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3(금)
(내)엄마, 아빠는 큰집에 가시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가셨다. 다행히 아내도 나도 눈이 떠져서 엄마, 아빠와 인사를 나눴다. 소윤이와 시윤이한테는 어제 미리 말해뒀다.
"내일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가셔야 해서 너희 일어나면 안 계실지도 몰라"
미리 말해두지 않으면 아침부터 피곤한 씨름을 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부재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우리끼리 앉아서 밥을 차려 먹고 간단히 설거지도 하고 청소기도 한 번 싹 돌리고 나왔다. 아무리 손주가 예뻐도, 문을 열고 마주하는 집의 모습이 개판 오 분 전이면 짜증은 날 테니. 아내도 나도 예전에는 뱀 허물 벗듯 그대로 두고 나오기가 일쑤였는데 애 둘 정도 낳고 보니 이런 쪽으로는 철이 좀 드나 보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나왔다.
"소윤아, 시윤아. 할머니 집에서 떠나는데 또 바로 할머니 집에 가네? 엄청 좋겠네?"
좋기로 따지면 우리보다는 애들이 더하겠지. 어제랑 다르게 날씨도 아주 좋았다. 가는 길에 잠시 집에 들렀다. 엄마가 싸 준 것들 중에서 냉장고에 넣어야 할 건 넣어 놓고, 소윤이 자전거를 챙겼다. 어제 거의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으니 오늘은 좀 밖에서 풀어놔야 했다.
"소윤아, 시윤아. 파주에 가면 우리 공원에 가서 자전거도 타고 킥보드도 타자"
소윤이와 낮잠 때문에 한차례 실랑이가 있었다. 신림동에서 우리 집까지 가는 길이 좀 막혀서 소윤이가 살짝 잠들었는데 굳이 애를 써서 빠져(?)나왔다. 다시 자라고 해도 한사코 안 자겠다고 했다. 결국 안 잤다. 어차피 장모님, 장인어른이 함께 계실 테니 육아 부담은 없었다. 정말 소윤이의 피로회복을 위해 재우려고 했는데 끝내 거부했다. 형님(아내 오빠)도 잠깐 파주에 들른다고 해서 태워갔다.
분위기는 전혀 안 났지만 명색이 추석이니 애들이라도 한복을 입혔다. 소윤이는 장모님이 바자회에서 저렴하게 하나 샀는데 아주 딱 맞았다. 시윤이는 작년에 입었던 걸 입혔는데 작은 듯 딱 맞았다. 1년에 두 번 한복 입은 자태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처가댁에 가서 점심부터 먹었다. 아내의 입덧은 심히 좋아져서 롬이가 무사한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내는 그럴 때마다 약간의 헛구역질과 울렁거림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추석에 맛있는 것도 못 먹고 고생만 하겠다며 걱정했는데, 아내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크게 고생도 없었다. 오히려 육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와 휴식을 누렸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많이 신났다. 흥분해서 선을 넘으려는 소윤이와 시윤이, 거기에 크게 힘을 실어주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내와 나는 따로 의논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수준의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그걸 넘어가는 말과 행동만 제지했다. 명절에는 흥이 있어야 하니까.
밥 먹고 자전거와 킥보드, 공을 챙겨서 나왔다. 카페에 들러 잠깐 커피를 마시고 공원에 갔는데 생각보다 볕이 뜨거웠다. 그늘에 있으면 바람이 불어서 시원했는데 양지바른 곳에 가면 꼭 한여름 같았다. 더위는 체력 고갈을 촉진한다. 다만 아이들의 체력하고는 상관이 없고 어른의 체력 소진에만 관여하는 듯하다.
"아빠. 덥다여. 땀이 줄줄 난다여"
"아빠. 더워여어"
말은 그렇게 해도 절대 쉬지 않았다. 킥보드 타다가 자전거 타다가, 공놀이하다가, 그냥 뛰어다니다가. 나도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나름 열심히 협조했다. 공 던져 달라고 하면 던져주고, 자전거 밀어달라고 하면 밀어주고, 숨바꼭질하자고 하면 숨고 찾고, 오줌 마렵다고 하면 화장실 가주고. 그늘에 앉아 쉬다가도 뭔가 요청이 있으면 재깍재깍 반응했다.(사실상 쉴 시간은 없었다.) 둘 다 세상모르고 뛰어놀며 즐거워하니 좋기는 한데 힘들긴 힘들었다.
꽤 한참 놀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만족이 없었다.
"할머니, 우리 놀이터 가자여"
"하부지. 노이떠 가자여어"
장모님과 장인어른의 자비로 아내와 나는 집에 먼저 들어왔다. 애들은 장모님, 장인어른과 놀이터에서 좀 더 놀다 들어왔고. 그 사이 아내와 나는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잠시라고 하기에는 한 시간이 넘었고, 해소된 피로의 양이 꽤 컸지만. 아무튼 아주 달콤한 낮잠이었다. 이 좋은 낮잠을 도대체 왜 안 잔다는 건지. 아빠는 이유를 모르겠다. 소윤아.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내와 내가 자는 동안 목욕까지 했다. 저녁은 밖에서 먹기로 했는데 저녁 먹고 와서 양치만 해서 재우면 된다는 말이었다. 다 된 빨래를 일일이 건조대에 널다가 건조기를 얻은 주부가 느끼는 기쁨이 이런 걸까.
연휴라 장사하는 식당이 몇 군데 없었다. 돈까스를 주력으로 각종 파스타를 파는 식당에 들어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청 잘 먹었다. 요 며칠, 범위를 더 넓히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올해 안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모범적인 식사였다. 일단 군것질이 없었다. 거기에 정신없이 뛰어놀았으니 금상첨화였다. '바로 앉아서 먹어라, 시간 끌지 말고 먹어라, 감사히 먹어라' 잔소리할 필요가 없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저녁 먹으러 오가면서 처가댁에 있는 세발자전거를 가지고 나왔다. 원래는 시윤이 태워주려고 했다. 소윤이가 자기도 타겠다며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소윤아. 소윤이는 자전거 있잖아. 시윤이는 킥보드밖에 없어서 자전거 못 타잖아. 그런데 이 자전거까지 소윤이가 타겠다고 하는 건 너무 욕심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시윤이 타라고 두자"
"아빠. 그래도 너무 타고 싶은데 어떻게 하져?"
"아니야. 그래도 이건 시윤이 타게 둬. 소윤이는 아까 자전거 많이 탔잖아"
말 그대로였다. 누나가 열심히 자전거 타는 거 보면서도 한 번도 떼쓰지 않는 시윤이가 불쌍했다. 일부러 더 시윤이의 권리를 보장해줬다. 소윤이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시윤이에 협상안을 제시했다.
"시윤아. 그러면 저기까지만 타고 누나 타는 거다?"
"아, 시더"
"시윤아. 그럼 이제 지인짜로 저기 빨간 간판 있는 데서 바꿔줘? 알았지?"
"아, 시더. 계속 타꺼야아"
"알았어. 그럼 오늘은 그냥 시윤이 타"
기특하게도 스스로 완전한 양보를 택했다. 그걸 보니 또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다시 중재자로 나섰다.
"시윤아. 누나도 너무 타고 싶다고 하니까 저기까지만 타고 누나한테 양보하자. 대신 시윤이는 아빠가 목마 태워줄게"
"어부바"
"어부바 해줘?"
"네"
대신 시윤이에게도 다른 대안(탈 것)이 필요했고, 내 몸을 바쳤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어렸을 때도 등에 업은 적은 별로 없었다. 간만에 등에 업으니 [어부바]의 매력을 새삼 깨달았다. 착 달라붙은 시윤이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깊은 유대를 주고받는 느낌이랄까. 앞으로 안는 것하고는 달랐다.
집에 가서 뭐 특별한 걸 하며 논 건 아닌데 취침까지의 진행이 더뎠다. 아내와 내가 애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아내도 금방 잠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금방 잠들었고.
파주가 처가댁이라 파주에 와 있는 친구들을 만날까 했지만 귀찮았다. 어제 신림동에서 게임을 하기도 했고. 장모님, 장인어른, 아내와 앉아 추석 특선 영화를 봤다.
말도 안 된다. 내일이 벌써 토요일이라니. 주말이 오는 게 이렇게 아쉽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