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5(주일)
아내가 어제 냉동실에 남은 밥이 있냐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얼려 놓은 밥이 한 그릇 정도는 분명히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연휴 내내 노느라 피곤했는지 다른 날에 비해 좀 늦게 일어났고 아내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부지런히 아침 준비를 하려고 냉동실 문을 열었는데 밥이 없었다.
"헐. 여보 밥이 없네"
"진짜?"
"어. 분명히 있는 줄 알았는데 착각했나 봐"
금방 밥을 다시 하면 됐지만 뭔가 귀찮고 번거로웠다. 어제 싸 온 전을 반찬으로 주려고 했었다. 밥을 떡으로 바꿨다. 어제 싸 온 송편이 있었다.
"여보. 애들 그냥 떡이랑 전 줘야겠다. 아침으로. 어차피 금방 교회에서 밥 먹을 거니까"
좀 미안하긴 했지만 새로 밥을 하기에는 귀찮기도 하고 아까웠다. 점심도 교회에서 먹고 저녁도 밖에서 먹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소윤아, 시윤아. 오늘 아침은 떡이랑 전이야"
"아빠. 왜 밥은 없어여?"
"어. 밥을 안 해놨어"
"그럼 지금 얼른 하면 되잖아여"
"어, 맞아. 그렇기는 한데 오늘 하루 종일 밖에서 밥 먹을 거 같아서"
더욱 미안하게 소윤이는 그 와중에 엄청 잘 먹었다.
"아빠. 전 엄청 맛있다여. 진짜 맛있다"
시윤이는 우리의 미안함을 상쇄시켜주려는지 안 먹고 뺀질거리다가 결국 밥그릇을 회수당했다.
교회에 도착해 소윤이와 시윤이를 새싹꿈나무 예배실에 데려다주고 예배당에 내려가 주보를 보는데 비보가 적혀 있었다.
[오늘은 추석 연휴 관계로 식당을 쉽니다]
"헉. 여보 어떻게 하지?"
"그러게"
예배가 끝나고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왔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 식당이 쉰대"
"왜여?"
"추석 연휴라 고향에 가신 분들이 많으니까"
아침을 든든히 먹였으면 그냥 간단히 빵 같은 걸로 때웠을 텐데 그럴 수는 없었다. 저녁에도 밖에서 밥을 먹을 예정이라 점심에도 밖에서 먹으려니 뭔가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내가 등촌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해서 거기로 갔다.
등촌칼국수는 아내가 학생일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좋아하고 잘 먹는 몇 안 되는 음식이다.(다른 대표 음식으로는 파스타가 있다.) 단점은 애들이 함께 먹을 수 없다는 거다. 소윤이는 이제 매운 음식을 좀 먹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른이 먹어도 칼칼한 국물 음식까지 소화하지는 못한다. 씻어주면 매운 걸 참고 먹는 정도다. 시윤이는 말할 것도 없다. 어쩌다 실수로 매운 걸 먹으면 혓바닥을 부여잡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애들은 주먹밥을 시켜줬다. 말이 주먹밥이지 밥에 김 범벅이었다. 이럴 거면 빵 먹이는 것하고 무슨 차이가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아내가 잘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아내의 입덧이 정말 신기하게도 추석 연휴가 끝남과 동시에 조금씩 다시 악화되는 느낌이다. 이쯤 되면 입덧은 온전히 신체와 육체의 변화에서 기인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분명히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다. 아내는 이렇게 추정했다.
"연휴 때는 아무런 부담이 없어서 그런가. 남편도 계속 같이 있고, 부모님들도 같이 있으니까"
가장 유력한 해석이다. 그렇다고 연휴 전만큼 나빠진 것도 아니긴 하지만.
맛있게 먹고 있는데 시윤이가 느닷없이 땡깡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내 식사 태도가 안 좋기는 했지만 적당히 봐주고 있었는데 도를 지나치기 시작했다. 내가 데리고 나가서 훈육을 하려고 했는데도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오랫동안 씨름하고 나서도 수그러들 기미가 안 보이길래 차로 데리고 갔다.
"여보. 나머지 먹고 나와. 나 시윤이랑 차에 가 있을게"
차에 가서도 한참 걸렸다. 언어 구사 능력의 상승과 함께 자기주장과 생각도 잘 표현하고 더불어 반항(?)도 많아졌다.
'내가 뭐 하자고 이 어린놈을 붙잡고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그냥 될 대로 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럴 때마다 또 마음을 다 잡는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살아갈 세상이 그렇게 녹록지 않으니 다른 누가 사랑 없이 덤벼들기 전에 부모인 우리가 수고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바른 방법으로 하고 있는지는 매일 고민스러운 게 문제지만.
여차저차해서 훈육을 마치고 그 사이 아내와 소윤이도 식당에서 나왔다. 커피를 사서 갈까 하다가 아내가 잠시 앉았다 가자고 하길래 카페에 들어갔다. 그리 오래 앉아 있지 않고 나왔다. 오늘따라 둘 다 가만히 있지를 않고 말도 듣지 않았다.
시윤이는 돌아오는 길에 잠들어서 그대로 방에 눕혔다. 아내에게도 들어가서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소윤이에게도 낮잠을 자라고 했다.
"소윤아. 낮잠 좀 자"
"아빠. 싫어여"
"싫어도 자. 아빠가 어제도 얘기했지. 소윤이한테 필요하니까 자라고 하는 거야. 오늘도 이따가 아빠랑 축구 가려면 좀 자야지"
"아빠 그런데 너무 안 졸려여"
"안 졸려도 누워서 눈 감고 있으면 잠들게 돼 있어. 소윤이가 자려고 마음만 먹으면 잘 수 있어. 그러니까 들어가서 돌아다니지 말고 가만히 누워서 눈이라도 감고 있어. 알았어?"
"네"
소윤이가 잘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기대는 했지만 오늘 너무 늦게 일어나서 정말 안 졸릴 것 같았다. 가만히 누워서라도 체력을 좀 비축하라는 뜻도 있었고 잠시나마 애들이랑 떨어지고 싶기도 했다. 어찌 됐든 소윤이를 방에 넣어 놓고 난 빨래방에 다녀왔다. 명절 전에 소윤이가 이불에 오줌 쌌을 때 나머지는 다 빨았는데 가장 두꺼운 매트리스는 그대로였다. 집에서는 빠는 것도, 말리는 것도 불가능해서 빨래방에 가지고 가서 세탁기와 건조기에 넣고 돌렸다. 건조기에 넣어 놓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모두 거실에 나와 있었다.
"소윤아. 잤어?"
"아니여"
역시나.
"시윤아. 잘 잤어?"
"네"
오늘도 둘을 데리고 축구하러 다녀왔다. 어제 장모님이 사 주신 뽀로로 과자, 텐텐을 비상식량으로 챙겼다. 아내가 부디 짧게나마 연휴 후유증(이라기보다 연휴 종료 후유증이라고 해야 하나)을 떨쳐내길 바라며 집을 나섰다.
운동장에 도착하니 자기 아빠 따라서 몇 번 왔던 다른 남자아이도 있었다. 평소에 주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곤 했다.
"소윤아. 혹시 오늘 다른 오빠나 친구들이 핸드폰으로 게임하거나 영상 보면 소윤이는 거기 신경 쓰지 말고 시윤이랑 놀아, 알았지?"
"네"
"소윤이도 같이 껴서 한참 동안 게임하거나 영상 보면 아빠는 축구 그만하고 집에 갈 거야"
"왜여?"
"이렇게 좋은 날씨에 밖에 나왔는데 뭐 하러 게임하고 영상을 봐. 뛰어놀아야지. 알았어?"
"네"
사전 교육이 효과가 있었는지 소윤이와 시윤이는 정말 거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간식에 관심을 뒀다.
"아빠. 뗀뗀 또 먹어도 되여엉?"
"시윤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그리고 방금 먹었잖아"
"그래두여어엉. 또 먹고 지퍼여엉"
"다음 쉬는 시간에 줄 게"
"지이이그으음"
시윤이는 텐텐에 중독됐나 보다. 입에서 사라지자마자 텐텐을 찾았다. 너무 빠른 비상식량의 고갈은 온전한 축구에 지장을 초래할지도 모르니 속도를 조절하려고 했는데 불가능했다. 마지막 경기를 뛰기 전 소윤이를 보니 여기저기 긁고 있었다. 느낌이 영 안 좋아서 가까이 불러놓고 보니 모기한테 물려서 여기저기 붓고 있었다. 시윤이도 마찬가지였다. 시윤이한테서는 달갑지 않은 냄새도 났다.
"시윤이 똥 쌌어?"
"네"
결국 마지막 경기는 뛰지 못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모기에 잔뜩 물린 것도 속상했다. 계속 멀쩡하다가 해지고 나서 순식간에 그렇게 된 듯했다. 시윤이는 가려운 걸 못 참겠는지 계속 벅벅 긁어댔다.
"아빠. 여기가 아파여어"
시윤이는 가려운 걸 아프다고 표현한다. 급한 대로 화장실에 가서 물로도 씻기고 물티슈로도 빡빡 문지르긴 했다.
돌아가는 길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우리 이제 끝나서 가. 여보는 뭐 했어?"
"나 그냥 누워서 쉬었어"
"잘했어. 저녁은 뭐 먹지?"
"글쎄. 여보가 소윤이랑 정해서 얘기해줘"
"그래, 알았어"
아내는 잠깐 통화하는 중에도 여러 번 헛구역질을 했다. 부모님 댁에서 지낼 때는 헛구역질조차도 없었는데, 입덧은 정말 영의 영역인 건가.
"소윤아. 우리 뭐 먹을까?"
"아빠. 국수나무 가자여"
"국수나무?"
"네. 거기 가서 치즈돈까스랑 우동 먹자여"
"아빠. 구쭈나무우. 가자여어"
"그래. 엄마한테 얘기하자"
아내도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왔다. 역시나 소윤이는 엄청 잘 먹었다. 이제 본인의 상태나 주변 환경에 상관없이 기본으로 소화해내는 양이 어느 정도 일정해졌다. 반면에 시윤이는 저녁도 불량한 태도였다. 축구하러 가서 과자와 텐텐을 많이 먹었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냥 뒀다. 즐겁게 놀고 와서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밥 때문에 씨름하기도 했고.
소윤이도 시윤이도 여기저기 긁느라 정신이 없었다. 약을 발라줘도 가려움이 가시지 않는지 멈추지 않았다. 여름 내내 잘 피하다가 여름 다 끝나서 모기의 밥이 되다니. 다 내 탓이다. 모기 기피제 가지고 간다는 걸 맨날 깜빡했다.
아내는 마지막 심경 고백을 남기고 애들과 함께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여보. 내일 오랜만에 혼자 하려니까 긴장되네?"