피곤하잖아. 그러다 더 아파져. 잠을 조금 자야 체력이 쌓이는 거야"
"그래도여"
"그래도가 아니라 아빠 말 잘 들어보라니깐"
당구를 너무 오래 치는 바람에 밥시간이 애매해졌다. 점심 겸 저녁으로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기로 했다.
"소윤아. 그럼 치킨이랑 피자 올 때까지만이라도 자. 피자랑 치킨 오면 깨워줄게"
"아빠. 그럼 치킨이랑 피자 오면 바로 깨워주세여. 알았져?"
"그래, 알았어"
아내가 소윤이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거의 바로 나왔다. 그만큼 피곤했던 거다. 피자와 치킨이 한 30분 걸린다더니 딱 그 정도 시간이 지나고 도착했다. 소윤이를 깨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조금 더 기다렸다. 한 40분 정도 지났을 때쯤 깨웠다. 아직 잠을 다 자지 못했는지 일어나지 못했다. 살짝 눈을 뜨는가 싶더니 다시 잠들었다.
"여보. 그냥 좀 더 재우자"
"그래야겠다"
"혹시 일어나서 왜 안 깨웠냐고 하면 잘 설명해줘"
"알았어"
"시윤아. 시윤이도 이따 누나 일어나면 깨웠는데 왜 안 일어났냐고 물어봐"
소윤이 몫으로 치킨 두 덩어리와 피자 한 조각을 미리 덜어놨다. 시윤이는 치킨만 먹었다. 피자는 좀 매콤한 맛이 있었는지 한 입 베어 물고 나서는 맵다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막 혀를 부여잡고 맵다며 짜증을 냈다. 나중에 먹어보니까 은근한 매운맛이 느껴지긴 했다. 그 뒤로는 피자는 물론이고 위에 올라간 토핑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열심히 먹고 있는데 소윤이가 깨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엄마. 왜 안 깨웠어여"
역시나. 출제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내가 잘 설명했고 소윤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참을 아내 무릎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더니 치킨을 한 입 맛보고서는 무장을 해제하고 본격적으로 닭다리를 뜯었다.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더 늦은 밤에 출출할 게 분명한 점심과 저녁 그 사이 어딘가쯤의 식사를 마쳤다. 지난주였나 아내가 어렴풋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추석에 애들 맡기고 또 영화 보러 갈까"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내가 어디 앉아서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내에게 무리일 거라고 얘기했었다. 그러던 아내가 갑자기 좋아지는 바람에 영화도 얼마든지 가능해 보였다.
"여보. 영화 보러 갈까?"
"응"
아내는 내 말의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대답했다.
"지금 바로 가자. 6시 10분이나 6시 45분으로"
"지금?"
"어. 나 밤에는 친구들 만나러 나갈까 하고"
아내랑 영화도 보고 싶고, 친구들이랑 만나서 위닝도 하고 싶고. 다행히 아내가 넓은 아량을 베풀었다. 아내랑은 정말 딱 영화만 보고 돌아왔다. 시간이 빡빡했다. 아내를 집에 내려주고 곧바로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실컷 놀고 돌아왔더니 모두 자고 있었다.
당구, 영화, 게임으로 얼룩진 하루였구나. 시윤이 똥 닦아준 것과 소윤이 늦은 낮잠을 위해 협상한 거 말고는 크게 힘든 게 없었다. 행복했다. 유흥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